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하여 밥통을 열어보니 밥이 별로 남아있지 않아서 저녁상을 차리는데 다소 고민이 되었지만 그 고민은 이내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딸아이가 요즘의 신세대답게 라면을 무척이나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딸에게 "라면 좀 두 개만 끓여라"랬으나 녀석은 콧방귀만 뻥뻥 뀌는 것이었다.
"라면이야 아빠가 더 잘 끓이시니까 아빠가 끓이세요~" 순간 '녀석이 또 이 아빠를 부려먹는구나'라는 생각에 다소 괘씸한 생각도 없진 않았으나 '그래도 이 아빠의 음식 솜씨는 알아주는구나'라는 생각으로 이내 맘을 고쳐먹었다.
주방에 들어가 고춧가루와 양파와 소시지도 듬뿍 넣어 얼큰한 라면을 끓였는데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워서였을까. 녀석이 젓가락을 들고는 냉큼 달려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끓인 라면을 두 그릇으로 나누어 라면을 우선 건져먹고도 모자라서 국물에 찬밥을 말아서 먹었다.
그런데 가만 보아하니 딸아이는 라면만 먹으려 할 뿐 김치에는 손도 대지 않으려는 듯했다. 그래서 나는 또 예의 김치자랑을 입에 올리며 지청구를 했다.
"너, 앞으로 라면 먹을 때 김치를 안 먹을 거면 이제부턴 라면 먹지 마. 이 김치가 그 얼마나 자랑스런 한국의 자랑인줄 모르니?" 우리의 김치는 얼마 전 중국의 사스(sars)공포의 퇴치의 주역이었음은 물론이요, 이제는 일본의 식탁까지도 점령했다고 한다.
그러한 원인은 라면의 원조국인 일본인들답게 라면과 가장 잘 어울리는 '환상의 파트너'는 바로 우리민족의 우수한 '김치'임을 뒤늦게 자각해서였을 게다. 우리나라 국민 거개가 늘상 배를 곯던, 이른바 보릿고개 시절에 우리나라에서도 출시되기 시작하여 센세이션을 일으킨 라면은 초기의 간식개념에서 이제는 당당히 주식개념으로 변모한 지도 꽤 오랜 세월이 흘렀다.
요즘의 청소년들이야 워낙에 지천에 먹거리 문화가 발달하다보니 우리 같은 구세대들의 춘궁기(春窮期)적 고통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작금 라면은 세대를 초월하여 가장 사랑 받는 식품군 중의 하나일 것이다.
특히나 어제처럼 비가 부실부실 내리는 날의 뜨거운 라면은 더욱 백미인데 라면의 가장 환상적인 파트너는 뭐니뭐니해도 역시 우리전통의 김치임은 불문가지일 것이다. 나의 강권에 밀려 딸도 라면을 김치와 함께 먹고 난 뒤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직장에서 늦은 퇴근을 한 아내가 들어서고 있었다.
"저녁은 먹었어?" 아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무언가를 더 먹었음 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마침 신김치가 있는데 이걸로 김치전 좀 부쳐줄까?"랬더니 대환영이라고 했다.
김치전을 맛나게 부친 다음에 딸도 다시 불렀지만 맛있다며 먹어주는 아내와는 달리 딸은 다시금 불평불만을 토로하는 것이 아닌가. "에게~ 나는 피자가 더 좋은데..."그러자 이번엔 아내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먹기 싫음 말어! 기름기가 많아서 느끼한 서양식 피자보다는 '코리안 피자'인 이 김치전이 백 배는 더 맛있는 것을...!" 그러자 움찔해 하며 코가 납작해지는 딸의 기(氣)를 다소 살려줄 셈으로 이번엔 내가 아내의 지당한(!) 주장에 동의하면서 말했다.
"당신과 나는 이미 구세대고 우리 딸은 신세대이니 그게 바로 세대차이 아니겠소? 그러니 우리끼리나 맛있게 먹읍시다" 딸을 애써 오불관언한 채 우리부부만 맛나게 먹는데 하지만 '왕따'가 되기 싫었던지 잠시 후 딸은 은근짝 끼어들었다.
녀석은 김치전을 한 입 베어물더니 맛이 있었던지 이내 마구 뜯어먹는 것이었다. "맛있지?" 묻는 내게 녀석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놈아, 너희들과 나 사이에 비록 세대차이는 있을지언정 입맛은 다 똑같은 거란다. 왜? 우린 다 같은 한국인이니까 말이다.'
그나저나 지난주에 입대한 아들은 평소 라면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것 외에도 라면을 끓이는 솜씨는 가히 일류요리사의 경지였다. 하지만 이제 겨우 훈련병인 가장 졸병의 처지이니 라면 맛은 고작 꿈에서나마 볼 수 있을 듯하여 못내 가슴이 저린다.
논산훈련소장님~ 신병들에게 자주는 안 되겠지만 토요일 밤 같은 때 하루만이라도 라면을 새참으로 제공해 주시면 안 될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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