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에바 깐시온과 빅토르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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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바 깐시온과 빅토르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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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겁게 자유를 노래하다 죽어간 가수

한국의 노래운동보다 시간적으로 조금 더 빨랐던 1960-70년대에 전개되었던 라틴아메리카의 노래운동은,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전통적 가락에 담아서 압제에 대한 저항운동을 벌린 일종의 문화운동이다.

우리나라의 민주화 운동이 막바지로 치닫던 80년대에 문화운동이 보여준 위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초기의 민주화 운동은 극심한 탄압을 피하여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숨은 공간에서 진행되었다. 산발적인 시위로만 터져 나오던 민주화운동이 대중적인 것으로 바뀔 수 있었던 데에는, 문화운동의 영향력이 상당히 크게 작용했었다.

여러 형태의 문화운동 중에서도 노래패에 의한 서정성 짙은 노래의 보급은, 학생대중의 정서에 깊숙이 파고들면서 민주화운동의 정당성을 각인시켜주는 동인이 되었다. 이렇게 우리나라에서 노래운동이 본격화되기 약 10-20년 전, 우리나라와는 멀리 떨어진 지구의 반대에서 뜨겁게 노래운동을 펼치다 사라져 간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칠레의 누에바 깐시온(Nueva Cancion)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빅토르 하라’이다. 그는 가수이지만 단순한 가수가 아니었다. 그는 문화를 통해 정치적 운동을 벌인 정치가였고, 아옌데 선거혁명의 주요한 담당자였다.

우리말로 ‘새 노래’ 혹은 ‘새로운 노래 운동’ 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 누에바 깐시온은 칠레의 고유한 것이 아니다. 공식적으로 누에바 깐시온은 아르헨티나의 시인이자 음악인인 아따우알빠 유빤끼(Atahualpa Yupanqui)가 1940년대부터 민속자료의 수집과 연구를 시작한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라틴아메리카인들 사이에서는, 원주민의 전통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주로 도시에서 떨어진 변방에서 가축을 치는 가우초(남미의 카우보이)들이나, 변방에 정착한 가난한 이민자들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다. 그렇게 시작된 원주민음악과 서구음악의 결합이 차츰 도시인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이, 바로 누에바 깐시온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의 문화운동이 처음에는 탈춤 등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던 것처럼, 누에바 깐시온도 처음에는 자신들의 민속회복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점차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묻는 의식이 가미되기 시작하면서, 라틴아메리카의 모순을 비판하고 새로운 질서를 염원하는 내용을 담은 그릇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누에바 깐시온은 어느 한 나라의 것이라기보다는 비슷한 시기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일련의 시대적 움직임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역시 누에바 깐시온의 정점에는 1970년을 아옌데 정권의 출범을 전후한 칠레와, 쿠바 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혁명기의 쿠바에서도 Nueva Trova란 이름의 새로운 노래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도 이름만 다르지 본질적으로 누에바 깐시온과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은 혁명의 무기로서 니카라구아 그리고 엘살바도르로 건너갔었다. 또 베트남 반대운동을 벌이던 미국의 학생운동에도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빅토르 하라는 칠레의 수도인 산티아고 주변의 로껜이라는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술주정뱅이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어머니를 구타하곤 하던 아버지는 결국 집을 떠나 버렸고, 어머니의 고된 노동으로 빅토르 하라는 성장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힘든 노동을 한 뒤에도 쉬지 않고 빅토르에게 칠레의 민요와 기타를 가르쳐 주었다.

장성하여 집을 떠난 빅토르 하라는 카페에서 노래를 하면서 서서히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첫 앨범을 낸 해인 1970년은 바로 아옌데가 선거를 통해 처음으로 사회주의 정권수립에 성공한 해였다. 그는 당시 칠레전역에 들끓는 정치적 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신변에 위협을 느끼면서도 활발하게 누에바 깐시온 운동을 벌이며 아옌데를 위한 선거유세에 참여하였다.

라틴아메리카의 정서를 담은 누에바 깐시온은 그 자체가 미국의 영향력과 보수기득권층이 좌우하는 칠레의 현실에서, 새로운 라틴아메리카의 정체성을 찾는 것을 의미했었다. 아무도 성공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아옌데의 집권이 성공한 후에도, 그는 칠레전역을 돌아다니며 라틴의 정체성을 일깨우고 곧 있을지 모를 쿠테타나 미국의 침략음모를 경고했다.

마침내 1973년 9월 11일 아옌데 대통령이 쿠테타군에 의해 모네다 궁에서 최후를 맞이 할 무렵. 그도 구테타 군에 의해 체포당한다. 우리나라에도 개봉된 적이 있는 영화 <산티아고에 내리는 비>에는, 구테타 군이 시민들을 마구 잡아가는 것을 보고 겁에 질린 사람들 사이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가 “단결하라. 단결하라.”라는 유명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의 그 장면처럼 그는 실제로 구테타 군의 폭력에 굴하지 않고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구테타 군에 끌려간 그는 수없이 많이 맞고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두 손의 손목이 부러진 채 주검이 되어 그의 아내에게 시신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그래서 시인의 음성은 들리게 되리라
죽음이 나를 앗아갈 때까지
죽음이 가는 길을 따라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빅토르 하라/민중의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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