16년 전 겨울, 어느 여인과의 만남
스크롤 이동 상태바
16년 전 겨울, 어느 여인과의 만남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철의 <세상사는 이야기>

16년 전 정월 초, 나는 정선 증산 역에서 서울 청량리에 가는 열차를 탔습니다. 표에 적힌 번호를 찾아 자리에 앉았습니다. 이른 아침인데도 열차 안은 승객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도 떠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나는 집에서 들고 나온 어제 조간신문을 펼쳐들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신문을 읽는다고 하기보다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방법으로 그저 아무런 생각 없이 건성으로 활자를 읽어 나갔습니다.

그렇게 30여분이 지났을까요, 옆자리에 앉아있던 아주머니가 어디가 아픈지 불편한 기색이었는데, 내게 말을 걸고 싶은 눈치였습니다. 나는 그런 아주머니의 동작을 못 본 척 하면서 계속 신문을 들고 있었습니다. 창가에 몸을 기대고 있던 아주머니가 몸을 똑바로 하더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 박철^^^  
 

“저… 가시는 데가 어디예요?”
“서울입니다.”
“아, 저도 서울까지 가는데.”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아저씨, 저하고 얘기 좀 해도 될까요? 그냥 심심해서….”
“아주머니 댁이 어디세요?”
“서울이요. 사흘 전에 집을 나와서 태백에 있는 예수원에서 이틀 밤을 자고 다시 올라가는 중이에요.”

열차 밖으로는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열차가 원주를 지나자 조용했던 차안이 조금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홍익회 직원이 김밥을 들고 나타나서 “김밥 있어요!”를 외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태백에서 새벽차를 탄 승객들이 아침밥을 안 먹었는지 홍익회 직원이 들고 온 김밥은 금방 동이 났습니다.

잠시 홍익회 직원이 또 김밥을 들고 나타나자, 내 옆에 앉아있던 아주머니가
“아저씨, 김밥 두 개만 주세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틀림없이 아주머니 혼자서 김밥 두 개를 다 먹지는 않을 텐데? 나는 가만있었습니다.
“아저씨, 김밥 좀 드세요.”
“저는 집에서 아침밥을 먹고 왔습니다."

이따금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창백한 얼굴에 화장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저한테 얘기 좀 하자고 하셨지요? 제가 말을 잘 못하지만 남의 얘기 들어주는 건 잘합니다. 어떤 이야기도 좋으니, 속에 있는 생각을 다 털어놓으세요. 아주머니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것 같은데요.”

그랬더니 아주머니 얼굴에 조금 생기가 도는 듯 했습니다.
“그러면 제가 얘기 좀 할까요? 시시한 얘기라고 흉보지 마시고 듣다가 재미없으면 그만 하라고 하세요.”

아주머니는 나이가 38세라고 했습니다. 지금 사는 집은 서울 화곡동에 있는 어느 아파트랍니다. 서울에서 OO여대를 나와 S기업 총무과에 입사하여 재밌게 직장생활을 했답니다. 집안 분위기도 매우 자유로운 분위기였고 부모님이 관대해서, 직장생활 외에 여러 취미 활동을 하면서 젊음을 만끽하며 하루하루 지냈다고 합니다.

“회사를 4년 째 다니던 해였어요. 어느 날 퇴근 준비를 하는데 우리 부서 과장님이 퇴근 후에 만나자는 거예요. 종이쪽지에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적어서 제 책상 위에 슬그머니 놓고 눈짓을 한번 하더니 나가는 거예요. 우리 회사 같은 부서 과장님이 저를 만나자고 해서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았어요. 아무 생각 없이 약속장소에 나갔어요.

어느 커피숍이었는데 과장님이 먼저 와 계시더라고요. 별 얘기 없이 차를 마시고, 맥주 한잔 하자고 하길래 카페에 가서 맥주를 마셨지요. 회식 때 더러 술을 한 두 잔 하긴 했지만 과장님과 둘이서 술을 마신 건 그 때가 처음이었어요. 과장님은 별다른 얘기가 없었어요. 그리곤 헤어졌어요. 그런데 그때부터 과장님이 이틀이 멀다하게 만나자는 쪽지를 보내는 거예요. 솔직히 싫지는 않았어요. 유부남이라는 걸 알았지만, 이성적인 느낌을 갖고 만나는 것이 아니니 크게 부담감을 갖지 않았지요.

 

 
   
  ^^^ⓒ 박철^^^  
 

자주 만나면서 술도 많이 마시게 되고, 영화구경도 가고, 헤어질 때는 꼭 책방에 가서 책을 사주거나, 꽃집에 가서 꽃을 사주는 거예요. 그런데 이상하지요. 처음에는 아무런 느낌 없이 만났는데, 시간이 가면서 ‘혹시 내가 이 사람을 좋아하는 거 아냐?’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느 날 과장님이 나를 좋아한다고, 고백했어요.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은 겉잡을 수 없이 가까워졌어요.”

그 아주머니 얘기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소설초고를 나지막하게 읽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흥미진진하게 아주머니의 이야기에 귀를 세웠습니다. 결국 그 아주머니는 직장 상사였던 과장과 동거를 하게 되었고, 본 부인하고는 이혼을 했다는 것입니다. 본부인에게 애가 둘이 있었는데, 애 둘을 데리고 왔답니다. 애들이 착하고 말을 잘 들어 애들 문제로 속을 썩은 적은 없었답니다.

그런데 3년이 지나면서 남편이 출근 시간이 늦어지고 이상해서 뒤를 캐보았더니, 남편이 직장 아가씨와 몰래 데이트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지금 상습적으로 그런 거냐?’고 했더니, ‘아무 일도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하더랍니다.

그 때부터 남편의 외도가 계속되는데, 어떤 때는 여자를 집으로 데리고 오기도 하고, 며칠 씩 외박을 하기도 하고,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 하루하루를 지옥같이 살다가 ‘내가 저 남자한테 내 인생을 걸고 수 없다. 그냥 나대로 살자'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부터 주요 관심을 재산 증식하는 일에 두었다고 합니다. 남편 하는 짓은 적당하게 눈감아 주고….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어떤 남자를 알게 되었는데 처음부터 호감을 갖고 만나다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게 되었답니다.

“젊은 남자의 집요한 유혹이 시작되었어요. 그런데 한참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는데, 이 젊은 남자는 남편이 돈을 주고 매수해서 나를 유혹하도록 한 것이었어요. 처음부터 남편의 각본에 의해 진행된 것이었어요. 그리고 남편은 나를 간통으로 고소를 했어요. 증거물은 도청한 테이프와 사진이 있었어요. 나는 너무 창피했어요. 남편의 요구는 자기와 이혼해 달라는 것이었지요. 내가 간통혐의로 구속된 사이 남편은 모든 재산을 다 자기 앞으로 빼돌렸어요.”

하는 수 없이 남편이 하자는 대로 재산 포기 각서를 써 주고, 남편이 고소취하를 해주고 나서 구치소에서 풀려 나왔는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나 막막하고 답답해서, 처녀 적 한 번 가보았던 태백에 있는 예수원을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나는 아무 할 말이 없었습니다. 이 아주머니에게 불어 닥친 불행한 일에 끼어들어 문제를 해결해 줄만한 법률적인 지식도 없었고, 또 그럴만한 처지도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열차는 청량리 플랫폼에 도착했습니다. 아주머니는 주섬주섬 짐을 챙기더니, 자기 얘기를 들어주어서 정말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마음 같아선 조용한 찻집으로 가서 그 아주머니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위로해 주고 싶었지만, 입에서 말이 떨어지질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출구로 몰려들자 그 여인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 박철^^^  
 

나는 그 여인과의 만남 대해서, 그리고 조금이라도 도와주지 못한 것에 대해서 마음 한 켠 짠하게 남아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내 그 기억을 잊었습니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나 정선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녁 9시 TV뉴스를 보게 되었습니다. 뉴스가 진행된 지 절반쯤 지났을 때 TV를 켰는데, 서울 화곡동에서 김 모 여인이 투신자살했다는 아나운서 멘트가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머리칼이 쭈뼛하고 서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뉴스 끄트머리에 그 여인이 투신한 이유는 남편과 심한 성격 차이로 인해 부부싸움이 잦았는데, 정확한 원인은 지금 경찰에서 조사 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뉴스를 보고 나서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사흘 전에 우연히 열차에 만 난 여인이 바로 오늘 아파트에서 투신한 여인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청량리역에서 그 여인을 붙들고, 조금이라도 그 여인의 마음을 달래줄 수도 있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인간의 불행한 삶에 대하여 그냥 모르는 척 지난 친 게 아니냐? 하는 심한 자괴감이 꼬리를 물고 따라오는 것이었습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메인페이지가 로드 됐습니다.
가장많이본 기사
뉴타TV 포토뉴스
연재코너  
오피니언  
지역뉴스
공지사항
동영상뉴스
손상윤의 나사랑과 정의를···
  • 서울특별시 노원구 동일로174길 7, 101호(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617-18 천호빌딩 101호)
  • 대표전화 : 02-978-4001
  • 팩스 : 02-978-830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종민
  • 법인명 : 주식회사 뉴스타운
  • 제호 : 뉴스타운
  • 정기간행물 · 등록번호 : 서울 아 00010 호
  • 등록일 : 2005-08-08(창간일:2000-01-10)
  • 발행일 : 2000-01-10
  • 발행인/편집인 : 손윤희
  • 뉴스타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뉴스타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ewstowncop@gmail.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