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십자가, 넘어야 할 아리랑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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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십자가, 넘어야 할 아리랑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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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아리랑의 발원지를 찾아서

^^^▲ 지름 11.5cm 높이 6.2cm. 1960년대에 한창 유행했던 아리랑 재떨이입니다. 아리랑 담배가 나오자 아리랑 성냥이 뒤따라 나왔고, 곧이어 아리랑 재털이가 나와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 정선아리랑연구소^^^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명사십리가 아니라며는 해당화는 왜 피며
모춘 삼월이 아니라며는 두견새는 왜 우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노래는 옛 사람들의 대를 이어 내려오면서 여닫던 마음의 창이었다. 지금도 그 마음의 창은 변함없이 여닫기고 있다. 일테면 청승스러운 조용필의 '한오백년'으로 여닫기도 하고 노산(籍山) 이은상(李殷相)의 '가고파'로 정선 아라리로 여닫기도 한다. 아닌게 아니라 노래만치 속 시원하게 여닫기는 마음의 창도 드물다 하리라.

정선 아라리의 원류를 찾기 위해서는, 이 노래가 만들어지게 된 역사적인 배경부터 추적해 봐야 한다. 자, 그럼 순례의 길을 떠나보자.

정선읍에서 동면 화암리로 뻗은 도로에는 주변의 푸른 산 빛을 받아 아스팔트마저 푸른 광채를 띄운다. 덕우리에서 갈라지는 국도가 수없이 구비를 감돈다. 산등성이를 오른가 하면 깊은 골짜기를 내닫는다.

산골 거칠현대 남녘에 거칠현동(居七賢洞)이 있고, 그 남쪽에 높이 971.5m의 백이산(伯夷山)이 구름 위로 솟아올랐다. 불사이군(不事二君)을 신조로 하던 고려 유신들이 거칠현동으로 옮겨와 세상과 인연을 끊는다.

때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 왕조가 들어서자 고려의 신하 일곱이 두 나라를 섬길 수 없다고 하여 벼슬을 마다하고 깊은 산골로 알려진 정선에 들어와 살다가 죽었다. 그들이 살았다는 곳이 정선군 남면 낙동리 거칠현 마을인데, 이것은 일곱 선비가 산 곳이라는 뜻의 이름이다.

^^^▲ 가로 26.8cm 세로 29.2cm. 1952년 아리랑 가사가 인쇄된 실크 손수건.
ⓒ 정선아리랑 연구소^^^
또 이 마을의 원산인 백이산은 그들이 산나물을 뜯던 산이라고 한다. 충절을 지키려고 벼슬을 마다하고 그 아우인 숙제와 함께 수양산에 들어가 산나물을 뜯어먹으면서 살았다는 중국 은나라의 충신 백의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이처럼 충절을 지키려고 이곳에 들어온 그 선바들은 지난 일을 회상하고 멀리 두고 온 식구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시로 지어 읖었는데 그것이 정선 아라리의 시원이 되었다. 고려에 대한 절의를 끝까지 지키려던 고려 유신들이 조선 왕조의 세상과 멀리 떨어진 정선에 찾아든 것은 당연했었다.

정선 아라리는 본디 그 선비들이 불렀을 때에는 어려운 한문으로 되어 있었을 뿐더러 가락도 노래라고 이를 만한 것이 못되었으나, 오랜 세월에 걸쳐서 이 지방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널리 불려지는 동안에 쉬운 말로 바뀌었고 가락도 점차 노래 꼴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 사람들이 세상살이의 고달픔이나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에 얽힌 이야기 같은 것을 노랫말에 보태기도 하고, 그러는 동안에 더러 그전의 노랫말을 빼먹기도 하여 오늘날에는 그 노랫말이 오백 가지가 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새는 이 민요의 어떤 노랫말에나 붙는 후렴인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게"는 본디 이 민요에는 없다가 조선시대에 덧붙인 것이라고 한다. 이 지방에서 가장 널리 부르는 이 민요의 노랫말을 적어 보겠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너주게
싸리골 올 동백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백은 낙엽에나 쌓이지
사시장철 넘 그리워 나는 못 살겠네."

아우라지는 두 갈래로 흘러온 내가 하나로 아우러지는 곳이라는 뜻으로 북면 여량리에 있는 나루의 이름이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옛날에 여량리에 사는 처녀와 아우라지 건너편에 사는 총각이 연애를 했는데, 유천리 싸리골에 동백을 따러 간다는 구실로 남몰래 싸리 골에서 서로 만나곤 하다가 오는 가을에 홍수가 나서 아우라지에 나룻배가 다닐 수 없게 되자 그 처녀는 총각을 만나러 가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정선 아라리 가락에 실어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다.

"아질 아질 성마령 야속하다 꽃베리/ 지옥 같은 정선 읍내 십년간들 어이 가리."

이 노랫말은 정선이 얼마나 교통이 불편했었는지를 짐작하게 해 준다. 성마령은 이 정선과 평창 사이에 있는 고개로서 지금은 잘 쓰이지 않지만, 옛날에는 이 고을의 관문으로 알려졌었는데, 어찌나 높던지 그 마루에 서면별을 만질 수가 있을 듯하다는 뜻에서 성마령(일명 비행기재)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필자가 정선에서 4년간을 지낸 적이 있었는데, 처음 정선으로 이사를 오던 중 이 재를 넘다 폭설을 만나 죽을 뻔한 경험을 한바 있었고, 다행히 대여섯 시간을 넘겨 재를 간신히 넘긴 운전기사는 다시는 정선 쪽으로 오줌도 누지 않겠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기만 하다.

그리고 꽃베리는 강릉에서 정선읍으로 오자면 반드시 지나가야 했던 베리, 곧 벼루로서 조선시대에 어느 관리가 가마를 타고 지나가면서 가도가도 끝이 없자 가마꾼에게 얼마나 더 가야 끝나느냐고 몇 차례 물어도 그때마다 가마꾼이 곧 끝난다고 만 대답했던 곳이었고, 그때에 코 가마꾼들이 곧 베리가 끝난다고 했던 데서 '곧베리'가 되었다가 그 이름이 나중에 '꽃베리'로 바뀌었다고 한다.

^^^▲ 26.5cm 19.3 cm. 1935년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영화 <아리랑 고개>를 알리는 전단입니다.
ⓒ 정선아리랑 연구소^^^
그러나 지금의 성마령은 1989년 그 재를 관통하는 터널이 뚫려서 정선에서 평창까지 한 시간 이내에 갈 수 있게 되었고, 꽃베리도 거반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 내친걸음으로 훤하고 수려한 풍경을 감상하며 달리게 되었다. 소위 개발이라는 덕택(?)으로….

이 아라리를 새겨보면, "우리들은 말을 삼가고(귀머거리와 벙어리가 되고) 배고픔을 견디며 충의는 녹 지킬 것이며, 옛 성현들을 사모하는 것만이 우리들의 갈 길이다" 라고 그들은 읖조리며 시운(時連)을 한탄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 고장에 살면서 애송하기 시작한 아라리의 인들은 오랜 기간을 거치면서 민족의 역사와 함께 또는 무한히 이어지는 인생살이에서, 귀와 입을 막고 다물어 벙어리가 되고 주린 배를 움켜쥐고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을 했다.

충의를 위하여 피를 흘리면서라도 꼭 넘어야했던 고인들은 무섭고 쓰라린 고비를 아라리 고개라 했고, 이를 넘기기에 숱한 고초를 겪어야만 했을 터이다. 이러한 마디 또는 고비는 예수 그리스도가 넘어야 했던 골고다 언덕과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함은 필자의 무리한 접근일까?

이씨 조선의 등극, 수많은 당쟁, 왜란과 호란, 경술국치와 민족해방, 6.25전쟁, 4.19, 5.18광주항쟁 등이 우리 민족이 넘어야 했던 아라리 고개였다. 가난, 사별과 이별, 그리움, 외로움, 로운 인생살이를 푸념하고 빈정거리기도 했고 소망을 빌기도 하고, 좋고 즐거워서 덩실덩실 춤도 추면서 삶의 고비와 마디를 어렵게 넘으며 살아왔다.

"한치 원산의 곤드레 딱쭈기 임의(나머지) 맛만 같다면 올 같은 숭년에도 붐살아 나지."
"네 팔자나 내 팔자나 이불 담요 깔겠나. 마틀마틀 장석자리에 깊은 정만 들자."
"아우라지 강물이 소주 약주만 같다면 오고 가는 친구가 모두 내 친구일세."
"우리 댁의 서방님은 잘났던지 못났던지 얽어매고 찍어매고 장치다리 곰배팔이 헐게 눈에 노가지 나무 뻐덕지게 부금적 세 쪼각을 새뿔에 바싹 매달고 엽전 석냥 옷 짐지고 강릉 삼척으로 소금사러 가셨는데 백봉령 구비구비 부디 잘 다녀 오시오/ 아리랑-"

우리 민족의 응어리진 한을 품고 구성진 아라리 가락에 실어, 이 민족의 버팀목의 상징으로 우뚝 서 있는 정선은, 정기 어린 태백산의 기슭 지붕을 타고 그 밑에 자리하여 강원도에서도 가장 깊은 심산유곡(深山幽谷)이다.

고구려 내매현에서는 신라시대 정선으로 시작하여 '삼봉', '주신', ‘도원', ‘침봉' 등 여러 번 변천의 곡절로 탄생한 정선은, 이 나라의 용마루로서 웅장한 산악과 개천이 어울려 서로 안고 돌아가는 곳이기도 하다. 어느 곳이나 물을 끼고 들이 이루어진 곳에 일찍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겠듯이 정선에도 선사 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흔적이 남아 있다.

^^^▲ 가로 19cm 세로 26cm. 1954년 한국어린이합창단 미국공연 악보(Sheet music)입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우리나라 문화를 미국에 알리려는 노력이 음악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시도되기 시작했습니다.
ⓒ 정선아리랑 연구소^^^
곧 임계천과 구절천이 아우러지는 냇가의 들판에 고인돌 다섯 개가 남아 있고, 그 물줄기가 좀더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오대천과 만나는 곳에 북면 남평리의 냇가 들판에 고인돌 세 개가 남아 있다. 그런데 정선의 관청 이름이 바뀔 적마다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고, 이 군이 도원군이었을 적에 자리 잡았던 곳은 남면 무릉리였다고 한다.

정선 아라리의 노랫말에 "정선의 구명은 무릉 도훤 아니냐/무릉 도원은 어디 가고 산만 총총하네/일강릉 이춘천 삼원은 주라 하여도/늘기 좋고 살기 좋은 곳은 동면 화암리로다."라는 것이 있으니 이 노랫말로 미루어 보면 도원이라는 이 군의 옛 이름은, 이 군의 빼어난 자연 경관을 두고 지은 듯하다.

특히 화암리 일대는, 그 이름이 말해 주듯이 잘생긴 바위가 절벽을 이루고 맑디맑은 물과 어우러진 그림같이 아름다운 경관이 널려 있어서 흔히 소금강이라 불린다.

이곳에는 옛날에 신선들이 신을 삼았다는 신틀 바위와 신선들이 낚시질을 했다는 낚시 바위를 위시해서 거북 바위, 맷돌바위, 병풍바위, 벼락 바위 같은 잘 생긴 바위가 줄지어 있고, 돌무더기를 들추면 한 여름에도 얼음 덩어리가 석류알처럼 땅에 박혀 있는 골짜기인 지렁이 골이 있으며 영월의 고시동굴보다 규모는 작으나 아름답기로는 뒤지지 않는다는 종유굴이 있고, 이름난 약수터도 있다. 사이다 맛처럼 톡 쏘는 맛이 일품으로 위장병이나 눈병에는 특효라고 한다.

그리고 그런 경관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벼랑인 몰운대도 있다. 그리고 단풍이 아름답기로 이름난 골짜기인 이곳의 강대골에는 옛날에 선비가 공부하러 왔다가 뱀이 하도 우글거려서 들어갈 수 없어 뭐라고 주문을 외우니, 뱀이 모두 색은 나뭇가지로 변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는데, 그 뱀들이 살았었다는 가마소, 골벵이소, 바가시소, 구이소, 사발소 같은 쪽빛 물이 가득 고인 소와 폭포가 즐비하다.

우리나라에서 산이 많기로는 강원도이고, 그 중에서도 제일가는 산골마을이 정선이다. 한국에서 가장 긴 500km의 길이와 평균고도 800m 준령에 자리 잡고 있다면 가히 짐작이 갈 것이다.

이곳 정선은 해발 1,000m가 넘는 산이 22개나 된다. 우선 1,570m의 함백산을 비롯하여 가리왕산, 두위산, 상원산, 각회산 등의 웅봉이 군을 에워싸고 있다. 가히 태산이라 일컬을 만하다.

고려 때의 광중용은 정선을 말하여 인심이 착하고 꾸밈새가 없으며 인정이 두텁고 서로 시비함이 없다는 풍순소박민무송(風淳素朴民無訟)"이라고 묘사했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에서 찾아보면 "백고인언제향노(白古人言悌鄕路)"이라 기록하고 부모를 잘 섬기고 형제가 우애하는 고장이라고 말하고 있다. 정선에서 볼만한 곳으로 또 사북읍 고한리의 갈래산 기슭에 있는 정암사를 빼놓을 수 없다. 이 절은 신라 때의 이름난 중 자장이 창건했다고 전해 온다.

전설에 따르면 당나라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자장이 나라 안 몇 군데에 절을 지으려고 마땅한 자리를 찾다가, 어느 날 사북리에 있는 불소에서 밤을 세워 기도를 했는데 이튿날 아침에 보니 그 옆에 나있던 칡덩굴이 하룻밤 사이에 6km쯤이나 떨어진 지금의 정암사 자리까지 세 줄기로 뻗어나가 있어 거기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그 한 줄기가 뻗은 자리가 지금의 법당 자리이고, 또 한 줄기가 뻗은 자리는 보물 410호로 지정된 수마노탑 자리이며 나머지 한 줄기가 뻗은 자리는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고 한다.

^^^▲ 기자의 현재 모습
ⓒ 박철^^^
이 절은 석가모니 사리를 모신 나라 안에 다섯밖에 없는 이른바 적멸보궁에 들며 여느 적멸 보궁과 마찬가지로 불상을 모시지 않은 점이 특징이다. 수마노탑은 수마노 곧 석영의 한가지인 매우 단단하고 아름다운 빛깔을 지닌 광물로 쌓은 탑이다. 자장이 서해에서 건져온 수마노로 쌓았다고 하는 것으로 여러 차례 고쳤기는 하나 쌕 아름답다.

대충 얘기를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아름다운 정선 고을, 눈물과 한으로 둘리어진 깊은 골짜기, 그러나 오히려 독특한 마음의 창을 열어 '정선아라리'로 여닫아 왔다. 여기서 그간의 정선의 특별한 사정, 일테면 '석탄조치 합리화'정책의 일환으로 문을 닫게 된 정선의 탄광지역의 어려움을 지면상 여기 적지 못해 아쉽다.

신동면과 사북읍 고한읍의 탄광촌을 둘러보면 폐광 이후의 그 막막하고 썰렁함이 한때 호황을 누리던 탄광촌과는 전혀 딴 판으로 쓸쓸하기만 하다. 농촌의 몰락과 함께 탄광지역도 거의 몰락의 위기를 맞고 있다. 그러고 보면 정선은 우리 민족이 넘어야 할 아리랑 고개로 남아 있을 것 같다.

대만의 신학자 C.S송이 '정선 아라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우연한 일은 아닐 듯하다. 가리왕산으로 오르는 능선에 서서 운해(雲海)를 바라보면, 제깟 인간의 모든 욕심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실감하게 된다.

내가 4년 동안 살았던 덕송리, 그 맑은 물에 멱을 감고 추운 겨울 얼음장을 깨고 보쌈을 놓아 잡은 피라미로 회를 쳐 먹으면 '아, 그 맛… 인간사 행복이 어디 이만한 기쁨일소냐' 살아있음의 은총이련만.

우리 민족은 과연 어느 고개를 향하여 가는 것인가? 청량리에서 덜렁 차표 하나 끊어 정선 가는 기차를 타시지 않겠는가? 정선 아라리에 몸을 싣고….

"멀리서 오신 손님 아라리를 부르라네/ 예까지 오셨으니 한 곡조 들어 보소/우리 살림 가난해도 가난한 줄 모른다네/ 이 좋은 풍치에 배고프면 이상하지/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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