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의 시다바리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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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의 시다바리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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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통상 오후 다섯시를 전후로 퇴근합니다. 그래서 귀가하면 집안청소는 물론이요, 밥도 짓고 어지간한 반찬도 만듭니다. 빨래야 세탁기가 알아서 해 주니까 굳이 '한다고' 까지는 못 하겠네요.

여름방학 중에는 고교생 딸내미랑 저녁을 먹었는데 2학기 개학을 하고 보니 다시금 딸은 밤 열 시가 되어야만 귀가를 합니다. 아들마저 입대를 하고 보니 그래서 요즘엔 혼자서 저녁밥을 먹어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데 하지만 영 먹기가 싫어집니다.

그래서 비록 꽁보리밥을 먹을지언정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먹어야만 그게 진정한 꿀맛이자 살로 가는 보약이라고 했나 봅니다. 지난 여름방학 기간의 일입니다.

귀가를 하니 딸이 책을 펼쳐 놓고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공부를 그리도 열심히 하니?" 물었더니 학교 숙제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방에 들어가 저녁상을 차려 딸을 불렀지요. "저녁 먹자~" 저녁을 먹고 나서 딸에게 설거지를 하라고 시켰는데 하지만 이 녀석이 하는 말이 절 조금은 당혹스럽게 했습니다.

"오늘도 설거지는 아빠가 하세요..." 그래서 전 예전에 관람했던 방화 <친구>에서 줏어 들은 유행어로 즉각 반격을 가했지요. "뭐라꼬? 날보고 지금 설거지를 하라, 이 말이가? 아니? 내가 니 '시다바리'가?"

저는 딸에게 그처럼 강력한 어필을 했습니다만 제 딸내미에게 있어 저의 그 항변은 마이동풍일 뿐이었습니다. 딸은 얼굴도 들지 않은 채 책에 고개를 파묻고는 "개학이 며칠 안 남아서 열심히 공부하는 딸에게 설거지를 시킨다는 건 '실정법 위반'이라구요, 그러니 오늘도 아빠가 설거지를 하시라는 겁니다, 개학하면 그 땐 제가 설거지를 할게요. 아셨죠?"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공부만 잘 하면 뭘 해, 모름지기 여자라면 살림도 잘 해야지..." 라고 쏘아 부쳤지만 딸 역시도 만만치는 않았습니다. "매일 설거지 하다가 제 성적이라도 떨어지면 그땐 또 야단 치시려구요?"

설거지를 못 하겠다는 딸의 이유 있는 명분에 밀려 저는 하는 수 없이 궁시렁거리면서 또 손수 설거지를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마지못해 설거지를 하면서도 '나이 사십이 넘은 놈이 이처럼 설거지나 하는 꼬락서니라니...!' 라는 생각에 문득 제 자신에 대한 어떤 연민의 서글픔이 새록새록 솟아오르더군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상황에 맞춰서 살아야하는 것이 인생인 것을 요.

아무튼 불효막심(?)하기 짝이 없는 딸아이는 요즘도 설거지를 안 합니다. 그건 밤 열 시가 넘어야만 파김치가 돼서 귀가를 하기 때문에서죠. 그 시간까지 밥을 안 먹고 굶었다가는 제가 당장에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인지라 그 시간이면 저는 이미 벌써 한 술 뜨고 아예 설거지까지 마친 상태이니까 말입니다.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제 아빠를 그처럼 장기판의 졸(卒) 내지는 화투판의 흑사리 껍데기정도로 치부하는 딸이지만 저는 그래도 제 딸이 예쁘기만 합니다. 이담에 더 자라서 대학생이 되고 주부가 되면 원 없이 하게 될 것이 바로 설거지인바, 그래서 지금은 굳이 아빠이자 어른인 제가 하려고 합니다.

오늘도 밤 열 시가 도래하면 딸아이 마중을 나가야 합니다. 어두운 골목길을 딸아이 혼자서 귀가하게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서입니다. 어서 세월이 극구광음처럼 흘러서 딸이 맛난 반찬도 만들어서 이 아빠에게 주고 설거지도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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