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유선희 선생 단편소설집 '이층 왼쪽 방 남자' 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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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유선희 선생 단편소설집 '이층 왼쪽 방 남자' 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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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일상 속에 묻어나는 고소하고 달콤한 이야기

^^^▲ 작가 유선희^^^
인생과 사랑에 대한 깨달음을 담은 작품.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인 작가 유선희 선생이 단편소설집 “이층 왼쪽 방 남자”를 펴냈다. 이 작품집에는 표제작 “이층 왼쪽 방 남자”를 비롯해서 <유실된 금요일> <김치와 프라이드><인자 씨의 아파트> 등 열편의 주옥 같은 단편이 실려 있다.

문학평론가 오양호 박사의 해설에 의하면, 유선희의 소설들은 하나같이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여러 가지 인정세태를 문제 삼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세태소설의 유형에 속한다. 세태라는 말을 소설적으로 파악되는 사회적 현실을 지칭하는 집합적인 개념으로 이해할 때, 세태소설의 문제는 바로 소설사회학에서 가장 중요한 연구 과제로 삼는 ‘소설과 사회’ 라는 문제와 연결된다.

소설사회학은 소설을 역사철학적인, 또는 발생론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방법과 소설을 반영론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두 개의 큰 길이 있다.

「이층 왼쪽 방 남자」는 생활비에 쪼들리는 주부가 2층 방 하나를 친구 동생에게 4개월 동안 빌려줬다가 2백만 원의 돈을 받는다. 주인공 ‘나’는 아직 자기 손으로 단 돈 백 원을 벌어 본 적이 없는데, 방 하나를 내주고 한 달에 50만 원을 벌자 갑자기 눈앞이 확 트여오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남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입대하고 비어 있는 2층 방을 벼룩시장에 광고를 내어 세를 놓는다. 얌전하고 착한 독신 남자가 들어왔다. 그러나 며칠 후부터 의외의 사건들이 일어난다. 이 독신 남자가 침대, 소형 냉장고, 16인치 텔레비전, 세탁기, 옷 서랍장, 전기다리미, 전기담요, 전자렌지 등을, 그것도 재활용품 센터에서 사들이는 것이다.

밤이면 뭔가를 사가지고 온 물건의 포장지를 뜯는 소리가 연일 계속되어 ‘나’의 속을 뒤집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세든 남자가 드디어 한 여자를 밤중에 데려온다. 이튿날 ‘나’ 는 2층으로 올라갔다가 그 여자가 노파인 것을 발견하고 더욱 놀란다. 세든 남자가 누나 집에 살던 어머니를 누나 내외가 외국여행을 다녀오는 동안 잠깐 데려온 것이라고 했다.

그 며칠 후 세든 남자는 중국 출장을 간다며 돈이든 서류뭉치를 ‘나’ 에게 맡기고 떠났다. 그러나 그 남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날이 가고 달이 가도 돌아오지 않는다. 늙은 어머니를 버리고 달아난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자 ‘나’는 방 세놓은 것을 후회하며 포기하게 되고, 결국 노파를 꼼짝 못하고 ‘나’ 가 떠 안고 함께 살게 된다.

단편에 서사가 길고 많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필연성을 띄고 있어 긴장감도 있고 그 긴장감이 극적 전환의 분위기도 만든다. 노모를 버리는 것은 패륜 중의 패륜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비인간적 행위를 인간적인 것으로 사건을 전환시킨다. ‘아하, 복에 없는 돈을 탐하면 이럴 수도 있구나’ 하는 반성과 함께 인륜의 어떤 도리를 깨닫게 한다. 아들은 세든 집에 어머니를 버렸으나 세를 놓았던 집은 노파를 길거리로 내쫓지 못한다. 잔일이며 집안 청소를 아직 할 수 있는 노파를 한 식구로 받아들여 살아가는 인간적 결말이 그러하다.

이러한 서사 속에는 이 사회가 타락해 있고, 속악한 것들로 차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나’ 는 그렇지 않다. 인간의 진정성을 버리지 못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골드만(L. Goldmann)이 말한 바로 그 인간상, 곧 ‘소설의 주인공은 타락한 사회에서 진정한 가치관을 추구하는 인물이다’를 실현하는 인간이 다름 아닌 주인공 화자 ‘나’다.

어머니를 버린 남자는 이 시대의 타락한 인간상과 상등관계를 형성한다. 루카치(G. Lukacs)가 소설의 역사 철학적 위치를 ‘신에 의해 버림받은 세계의 서사시’라고 보면서 인간이 누렸던 삶과 세계의 총체성 상실로 규정한 바로 그 세계 속의 인물이다. 노모를 남의 집에 놓고 달아난 아들의 행위는 신에게 버림받아 마땅할 존재다. 그러나 이 소설에는 이런 ‘이층 왼쪽 방 남자’와 대립하는 ‘나’ 가 있다. 이 타락하지 않은 여자가 인간적인 세계를 형성한다. 타락한 방법으로 추구되는 진정한 가치가 주인공 화자 ‘나’에 의해 구현되고 있는 까닭이다.

타락한 방법으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려는 다른 하나의 작품이 또 있다. 「인자 씨의 아파트」다. 이 소설의 주인공 인자는 17살에 모직공장에 공녀로 취직하여 30년을 근무하고 권고사직을 당하기까지 동생들을 먹여 살리고 가르치느라 옆도 뒤도 돌아볼 새가 없었다. 한 세대 전 우리가 가난을 뚫고 나오려고 발버둥치던 그 시절을 대표하는 인간상이다. 아무도 인자에게 시집을 가야 한다고 말해주지 않았고, 딱히 혼자 살겠다고 결심한 바도 없지만 어느새 그는 마흔일곱이 되었다. 사정이 이렇지만 또 아내에게 무능력자로 찍힌 남동생과 네 번째 남자를 만난 동생 인희를 자신의 19평 아파트에 불러들여 동기간의 가정을 꾸린다.

이 소설에도 두 인간상이 맞서 있다. 돈을 가운데 둔 인규(인자가 키우고 공부시킨 남동생)의 아내와 인자의 삶이 그것이다. 인규의 아내는 치킨 점을 하면서 남편 인규가 일을 감당하지 못하자 온갖 못된 짓을 하고 구박한다. 그러자 인자는 그러한 올케에게 남편에 대한 아내의 도리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충고한다. 그러나 올케의 행동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동생을 자기 집으로 불러들인다.
이러한 서사는 이 시대의 붕괴되어가는 가정과 부부의 인륜과 돈으로 인해 파괴되는 인간성과 그 모든 것이 경제논리에 의해 결정되는 인정세태에 대한 비판에 다름 아니다. 작가 유선희는 이렇게 타락하지 않는 인간상 창조를 통해 인륜의 의미를 깨우치게 하는 교시적 서사로 주제를 굴절시키고 있다. 이런 서사는 종래의 한국소설이 문제 삼았던 사회 문제가 인정세태를 겨냥한 다른 형태의 현실 반영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주목에 값한다.

평화를 빕니다는 50대 부부가 맞바람을 피우면서 아무렇지 않은 가정을 꾸미고 살아가는 이야기이고, 「파죽지세의 난」은 한 지방의 여고 동창들이 서울로 진출, 자리를 잡자 계를 만들어 자매들처럼 지내다가 50대가 되면서 산산이 쪼개져 버리는 이야기다. 50대 여자들의 행태가 너무나 적나라하여 어안이 벙벙해진다. 애정이 거덜 나는 실상을 한 번 보자.

1) 예술의 전당 앞에는 이제 막 공연이 끝났는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출구 쪽에서 뭉게뭉게 빠져 나왔다. 그녀는 그 많은 인파 속에서 언뜻 낯익은 사람을 보았는데 남편이었다. 남편이 어떤 여인과 많은 사람들 속에 서 있는 거였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가로수 나무둥치 뒤로 몸을 모로 세웠다. 남편은 출장 중이었으며 내일 귀국할 것이라고 바로 오늘 아침에 전화하였었다.

2) 그런데 남편이 다른 여자와 함께 웃는 것을 보고도 불같은 투기가 일어나지 않는 이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녀는 알 수가 없다. 큰일 났다는 생각보다 어쩌면 30년 가까이 함께 살아온 부부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그저 일어났을 뿐이라는 생각마저 드는 거였다. 그것은 그녀가 인생을 잘못 살아서 생긴 게 아니라 그녀가 어떻게 살든 일어나고야 말 일인 것만 같았다.

3) 가을 밤 달이 밝다. 두 사람은 어느새 손을 잡고 걷는다.

가끔 달 보니?
응 봐.
그녀는 달 보면 내 생각이 나지 않더냐고 묻지 않는다. 그건 너무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그랬으니까.
자주 봤어.
휘도 네 생각 많이 했어. 라는 말 대신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말해도 그녀는 네 생각 때문에 미칠 뻔했어 라고 알아듣는다.

4) 일상은 아무 일 없이 이어졌다. 이것이 사는 것이기에, 남편은 출장에서 돌아왔고 그녀는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다. 그녀는 남편을 위해 여는 해와 다름없이 홍삼을 만들려고 올해는 스무 채의 수삼을 사들이고, 그녀의 남편은 마누라에게 줄 고가의 핸드백을 사서 출장에서 귀가하였다.

5) 그 여자는 그 여자의 남편이 할 수 있는 ‘큰일’에 대하여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 본다. 남편은 나와 노인과 아이들을 팽개치고 그 여인에게로 갈까? 그 여인에게 돈 을 다 밀어 넣고 살림을 거덜 낼까? 아니면 그 여인을 작은 마누라로 맞아 두 집 살림을 하겠다고 공식으로 선언을 할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그 여자의 남편은 그럴 위인이 못된다고 그 여자는 결론지었다. 그럴 인간이 아니라는 근거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냥 30년 함께 살아 온 세월이 그 굳건한 근거였다. 그러면 된 것 아닌가.

유선희의 소설에는 병 모티프가 많다. 「낮잠」, 「아무 일도 없는 행복」, 「유실된 금요일」, 「내일」 등인데, 「낮잠」은 암, 「아무 일도 없는 행복」은 뇌종양, 「유실된 금요일」은 간질, 「내일」은 심장경색증이다. 이런 소설에는 인간을 못살게 만드는 것이 이 험한 세상사만이 아니라 병마가 그에 못지않게 인간을 속악하게 만들고 있는 매개로서 기능을 한다. 인간이란 존재가 병마를 도저히 피해갈 수 없음을 그로테스크한 기법으로 문제 삼고 있다.

「낮잠」의 주인공 어미는 행복한 여자였다. 놀 것 다 놀고, 할 것 다하고, 쏘다닐 데 다 쏘다니며 살았지만 자식들은 말썽 없이 커서 대학에 척 들어가는, 시셋말로 ‘3대 재수 없는 여자’였다. 그런데 이런 어미가 큰형부가 갑자기 죽고, 다섯 명의 숙부 중 마지막 한 명이 세상을 떠나고, 남편과 둘째 형부가 구조조정으로 실직하더니, 결국 남편이 암에 걸리게 된다.

이제 어미는 남편의 병 수발에 정신이 없다. 강화 바닷바람에 말린 쑥을 구해다 베란다에 널어두고 하루종일 비벼 밤톨 만하게 남은 섬유질에 불을 댕겨 남편의 단전을 데운다. 그러나 남편의 암세포는 악착 같이 그의 몸을 갉아먹으며 파고든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동안에도 아비의 병세는 위력을 떨치며 입안에서 바둑알을 넓혀 갔다. 턱밑이 아니라 목 아래까지 바둑알이 점거한 곳마다 벌겋게 피부가 변했다. 흡사 알 수 없는 벌레 군단이 그 속에 있어 심장을 목표로 차츰 차츰 먹어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 벌레들이 심장이나 폐를 공격하기 시작하면 치료는 불가능해 진다고 의사들이 걱정하였다. 어미는 벌레들의 진군을 늦추려 목 언저리를 얼려버릴 기세로 꼬박 밤을 새워 얼음찜질을 하였다. 하지만 그것들은 끄떡하지 않는다. 이제 아비의 입안은 바둑알로 가득 찼다. 혀도 굳었고, 목구멍도 완전히 막혀버렸다. 조금 열린 입으로 삼키지 못한 침이 쉴 새 없이 흘러 나왔다. 어미는 탈지면으로 그것들을 닦아냈다. 입 안에선 벌레들과 목숨을 걸고 대적하여 시체가 된 백혈구들의 부패한 냄새가 났다.

인간 실존 문제는 오직 병이 좌지우지한다. 이 병으로 인간은 선해지고, 악해지고, 너그러워지고, 행복하거나 불행하게 된다. 인간의 타락 원인이 전적으로 타락한 현실, 타락한 사회 때문만이 아니라 이런 병, 극악한 병마와의 연결 고리 속에 형성된다고 보고 있다. 암의 원인은 스트레스이고, 스트레스는 타락한 사회의 구조 때문이다. 어미는 이런 불행의 고리를 의식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의 악착같은 암과의 투쟁은 결과적으로 이런 요인과 싸우는 행위다.

위 인용문에 나타나는 암 세포는 징그럽고 지독한 암 그 자체라기보다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악의 한 상징이다. 입과 목을 바둑알처럼 점령해 오는 암 세포, 병균의 섬뜩한 실상을 이렇게 그로테스크한 기법으로 시각화 하는 소설을 나는 아직 대하지 못 하였다. 디테일한 묘사가 온 몸에 소름이 돋게 한다. 주인공은 이런 현실, 그러니까 남편의 병수발과 딸의 막무가내식 영국 유학, 미친 테러리스트의 쌍둥이 빌딩 공격, 그런 잔인한 죽음의 현장에 내동댕이쳐진 인간의 비참한 실존을 문제 삼는다. 인간 운명이 이런 엄혹한 현실과 손을 잡고 있고, 그것들이 인간을 독하게 만들고, 타락시킨다는 19세기의 저 자연주의적 폭로성을 연상시키는 인간의 실상조응이다. 선과 악 두 모티프의 상호 침윤과 형상화가 다소 미흡하지만 작품의 결과는 이렇게 읽힌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한 예, 곧 어두운 인간현실을 겁나게 드러낸 보기 드문 소설이 된다.

병 모티프가 이렇게 악착스럽게 인간 생명을 공격하지만 유선희의 소설 결말은 대부분이 해피엔딩이다. 이것에 대한 개연성(Probability)을 따진다면 구성상의 약점 지적밖에 안 된다. 그러나 작가가 인간에게 보내는 긍정적 작가 의식이라는 서사문학의 본질 면에서 볼 때 우리는 이런 해피엔딩에 후한 점수를 주지 않을 수 없다. 「낮잠」의 결말은 목을 조르며 타고 오르던 암 세포가 사라지고 어미와 남편이 이제는 산행을 즐긴다.

어두컴컴하여 형체만 보였지만 틀림없는 아비다. 어미는 우산을 들고 오르막길을 백 미터 달리기로 뛰었다. 난데없이 산 속에 나타난 마누라를 본 아비가 흡사 귀신을 만나듯 기이해 하다가 이산가족 상봉하듯이 두 팔을 벌려 반긴다.

“뭐하러 와? 내려갈 텐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얼굴은 좋다는 표정이 넘쳐난다.
“어이구, 감기 들어 봐! 누굴 또 못살게 하려구! 뭐 자기가 이뻐서 데리러 온 줄 알아?”
“허허허! 됐네, 이 사람아! 어이구, 좋다! 빗소리도 좋고, 발자국 소리도 좋고, 님도 좋고……”
“흐이구, 웬수! 좋기는!”
아비가 우산을 받아들고 커다란 박쥐우산 속에서 아비와 어미는 티격태격 하며 산을 내려왔다.

암이 이렇게 나을 수는 없다. 이런 점에서 이 소설은 확실히 개연성에 문제가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이 마침내 인간에게 희망을 예보한다는 결말에 대해서는 누구도 개연성 운운하지 않을 것이다. 「내일」, 「아무 일도 없는 행복」 역시 그러하다. 이 두 소설은 제목에서부터 희망을 예보한다.

「내일」의 주인공 나는 심장경색증을 앓는 환자다. 나는 15년의 미국생활을 이혼으로 청산하고 서울에 돌아와 주어온 개 한 마리와 산다. 나는 심장경색증이 일어날 때마다 가슴을 움켜쥐고, ‘손님... 한 번만 봐 주십시오. 아무래도 아직은 안 되겠어요. 저는 아직 최선을 다해 살아 본 기억이 없습니다’라며 불청객 병에게 사정한다. 그 덕택인지 그는 아직 살아있다. 그뿐 아니다. 주인공은 어린 시절 안국동에 살 때 사귀었던 순이를 다시 만나 행복한 인생 설계를 세우려 한다.

「아무 일도 없는 행복」 역시 해피엔딩의 예보다. 주인공 화자 어미의 남편 아비는 이제 세 번째 입원 중이다. 병세가 뇌종양 같다는 게 주치의의 진단이다. 그래서 딸이 울고 불며 낙담을 하자 어미는 ‘그건 아빠의 운명이니까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재진을 한 결과 뇌종양이 아닌 것이 판명되고 아비는 퇴원, 그의 잔소리가 또 시작되는 ‘아무 일도 없는 행복’한 날이 다시 이 가정에 찾아온다.

이런 단선적 스토리의 전개는 독자가 소설을 읽는 재미를 저해할지 모른다. 그렇다. 인과성이 결여된 서사 중심의 사건 전개는 확실히 전근대적인 소설 문법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세상은 점쟁이까지도 죽어가는 목숨을 담보로 돈을 갈취하려든다. 그래서 이 작가는 이런 인간세상을 까발리고, 비판하면서 어떤 교시(敎示)적 상황으로 주제를 유도한다.

이마 왼쪽에 크고 깊은 흉터가 있어 그것 대문에 썩 점쟁이다운 인상을 주는 여자 앞에 앉는다. 여자가 아비의 생년월일을 묻고 어미는 대답하였다. (중략) 여자는 모든 기운이 상충하여 충돌하기 때문에 상당히 위험하다고도 하였다. 그 중에 올해가 더 고비라고 했다. 아, 결국 아비는 뇌종양으로 죽으려나보다. 어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터에 여자가 놀라운 말을 하였다. 아비의 나쁜 기운을 돌이킬 수 있다는 거였다. 원래는 천만 원 정도를 들여 굿을 하면 좋겠지만 여의치 않으면 백만 원 정도의 부적으로도 상충되는 기운을 가라앉히고 좋은 운으로 바꾸어 놓을 수가 잇다는 거였다. 어미는 싱긋 웃었다.

이런 실상을 리얼리즘의 그 준엄한 원칙대로 스토리를 전개한다면 어떻게 될까. 절망의 서사 또는 죽음의 묵시록 밖에 더 되겠는가. 위안으로서의 문학, 위안으로서의 소설은 고소설, 신소설, 이광수의 소설을 거쳐 현재의 연속극에까지 뻗혀 있지 않은가. 타락한 사회가 인간을 병들게 하고, 병이 인간을 잡아먹고, 점쟁이까지 병을 미끼로 인간을 농락하는데 어찌 문학이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연속극과 소설이 물론 다른 예술장르이긴 하지만 그 본질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소설의 결말이 이렇게 해피엔딩이 되고, 무언가를 가르치려는 것은 플라톤 이래 모든 예술이 지향하던 한 원리를 수행하는 중요한 일이 아닐까. 이런 점에서 이 소설은 우리의 관심에 값한다.

작가 유선희 선생은 1990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당선 문단에 데뷔했고, 1997년 소설집 『미친 대추나무의 노래』와 2002년 『시간의 덫』 발간했으며 현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한국문인협회와 세계펜클럽 회원이기도 하다.

^^^▲ 책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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