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사전, 그리고 영어 선생님과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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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사전, 그리고 영어 선생님과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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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입학선물로 영한사전을 받았다. 예쁘게 비닐코팅이 된 사전을 구입할 때 받은 종이로 된 포장용 갑까지 씌운 채로 가방에 넣어서 자랑스럽게 학교에 갔다. 단순히 새로운 것에 대한 애착 때문만은 아니었다.

중학교 때보다 한층 어려워진 고등학교 영어와 친숙해져야 한다는, 나름대로의 사려 깊은 생각 끝에 나온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첫날부터 산산이 부셔져 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첫날 수업시간에 들어온 영어 선생님 때문이었다.

“너희들 모두 영어사전 가지고 있지. 혹시 영한사전 없는 사람 손들어 봐”

당연히 아무도 손드는 사람이 없었다. 대학진학을 목표로 하는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과목인 영어 첫 수업시간이 아니었던가!

“좋아, 그럼 지금 모두 사전을 책상위에 올려놓도록!”

새삼스레 영어사전을 책상위에 올려놓을 필요도 없었다. 이미 모든 아이들이 사전과 영어교과서를 책상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있었던 것이다. 거의 모두가 반짝반짝 빛나는 새 영어사전을!

그러나 다음 순간 선생님에 입에서 나온 말씀은 우리들 모두를 경악하게 만들고 말았다. 그 짧은 키에 생김새도 이상한 남자 영어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지금부터 모두들 사전의 껍질을 벗기도록 한다. 종이커버, 비닐커버 할 것 없이 모두 벗기고 사전에 붙어있는 가죽커버 하나만 남기도록 한다”

거의 엽기적인 수준의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이해하는 데에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선생님이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어서야 그 뜻이 비로소 명확해 졌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아이들이 아무도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고 있자, 선생님은 앞줄에서부터 차례로 선생님 자신이 손수 학생들의 사전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드는 걸로 봐서는 처음부터 그렇게 하시려고 아예 작정을 하고 오신 것이었다.

차례로 사전의 커버를 벗김 당해버린 아이들의 소리 없는 비명이 교실을 가득히 채우는 가운데 선생님은 한발 한발 나에게로 다가 오셨다. 제법 키가 커서 교실의 뒤쪽에 않아있던 나에게 선생님의 발길이 다가왔을 때쯤, 앞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미 보아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있었다. 그냥 커버처럼 씌우게 되어있는 사전이라면 그냥 비닐을 벗겨버리면 되지만, 내 사전처럼 비닐 커버가 가죽 껍질에 단단하게 붙어 있는 비닐은 예쁘게 벗겨지지 않았다. 결국 사전에 흉측한 상처를 남겨야만 했던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내 귀한 사전이 낮선 선생님의 손에 의해 기괴한 모습으로 변하느니 차라리 내손으로 비닐커버를 벗겨버리고 싶었다. 몇 번 그런 생각을 했지만 마침내 내 차례가 될 때까지 나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내 앞에 서자 선생님은 날 물끄러미 쳐다보셨다.

“넌 소문도 못 들었나 보구나?” “....”

사실 첫 수업시간부터 아이들이 그렇게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긴 했었다. 하지만 “그렇기야 할려구” 하는 생각에 다른 아이들처럼 미리 사전의 거죽을 볏겨 놓는다든지, 아예 거죽을 벗겨놓은 옆 반 아이의 사전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빌려 놓지는 않았다. “설마 그런 일이야 있을려구” 하며 그냥 지내왔던 것이다.

“너 열심히 공부하라고 그러는 거야.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

선생님은 친절하게 내 앞에서 그 이유에 대한 설명까지 하셨다. 이윽고 반 아이들 모두의 사전이 흉측하게 망가진 것을 확인한 선생님은 교단에 올라서서 자신이 그렇게 한 이유를 설명하셨다.

“영어는 단어다. 아무리 문법을 열심히 공부해도 단어를 모르곤 영어를 잘 할 수가 없다. 단어를 공부하려면 사전을 아껴선 안 된다. 그래서 사전의 껍질을 벗긴 것이다. 앞으로 모두들 사전을 열심히 찾기를 바란다. 사전은 어디까지나 도구일 뿐이다. 사전을 진정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은 예쁜 커버를 씌우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이 되도록 철저히 소화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억지처럼 들릴 수도 있는 그 특이한 선생님의 말이 그날 왠지 내 가슴에 다가왔었다. 그 무언가 알 수 없는 이유가 조금은 고집이 센 내 마음을 휘잡아 끌었고, 나는 선생님이 말하는 영어공부 방법대로 충실히 따라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 선생님을 존경하게 되었다.

내가 그 선생님을 존경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내가 그 선생님을 존경하게 된 것이 그의 방법대로 공부를 한 것이 효과를 보아서라기보다는, 그토록 자신이 진정 옳다고 믿는 것에 충실할 수 있는 자세가 내 마음을 끈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주관이 강한 것이 장점이 될 수만도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 내가 그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확실치가 않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것이 꼭 이유가 있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 누군가를 신뢰하게 되고, 한 사람을 전적으로 따르게 되는 것이 그런 식으로 시작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날부터 나는 영어 선생님의 말씀에 충실하게 ‘사전이 망가뜨리기’를 시작했다. 그렇게 한해가 지나 2학년이 되어서는 그 선생님은 내 반의 수업에 들어오지 않으셨다. 그러나 나는 상관없이 사전을 열심히 찾았다. 서서히 망가져 가던 내 사전은 3학년이 되었을 때에는 제법 질이 잘 들어 있었다. 제법 새까맣게 손때가 묻고, 사전을 펼칠 때마다 가루가 부실부실 일어나곤 하던 그 사전은 그 때쯤은 나의 자랑이 되어있었다.

한번, 3학년 자습시간에 그 선생님이 내 반에 다른 선생님의 대신 자습을 감독하러 들어오신 적이 있었다. 책 한권을 들고 읽으시며 가끔 말없이 창밖을 내다보기도 하고, 책상 사이로 난 통로를 따라 걸어 다니시던 선생님은 내 자리에 멈추어서셨다. 그리곤 내 사전을 집어 들어 이리저리 만져보셨다. 그리곤 아무 말 없이 내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셨다.

원래 말주변이 없는 나는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선생님과 별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다. 졸업식 때 그 영어 선생님께 한번 인사를 드리러 가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수줍음이 많았던 나는 졸업식이 끝날 때까지 끝내 그 선생님을 찾아갈 용기를 내질 못하였다.

‘담임도 아니었고, 내가 특별하게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니었고, 그 선생님이 3학년 때 내 반에 수업을 들어온 것도 아니었고, 내가 인사를 간다고 해도 내가 누군지 알아보지도 못할 가능성이 더 많고...’ 나는 내 마음속에 그렇게도 많은 이유를 달았다. 그러고서야 그 선생님을 찾아가지 않은 나 자신을, 나 스스로에게 변명할 수 있었다.

대학에 입학한 후 몇 년이 더 지나서는 이제 더 이상 그 사전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오랫동안 정이 들었던 그 사전 대신, 새 사전을 사고 난 후에도 나는 그 사전을 자랑스럽게 내 책꽂이 제일 오른쪽에 소중하게 꼽아놓았었다. 그리고 더 많은 시간이 지나서 직장을 다니고, 결혼을 하고, 몇 번의 이사를 다닌 후 그 사전이 어디로 갔는지 이제는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내 마음 한 모퉁이에 그 사전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가끔씩 내 젊은 날을 생각할 때면 그 헤어진 사전은 그 선생님의 모습과 함께 또렷이 내 눈앞에 떠오르곤 한다. 내 젊은 시절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온 자랑스러운 증거물로서. 그리고 말없이 멀리서 누군가를 존경하고 그 가르침을 묵묵히 따랐던 순박함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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