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접촉 아무나 나서선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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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접촉 아무나 나서선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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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 대북라인 없느니만 못해, 선무당 사람 잡고 반풍수 집안 망쳐

 
   
     
 

국감기간 중 남북정상회담을 전제로한 싱가폴 대북접촉설이 불거지면서 진위 논란과 찬반논의로 정가를 달구고 있다.

좀 더 구체적인 소식은 北 노동당통일전선부장(아태평화위원회위원장) 김양건(71)이 아태위원회 실장 원동연(62)을 대동하고 지난 16일 북경을 거쳐 싱가폴에서 남북 정상회담개최 문제로 남측의 고위인사와 만났으나 의제문제와 회담장소 등 이견이 커서 합의에 실패(?) 했다는 얘기다.

당초 대북접촉설 자체를 부인해 오던 정부가 싱가폴 접촉설을 뒤늦게 시인하면서도 접촉에 나선 남측 인사를 철저하게 비밀에 붙이면서 이상득 의원 설, 류우익 씨 설, C모 씨 설, 통일부나 국정원인사가 아닌 경제계 인사 설 등 그야말로 추측만 무성하다.

정상회담을 위한 대북접촉에서 의제와 장소문제가 중요함은 물론이지만 협상 테이블에 누구를 내 세우는가 역시 의제나 장소문제 못잖게, 아니 그보다 몇 배 더 중요한 게 사실이다.

김영삼 정부 당시 1995년 6월, 백미 15만 t을 무상으로 북에 주기위해 개최 된 소위‘북경 쌀 회담’에 우리정부에서는 미국 보스턴 대학교 경제학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는 엘리트 관료출신 이석채 재정경제원 차관을 대표로 내세운데 반하여 北에서는 전금철(일명 전금진)과 원동연이라는 베테랑급 대남선전공작 전문 담판(談判) 꾼을 내세웠다.

북 대표로 나선 전금철 이란 자는 1960년 초 노동당 조직지도부 과장으로 출발하여 1972년 남북조절위원회 북측 대변인, 1990년 범민련 출범 준비 베를린 3자회담대표 및 범민련 북측 부위원장, 1994년 아태부위원장(통일전선부 부부장), 2000년 내각참사 및 2006년 6.15공동선언실천 부위원장 등 47년 간 적화통일공작에 종사해 온 베테랑 중 베테랑이었다.

전금철은 문익환과 계훈제가 제의하고 김일성이 받아드리는 형식으로 논의가 시작 된 1990년 6월 2일 베를린준비회의에서 남측인사의 범민련 참가자격을 소위 김일성의 조국통일 3원칙에 입각하여 "자주(미군철수),평화(새로운 형태의 계급투쟁),민족대단결(통일전선)을 위해 헌신한 개인 및 단체로 한다."고 엄격하게 규정한 자이기도 하다.

이석채 당시 재정경제원 차관이 미국 경제학박사학위까지 가진 정통 엘리트 관료출신이라고 할지라도 30년이 넘는 대남혁명공작 전문지식과 풍부한 경험을 가진 전금철 눈에는 공산당과 담판공작(협상)에 특별한 지식도 경험도 없는 상대가 마음껏 농락하고도 남을 풋내기 취급을 하기에 알맞았을 것이다.

이석채 박사와 전금철 전문담판꾼간 어설픈 만남의 결과가 1995년 6월 25일 동해항에서 쌀을 싣고 북으로 간 우리 화물선이 청진항에 입항하면서 인공기를 다는 굴욕을 당하는가하면 승무원이 간첩으로 몰려 억류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어가면서 [軍糧米]를 실어다 바치는 잘못 된 선례를 만들고 말았다.

그랬는가하면, 2000년 4월 8일 김대중 밀사로 북경에서 남북정상회담관련 협상에서 북 아시아태평양화위원회 부부장 송호경과 뇌물액수를 가지고 흥정을 벌인 당시 문광부 장관 박지원 역시 노동당통일전선부 부부장으로 대남혁명공작으로 잔뼈가 굵은 송호경에 비해서는 물정도 모르고 젠체하는 어린애에 불과 했을 것이다.

전문담판꾼 송호경과 풋내기 흥정꾼 박지원 간 만남의 결과로 김대중으로 하여금 5억 $이라는 천문학적인 돈을 ‘네다바이’ 당하고도 ‘연방제통일안’에 서명을 하는 반역행각을 저지르게 만든 것이었다.

2009년 10월 싱가폴에 나타난 김양건은 1997년 4월 조선노동당 국제부 부장을 거쳐서 2001년 김정일 비밀 방중 시 수행, 2005.6 김정일 남북정상회담 관계자 오찬 배석에 이어, 2005.10 김정일 후진타오 회담 참석, 2007.10 김정일 노무현 단독 회담 참석 및 10.4선언 서명에 입회, 2007.11 현대아산 현정은 접견 시 배석은 물론 2007년 조선노동당 통일전선부장으로 대한민국 제 17대 대선기간 중인 11.29~12.1 서울을 방문한 김정일의 측근 중 하나이다.

김양건과 함께 싱가폴 비밀접촉에 나섰다는 원동연(62세) 역시 1992년 조평통서기국 부국장으로서 남북고위급회담 군사분과 위원과 남북군사공동위 위원으로 활동했는가 하면, 1997년 조국통일연구원 부원장을 거쳐서 2002년 이래 아태평화위원회(통일전선부) 실장으로서 대남공작에 베테랑 급 일선 간부이다.

이번 싱가폴 비밀접촉에 누가 나섰는지는 아직은 알 수 없으나 대남분야에 30여년이상 종사 한 김양건과 필적(匹敵)하고 원동연을 압도 할 대북관련 베테랑이 나섰다고 볼 수는 없으며 대북관계 문외한, 협상 비전문가가 나서서 만들어 낼 결과가 어떨지는 못 들어도 오디오요 안 봐도 비디오다.

1972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밀사로 나설 때로부터 대북접촉 40년 가까운 역사에 나름의 경험과 자질을 갖춘 인사는 7.4공동성명당시 이후락 정보부장, 1985년 장세동 안기부장, 1994년 3월 19일 남북장관급예비회담 석상에서 북 조평통 서기국 부국장 박영수가 "서울불바다" 협박을 할 때 "전쟁을 하잔 말이냐?"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송영대 통일부 차관 정도가 기억에 남을 뿐이다.

김대중, 노무현 잃어버린 10년 간 선공후득(先供後得)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면 우선 퍼주고 보자고 한 임동원, 대남공작지도원 권호웅을 얼싸안고 동지라 부르던 정동영, 북 핵실험을 미국 탓이라던 이종석, 北의 굶주림 책임이 南에 있다던 이재정 등 '눈감고 퍼주기 族'에 대해서는 새삼스럽게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다.

예부터, 모사재인(謀事在人)성사재천(成事在天)이라고 일은 사람이 도모하되 성사는 하늘에 달렸다는 말이 있듯이 모든 일의 성패는 사람에 달려 있다는 게 평범한 진리이다.

아무리 타 방면에서 나름대로 유능한 인재라 할지라도 대북관련 지식도 경험도 없고 대한민국에 대한 애국심과 국가관마저 자세치 아니한 자가 밀사로 나섰다면 그런 접촉은 애당초 없었음만도 못 할 것이다.

이번에 밀사로 나선 자가 누가 됐건 김양건을 능가하고 원동연을 압도할 사람이 밀사였기를 바란다면 지나친 욕심이자 허망한 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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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서 해 2009-10-27 16:45:52
신경쓰지 마시고 그냥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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