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시대 '한글'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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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시대 '한글'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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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족 내부 언어체계 재정립 시급

 
   
  ▲ 연변의 한 상점 간판
조선어는 두음법칙을 적용하지 않는다. '려관' '녀성'처럼 한자의 원래 음을 그대로 쓴다.
 
 

역사적 맥락에서 보자면 우리 한글은 매우 불행한 과거를 가진 언어이다. 민족의 운명은 일제시대를 마감하고 숨 쉴 틈도 없이 다시 서구식 근대화로 접어들면서 그와 동행한 우리 한글은 일본어와 영어의 바다를 항해하는 한 쪽의 돛단배와 같은 험난한 여정을 헤쳐 나왔던 것이다.

그 뿐인가. 한국 5천만명과 북한 2천4백만명, 중국 조선족 2백만명 등을 비롯한 한글 사용자인 한민족은 북한 정권이라는 소통 장벽에 막혀 약 90년 간 양분 또는 3분된 상태에서 각기 다른 언어문화를 향유해 왔다.

사실 상 중국 개방 이전의 한글은 크게 볼 때 북위 38도를 경계로 두 언어집단을 형성해 온 것이지만 사투리의 문제를 제외하고도 작은 언어집단으로 묶어 보면 한국, 북한, 연변, 연변 외 중국의 4개 범주로 이루어져 있었다.

1990년대 초반 경 중국의 본격 개방 이후 한,중 간 왕래가 급증하고 한국의 전파매체와 드라마, 서적류 등의 각종 미디어가 중국에 상륙하면서 사정은 크게 달라졌다. 여전히 북한이 고립된 한글체계를 고집하는 반면 중국 조선족 사회에서는 부분적으로 한국식 한글의 영향에 노출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향이 약 20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는 현재의 관점에서 볼 때에도 - 역시 북한을 제외하고 - 한국과 조선족 사이에서 한글이 가지는 동질성의 문제에 대해 과연 무엇이 개선되었으며 무엇이 발전적 합일점인가를 묻는다면 양자가 모두 '별 일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과연 그 원인은 무엇인가? 혹자는 단절된 시간과 그 안에서 일어난 조선족에 대한 북한의 언어 전파영향이 현재의 이질성을 유발한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대한 문제는 사실 우리 내부에 있다. 외래어 문제는 차치하고 그 간 무수하게 뜯어 고치고 바로잡고 짜 맞춘 우리 맞춤법의 발전과정이 지금 와서 볼 때는 지나친 '성형수술'이 되고 말았다.

두음법칙 문제와 술어 표기법의 문제, 그리고 경음화 등 너무 많은 부분을 세련되게 만든 결과는 언어집단 전체 테두리에서 보자면 마치 서울 갔던 사촌이 돌아 온 것과도 같이 엄청난 '낯설음'을 준 셈이다.

그 맞춤법 개정의 과정과 결과에 대해 여기서 공과를 말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앞으로 우리 민족이 북방시대를 살아 나가는 데 있어서 언어 장벽으로 다가 온다면 이 문제는 새로 고민해 봐야 할 심각한 과제이다. 바로 지금 우리는 이제는 대안 모색을 더 미룰 수 없는 최후의 시점에 이르렀다.

나는 국어학을 배운 사람으로서 기본적으로 현재의 한글체계가 아주 세련되고 합리적이라는 판단에 대해 아무런 문제를 발견할 수 없다. 그 자체로서는 최선의 언어이자 현재 상태 역시 최고의 언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한 언어가 민족 내부에서 수용성과 실용성을 가지지 못한다면 그것이 아무리 우수한들 무엇에 쓰겠는가. 심지어 20억명 이상이 공유하는 중국어의 경우도 발음은 달라도 문자는 같고 세계 공용어인 영어의 경우도 그러한데 불과 8천만 명이 사용하는 언어가 문어적 소통 자체에 애로를 느낀다는 것은 결코 감수할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만약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동북 아시아의 자유 왕래 시대를 맞이한다면 우리가 애지중지 치열하게 가꾸어 온 한글에 대한 모든 진보적 노력은 허사가 아니라 족쇄로 변하고 말 것이다.

이 글의 논지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를 막기 위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렇다.

현재 한민족의 정통성을 계승한 국가인 대한민국은 한글에 관하여 종주권을 주장할 수 있는 대표적 언어집단이며 주변의 한글 수용집단에 대해서도 주권을 주장할 만한 충분한 노력을 다했다는 측면에서도 현대 한국어가 민족 공용어의 표준으로 정착해 나가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다.

문제는 그러기에 수많은 장애요인을 안고 있다는 데서 생긴다. 우선 우리 자신들 조차 현기증을 느낄 정도로 빠르게 변해 온 이 한국식 한글을 민족 공용어로 통용시키는 데 민족 내 다른 소집단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며 그 일부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점이다. 그 일부 책임이란, 필요 이상으로 개정해 온 한글 맞춤법에 있다. 조금 더 열린 관념으로 반성해 보자면 다른 언어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빈번하고 세밀하게 추진해 온 인위적인 문법체계의 개정을 구태여 필요로 했었던 건 아니었다.

언어가 가진 생명성의 관점에서 보자면 더 세련되고자 한 많은 노력이 변화한 시대환경 앞에서는 오히려 그 생명력과 활동 반경을 제한하는 결과를 가져 온 셈이 된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반성은 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세련된 한글을 민족 내부에 보급하기 위해 충분한 노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현재로선 아무런 대안이 없는 이 문제에 대한 비판은 이 쯤에서 접기로 하자.

이제 일본을 넘어 세계로 나아가자던 태평양의 시대가 저물고 북한을 지나 동북아시아의 중심인 만주를 지향해 새로운 국가의 운명을 펼쳐 나가야 할 이른 바 '북방시대'가 도래했다.

차제에 '쾌속 진화'와 함께 '한자교육 폐지'까지 감행해 온 우리 말의 폐단이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다. 어떤 특정 세대는 중국에서 간단한 간판글자도 읽지 못해 후배들로부터 놀림을 받기도 한다. 가끔 '인민페'라고 표기한 조선족들의 문서를 굳이 '인민폐'라고 고치려다 논쟁이 붙기도 한다. 모두가 중국 안에서 일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오늘은 긴장해서 안 됩니다"라거나 "살랑살랑 하십시오"라는 말을 들을 때면 유추하면서도 도무지 말의 속뜻이 무엇인지는 알기 어렵다. 아버지의 직업을 묻는 말에 "선생질을 하십니다"라고 대답하면 뜨끔할 뿐이다. 가만 반추해 본 즉 '-질'에서 우리는 '행위'라는 뜻의 보통명사에 대해 지나친 구박을 하면서 그 의미범주를 극도로 좁혀 놓은 건 아닐까?

그 정도의 문제는 어휘 확장능력이 뛰어난 이라면 충분히 적응할 수 있다. 그럼 이런 경우는 어떨까? 어떤 부탁을 하는 자리에서 조선족 손님이 "그거 됩니다."라고 답했다고 하자. 이 경우 성사 가능성이 반반이라고 생각할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결과는 '안 되는 쪽'으로 나오는 경우가 있다.

모호하지만 이렇게 설명하면 어떨까. 조선어에서 '됩니다.'라는 술어는 말 자체를 잘 뜯어 보면 그럴 법도 한데, 판단의 의미가 당연히 전제되지만 반드시 '안 된다.'의 반대말이라 보면 곤란하다. 거기엔 '되다'라는 술어에 내포된 바, 어떤 일의 진행상황에 대한 의미가 함축되어 개연성이 높다는 '추측'의 의미로 자주 쓰인다. 오랜 언어습관에 의한 의미의 차이까지 극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중국생활 2년이 되도록 나는 아직 조선어의 신층구조를 통달하지 못하고 기껏 몇몇 요주의 명사나 영어 어휘에 대해서만 연변어를 대입하는 수준이다. 나 뿐이겠는가? 이러한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 지에 대해 정부나 한글 관련 단체들의 대안을 기다려 보아도 아무런 기색이 없다. 과연 이런 문제를 고민하지 않고 있음인가, 아니면 무대책인가?

오히려 중국 내 조선족 미디어들에서 요즘 심심찮게 언어의 이질성 논란이 부쩍 자주 일고 있다. 며칠 전 조글로미디어에는 '두음법칙의 폐단'(2010.4.3)이라는 제하의 칼럼이 실렸고 심지어 동북아신문에는 한국에서도 중국 간체(簡體)를 교육해야 한다는 칼럼(2010.3.24)이 실리기도 했다. 이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고 그 외에도 한글을 둘러 싼 수많은 논란이 중국 안에서 집요하게 일어나고 있다.

물론 다 일장일단이 있는 주장이지만 그 주장의 효용성 여부 역시 여기서 논할 이유는 없다. 중요한 것은 조선족 역시 한글의 수용권에 대해 부분적인 주권을 주장할 명분을 가진 집단이라는 사실이다. 현재 중국 안에서 한글을 쓰는 조선족 집단에서 언어의 동질성 문제에 대해 큰 괴리감과 압박을 느끼고 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자신들의 언어 모(母)집단인 한국에서는 연변어나 북한말을 사투리 정도로 인식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영어와 생뚱(?)맞은 표기법을 쓴다는 사실에 그들은 모종의 괴리감과 불만을 품고 있음이다. 문제는 불만에서 끝나지 않는다. 많은 한국 사업가들은 조선족들과의 소통의 문제와 표기나 어휘에 대한 오해, 정서적 갈등을 경험하고 있으며 그로 인한 사업 상 손실을 감수하고 있다.

그 중 가장 심각한 문제를 유발하는 차이가 바로 현대 한국어와 조선어 사이에 존재하는 의미 변별력이다. 조선어는 소통을 중시하여 하나의 단어에 여러 가지 의미를 그 때마다 상황에 적응하여 통일적으로 쓰는 반면 한국어에서는 상황 뿐아니라 대인관계에 따라 차별적 언어를 사용할 정도로 뉘앙스까지 고려하여 고도의 변별력을 가진다. 역시 어느 것이 좋으냐의 문제는 지양하자.

두 집단 사이의 언어적 이질성 문제를 냉정하게 뜯어 보면 어느 그룹의 언어가 더 세련되었는가의 문제보다는 어느 편의 언어체계가 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가의 문제에서 당연히 한국 내의 한글이 우세함에는 분명하다. 조선족들의 일명 '연변어'는 그 집단의 규모가 큰 반면에 연변자치주 내 일부 주민을 제외하고는 중국어를 기층 언어로 사용하면서 보조 소통수단으로 쓰여 와 사실 상은 방언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오로지 민족의식 하나로 지켜나온 고립 언어라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언어체계의 진화 면에서 현대 한국어와 격차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앞선 체계의 집단이 다른 집단에게 '나를 따라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언어이다. 연변어도 나름대로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에게 더 정교한 생명력을 요구할 수는 없다. 마치 집돼지가 멧돼지를 보고 내 우리 안에 들어 와 살면 배고픈 일 없을 거라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현대 한국어와 조선어의 차이는 서울말과 제주 방언이 가지는 차이와는 그 의미하는 바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것은 어휘의 문제가 아니라 언어규칙과 체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마치 갈라파고스 군도에서 보여 준 진화현상처럼 다른 생태환경 속에서 조금씩 다르게 진화한 일종의 변이 생명체와 같은 것이다.

언어가 그처럼 생명을 지닌 실체일 진대 그 역사성과 현실성을 무시한다면 결코 동질성 회복의 길은 기대하기조차 요원할 것이다. 만약 한류 바람이 일기 전이나 약 10년 전 쯤에 그러한 노력을 시작했더라면 한글의 동질성 회복은 지금보다는 쉬웠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북방을 눈여겨 보면 그 때와는 격세지감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한글 매체의 발달로 인해 조선어도 그 내부적으로 현저히 표준화하여 있고 경제수준에 비례하여 문화적 자존의식이 엄청난 수준으로 높아져 있다. 주변의 조선족 교포들을 붙잡고 정말 마음을 열어 놓고 한 번 물어 보라. 그들에게 한국이란 '동아시아 변방에 붙은 작은 동족의 나라'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 이것은 하나도 과장된 이야기가 아니다.

이제 북한이 경제개방의 길에 들어섰다. 두만강 하구 나선자유무역지구와 압록강 하구의 황금도와 위화도 지구를 자유무역지구로 지정한 후 중국에 임대하였다. 양쪽 지점을 개방하고 서서히 평양과 원산 쪽까지 전면 개방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북한의 개방은 우리의 한글에게 또 어떤 영향을 미칠 변수인가?

멀지 않은 미래에 개방된 북한을 경유하여 한민족은 중,북,한 3국을 하나의 축으로 자유로운 왕래를 하게 될 것이다. 우리 정부 역시 공연히 개성까지 철로를 연결한 것이 아니다. 이미 중국은 한반도와 유라시아 철도를 연결하는 접점인 단동, 만주리, 수분하 등의 도시를 전략적으로 개발하고 있다.

온난화로 한반도 남부의 기온이 점점 뜨거워지면 여름 휴가철을 맞아 부산 시민들은 부산역 스넥에서 이른 아침식사로 토스트를 먹고 고속열차 차창으로 평양 시내 풍경을 감상하면서 식당 칸에서 김밥을 먹고 저녁식사는 내몽고 통료역 앞 식당에서 양고기 샤브샤브를 먹으면서 다음 날부터 즐기게 될 30만원 짜리 초원의 바캉스 패키지 상품에 대한 가이드의 설명을 듣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일이 결코 먼 미래에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 당장 내일이라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제 가로막히고 흩어져 있던 한글 수용집단들이 전면적인 접촉을 시작하는 새로운 시대가 온다는 의미다. 지금으로서는 그 바캉스가 결코 즐겁게 끝나기 어렵다. 마지막 날 가이드와 대판 싸우지 않는다면 속이 끓어 아침식사를 못 할 수 있다.

북한과 중국 조선족 사회는 언어 수용집단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매우 고립적이면서 동시에 아주 강한 자존심을 지닌 특별한 집단이다. 북한이야 말할 나위도 없고 조선족만 하더라도 아직까지 흔들림 없이 중국의 고유명사까지도 한글식 발음체계를 고수하고 있다. 이를테면 우리가 국제적인 표기규칙에 따라 이미 '원자바오(溫家寶)'라는 원어 발음을 표준으로 채택한 데 반해 오히려 자국의 총리를 일컫는 그들의 표준 어휘는 '온가보'이다. 한글의 독립성을 위해 우리처럼 한자를 괄호 안에 첨가하지도 않는다.

앞으로 우리가 한글의 운명을 온전한 상태로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는 이를테면 '홍보'나 '세미나'와 같이 상투적인 몇 가지 방법에 의존하여 노력한다고 가능한 일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언어의 문제는 곧 문화의 문제이자 사고와 이념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정신문화적 동질성 회복이 시급한 과제이지만 개방 후 중국 조선족들이 모국인 한국에 대해 품어 온 정서적 성향을 감안한다면 거리를 논할 계제가 아니라 '원한'을 걱정할 단계에까지 와 있다. 이 문제는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에 대해 그렇다는 의미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게 바로 지금의 현실이라는 점이다.

결론은 언어, 문화,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한글'의 운명을 새롭게 바꿀 수 있는 상위 패러다임이 나오지 않는다면 같은 민족 내 소통의 혈액인 한글의 운명은 그저 토막 난 채 꿈틀거리는 지렁이와 다를 게 없다.

한글의 앞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민족 전체의 운명을 위해서, 그것보다도 당장 현실 앞에 놓인 문제를 보아서 오랜 단절로 인한 낯설음과 잘못된 교류와 인식으로 인한 정서적 갈등을 풀려면 민족 내부의 입체적인 소통이 절실하고 시급하게 필요하다.

이것은 몇몇 전문적 집단이 나설 문제가 아니다. 그 여러 주체들을 연합한 새로운 통합 주체가 필요한 현실이다. 이를 테면 정부 주도의 연합체 구성을 통해 각 분과가 토의하여 목표사업을 정하고 예산을 책정하여 하위 사업조직을 통해 다방면으로 전개해 나가야 할 범 민족적 프로젝트이다.

북방시대. 흔히 사람들은 북방이란 말만 들어도 고구려나 고조선을 생각하고 만주에 대한 영토문제를 들먹인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공허할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앞으로 영토를 매개로 한 분쟁은 일어나기 어려우며 이른바 '기억의 전쟁'이 계속된다고는 하나 그 역시 공허할 뿐이라는 것이 개인적 생각이다. 경제의 문제와 함께 인류에게 남겨진 최후의 이데올로기의 주제는 바로 국가와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실체인 '민족'이다.

한민족이 안고 있는 내부 그룹들의 복잡한 정서적 문제는 새로운 미래의 목전에서 전혀 새로운 새로운 인식의 틀을 요구하고 있다. 국적이 다르고 지향점이 다르다는 문제 때문에 갈등하고 반목하는 시대는 지나가고 서로의 다른 점을 인식하고 인정하면서 부분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문화와 정서에 대해서는 강한 동질성을 회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늘 단일 민족의 소중함을 말하는 우리 스스로가 단일 민족 내부에서 지역과 국적, 그리고 계층을 놓고 소통하지 못해 갈등하면서 과연 소통의 기초가 되는 언어를 통일할 수 있을까?

민족 대통합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한글은 바로 정신의 '피'와 같은 존재이며 그 상위개념이 바로 '뇌'와같은 문화이다. 우선 피를 소통하면서 서로 다른 환경에서 때로는 결합하고 때로는 경쟁하며 때로는 갈등하는, 그런 시대가 우리 앞에 열리고 있다.

많은 미래학자와 국제 전문가가 주장하는 바, 다가오는 북방 중심의 글로벌 시대는 바로 민족이 기초 그룹을 형성하는 그런 경제공동체 시대가 될 것이다. 중국 정부도 이미 그러한 관점에서 56개 소수민족들의 문화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시작했다.

중국 내부로 보면 수많은 소수민족들이 모두 제각기 경제공동체의 주체적 일원이듯이 우리의 관점에서도 역시 북한 주민과 조선족, 그리고 고려인, 더 넓게는 노마드의 범주가 미래 경제공동체에서는 우리의 형제요, 친구이다.

최근 알타이어나 만주어, 그리고 선비족의 일파인 시버족(錫伯族)의 시버어에 대해서까지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는 점에 대해 매우 고무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바로 한글의 내부적 문제이다. 먼저 냉정한 잣대 위에서 민족 내 각 그룹들의 언어수용 현실을 다시 진단하고 분석하고 합리적인 대안을 준비하여 열린 관념으로 만나 토론하고 각 그룹들의 합의를 도출하는 것이 휴대폰 하나 더 파는 것보다 시급하고 6자 회담에서 머리를 싸매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한글 역사에서 획기적이고 참 잘 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만, 남태평양 섬나라의 문자없는 어느 소수민족을 '어엿비' 여겨 음차 보조도구로서의 한글을 수출한 소식에 기뻐할 현실이 아니다. 동족이 동족의 문자로 쓰여진 글을 읽고 "저것은 아마도 이런 뜻이겠지?"라며 고개를 갸우뚱 거려야 하는 우리 자신에 대해 깊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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