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바로잡기] 그때 그날 광주사태의 현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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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바로잡기] 그때 그날 광주사태의 현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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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 (화려한 휴가) 증언자료

광주사태 (화려한 휴가) 증언자료

취재기자들의 증언 5.18 광주사태를 취재한 기자들이 남긴 증언자료.
광주언론인 / 5월 19일 나주경찰서 무기탈취

5.18항쟁 자료에 의하면 광주향토사 정웅 장군(호남출신)이 시위 진압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던 1980년 5월 18일의 상황 전개를 이렇게 기록한다.

시위대는 錦南로3가 가톨릭 센터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경찰의 페퍼포그에 밀려 중앙 로로 꺾어진 다음 때마침 忠錦지하상가 공사로 자갈이 나뒹굴던 중앙로에서 일제히 돌을 집어들어 忠壯로 파출소를 향해 내던지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유리창이 박살나고 내부에 있던 경찰들이 옥상으로 대피했다.

일단 불붙은 시위대의 군중심리는 경찰에 대한 계속된 공격으로 이어졌 다. 낮 12시 45분엔 山水동 파출소가 습격을 당했고 黃金동학생회관 앞에서 는 도시락을 먹던 경찰들을 시위대가 기습, 경찰이 도주하자 페퍼포그 차 에 불을 질렀다. 이때 이미 錦南로 시위군중은 1천 5백명, 忠壯로 골목골목 에는 1천 6백명의 시위대가 경찰을 향해 음료수 병과 돌을 던지며 시위의 강도를 더해갔다.(시위대수:95년 7월 18일 검찰수사기록)

당시 상황을 광주의 한 언론인은 이렇게 회고한다.

필자는 80년 5월 18일 전라남도 광주시 광산동에 위치한 지방지 전남매일신문사 편집국 제2사회부 차장직에 재직하면서...18일 오후 7시가 되자 전남도청 앞에 자리잡은 전투경찰 중대병력 규모가 시위 대학생들의 도청 진입을 저지하기 위해 방패와 진압봉을 앞세우고 두겹 세겹으로 정문을 막고, 수백명의 시위 대학생들은 손에 손에 횃불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조선대학교 방향으로 질서정연하게 행진해 나갔다. 어둠이 깔린 밤8시 조선대학 광장에 집결한 학생 시위대는 평화적인 횃불시위를 끝으로 해산되었다. (....)

5.19일 정오 사무실의 전화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받으니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숨찬 목소리가 귀에 익는다. "김 차장이요? 나 서울지사 오세성이오. 본사 전화가 불통인데 광주 소식 좀 알려주시오"한다. (....)

초조함과 불안이 엄습한 가운데 경찰 경비전화가 요란스럽게 울린다. 수화기를 집어들자 "경무과장 김계수요. 보안대장님 계십니까?"나는 급한 김에 "예 그렇소"하니 그는"나주 경찰잔여 인원은 지금 서를 철수합니다. 현재 폭도들에 의해 점거 당했습니다" 라는 말만 남기고 황급히 전화는 끊겼다.

벽시계를 쳐다보니 19일 정오 12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다. 나주의 치안을 책임질 경찰서가 광주 차량 통제이후 3시간만에 피습당했다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건 소문으로만 들려왔던 광주의 소요사태가 1시간거리인 나주경찰서까지 점거되었다니 소요나 폭동이 아닌 반란이자 전쟁이다. 나는 유년기 6.25동란을 체험했고 60년대 군 생활 중에 월남전에 참전했던 지난날의 경험으로 이 사태의 심각성을 누구보다 절실히 느끼며 더욱 불안해진다.

우선 폭동으로만 여겨왔던 광주사태가 농기구나 몽둥이가 아닌 총기로 무장한 자들로 인해 27키로 떨어진 나주경찰서가 피습 점거되었다는 사실에 두려움과 불안감이 온몸을 스치고 손에 손에 각목과 몽둥이로 무장한 무리들이 버스와 트럭등에 몸을 싣고 시가지를 질주하는 모습이 마치 6.25동란때 7살의 나이로 우리 어머니를 따라 외가인 남평으로 피난했든 기억들이 되살아난다.

이 때 사무실 입구에 인기척이 나면서 사복차림의 정보과 박정남 경장이 파랗게 질린 모습으로 들어선다. 경찰서가 피습되고 무기고도 털리자 피신처를 찾아온 것이다. 다행히 사복근무인지라 골목길로 더듬어 여기까지 왔다는 거다. 12시 40분경 전화벨이 울렸다. 서울지사 오 부장이다 "김 차장 빨리 대피하시오. 서울에서 접한 보고는 광주지역 방송국 은 물론 신문사도 피습되어 불에 타고 있다는 거요. 지사간판도 내리고 피신하시오"하는 소식이다. (....)

경비전화는 불통이고 일반 전화로 금파를 불러댔다. 금파직원들 조차 철수해버린 모양이다. 응답이 없다. 제발 총기나 은닉하고 철수했기만을 바라는 마음뿐이다. 이 때 아시아자동차(방위산업체)에서 생산한 군용트럭이 사무실 앞을 질주하며 파출소쪽을 향해 소음을 내며 달린다. 수분이 흐르자 무기고 블럭담이 굉음과 함께 트럭의 후진으로 부서진다. 창문을 열고 쳐다보니 대한통운의 화물차량(진홍색)으로 무기고를 무너트리고 있는 것이다. 이어 곧바로 총성이 요란하게 들려온다. (....)

이 때 숨을 헐떡이며 누군가가 사무실로 뛰어들어왔다. 보니 반쯤 정신이 나가버린 것 같은 보안대 주재관 이 준위가 사무실 문턱을 들어서며 자신의 권총을 찾아댄다. "김 차장 내 권총! 내 권총!"하고 빈 허리춤을 더듬으며 실성하듯 오른손을 흔든다. "이 대장 정신차려 자네 권총 여기 없네" 어깨를 어루만져주며 정신을 가다듬도록 박 경장과 함께 진정을 시켰다. 냉수 한 컵을 단숨에 들이마신 이 준위는 "김대중의 내란 폭동!"이라 지적하고 달려온 경위를 설명했다.

그가 나주군청 군수실을 찾아가 유희창군수를 금성산 5포대로 피신토록 한 후 군청 정문을 나서는데 몽둥이와 각목으로 소지한 20여명의 폭도들이 몰려오는데 그 중 낯익은 30대 후반의 대장격인 듯 지휘를 하는데 그 자는 이 나주 사람이 아닌 고향이 함평 사람으로 그는 함평에서 야당 선봉자로 자임하며 유일한 김대중의 추종자이자 도서 활부장사로 유관기관을 떠돌며 강매하는 건달이며, 평소 이 준위와 호형 호제하던 사인데 이 날 몽둥이를 든 체 "어이! 보안대장 어디 가는가?" 라며 말을 건네며 행동이 돌변하여 접근해 오자, 놀란 이 준위는 군청에서 불과 500미터 거리인 이곳까지 2키로나 골목길을 헤매며 줄달음쳐와 사무실 앞에서 정신을 잃을 정도까지 된 것이다.

정신을 가다듬은 이 준위에게 금파 무기고가 방금 털린 사실을 알려줬다. 그는 곧바로 나주 예비군 대대로 털린 총기류 파악에 나섰다. 예비군 대대장과의 전화 통화에서 수화기를 통해 들려온 소식은 충격적이었으며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M1과 칼빈소총만 1600정. 중화기인 M60기관총과 수류탄이 든 상자 등이 보관되어있었다는 것이다. 우리 네 사람은 머리끝이 곤두섬을 느끼고 안절부절 어쩔줄 모른체 발만 구르고 있었다.

정확히 무기고가 피습된 시간은 5.19일 오후 3시다. 이전까지만 해도 도로에 질주하는 차량들에는 차창문을 열고 각목들을 휘둘러대며 요란스럽게 함성을 지르며 사무실 앞 6미터 지방도로를 휩쓸더니, 이제 시가지 곳곳에서 총성이 들린다. 그러나 사무실에 묶인 우리 네 사람은 긴장된 체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한 체 속수무책이다. 전화가 왔다. 서울지사 오 부장이다. "김 차장 본사가 불타고 있고 본사 식구들이 이미 철수했으니 김 차장도 대피하시오" 청천벽력같은 소식에 이제 우리는 안절부절이다.

그 때 바로 담벼락 사이에 붙어있는 청수식당에서 칼빈 소총소리가 요란하다. 왁자지껄 젊은이들의 소리와 함께 들려온 총소리는 우리 세 사람을 더욱 두렵게 한다. 주인공이 그 식당 주인 아들인 20대 후반의 망나니이기에 더욱 가슴이 떨린다. 저런 무리들이 탈취한 총기를 지녔다면 이건 큰일이다. 민주화 운동이 아닌 폭동이자 반란이다. 서울 지사 오 부장의 피난하라는 전갈과 광주에서 신문사가 불타고 있다는 게 사실 같다. 아침나절 정류장에서 전투복 차림으로 만난 보안과장이 전해준 광주소식과 똑같다. 이미 치안을 담당할 나주경찰서까지 피습되어 폭도들에게 점거되지 않았는가.

바로 곁에서 들려오는 총성에 우리 세 사람은 두꺼운 벽쪽으로 몸들을 피했다. 그러고 있는 도중 어둠이 짙어지는 밤 9시께 전화 벨소리가 요란하다. 두렵지만 서울 소식인가 하며 수화기를 들었더니 "거기 유신 언론인 집이지 방문할테니 기다려"하는 험악한 목소리인 장년의 협박전화가 쩌렁쩌렁 울린다. 시퍼렇게 질린 표정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은 내게 "별일이야 있겠는가"하며 이 차장이 위로하며 걱정을 한다. 걱정스러워 하는 나의 모습을 보던 이 차장이 "김 차장 이곳은 내가 지키고 있을테니 자네는 피신해야겠네. 분명 자네와 감정있는 자가 무기를 소지하고 찾아올 것 같네 빨리 피하게" 내가 "갈곳이 어딘가. 경찰이 후퇴하고 어디로 간단 말인가" 절망적인 탄식에 이 차장이 예비군대대로 피신할 것을 권한다.

곧바로 2키로 거리에 있는 예비군 대대로 전화를 했다. 바로 대대장 정 소령이 응답한다. "정 소령 나 김 차장인데 대대로 피신해야겠네 그곳 사정은 어떤가?"하자 정 소령이 "여기도 어렵습니다. 이미 전화국 앞 송전탑 부근에 버스에 무장한 폭도들이 부대 정문을 차단하고, 마구 위협 사격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아무튼 부대만은 지켜야 하네. 그곳 마저 무너지면 큰일이네 날이 밝는대로 부대로 가겠네" 하고 끊었다. 사태의 심각함이 눈앞에 닥쳐오고 있음을 느낀다. 단순협박전화로 생각할 수 없다.

당시 공화국 군부정권이 끝나고 계엄령이 선포되자 사회곳곳에서 번지는 속어가 '유신잔당'이요. '유신1중대'니. 특히 언론에까지 던지는 '유신언론'이란 어휘는 대학가나 정치권에서 사용하던 어원으로 군사정권이 무너진 후 생겨난 신종어인데 '유신언론인'이란 협박전화를 받고 보니 분명 야당 정치권이 관련된 사태로 보인다. -실제 우리신문인 '전남매일' 신문은 지방 야당지 이기에 내가 이런 협박을 들을 이유가 없었다- 그럼 이 준위가 몽둥이와 각목으로 무장한 야당 선동군으로 부터 놀라 도망쳐온 일들, 경찰서가 피습되고 총기가 탈취되어 예비군부대까지 위협을 받고 있다면 이는 분명 폭동이요 반란이다.

육이오 전쟁 때 7살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경찰 가족이라는 이유하나로 쫓겨다니며 피난 생활 수개월 중 동네 개울속에서 학살된 아버지와 형님의 주검앞에 통곡하시던 어머니의 치마폭을 붙잡고 아무 영문도 모른 체 울기만 했던 나의 기억들, 그 후 청년기에 아버지와 형님의 원수를 갚겠다고 군에 자원입대했던 일, 전역 4개월을 남기고 월남전에 지원했던 일, 반공을 국시로 자신 반공주의자로 자처하며 살아온 나는 6.25전쟁을 떠오르게 하는 일들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어 전신에 피가 끌어 오른다.

출처 :역사학도의 시사토론 글방 원문보기 옮긴이: 역사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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