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년 초동의 한여름 논두렁 풀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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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년 초동의 한여름 논두렁 풀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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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 베다 손 베면 보드라운 쑥 푹푹 찧어 붙여 주는 게 약-‘꼴 베기’<1>

 
   
  ^^^▲ 경지정리를 하지 않은 고향 전남 화순 백아산 뒷편 방리 양지마을의 논두렁
ⓒ 김규환^^^
 
 

1970년대 논두렁 풀은 아무나 벨 수 없었다

1970년대는 논두렁 베어 가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당연히 남의 논두렁을 함부로 벨 수 없었다. 어찌 보면 고마워해야 할 일을 두고 말이다. 모내기가 끝난 뒤에는 주인 허락 없이 누구도 제 맘대로 드나들 수 없었다. 벼를 따간데서 그런 게 아니었다.

꼴을 베면서 나락 한 줄기 다칠까봐 못 들어가게 한 것이 한가지 이유요, 집집마다 소 한두 마리는 기본으로 길렀기 때문에 소먹일 논두렁 풀을 정성 들여 가꾸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풀이 귀했던 시절이다. 손 대가 없는 사람들은 품삯을 주고 놉을 얻어 논두렁을 벨만큼 정성도 대단했다.

냇가에 가도 풀이 없고 논두렁 밭두렁에 가도 베어가고 베어가기를 반복하여 자랄 틈이 없었다. 오죽하면 밭 메던 풀마저 져다가 먹였을까? 그러니 초지(草地)를 따로 갖고 있지 않던 고향 사람들은 꼴 베는 것도 겨울만 빼고는 커다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요즘은 풀천지입니다. 그 땐 풀 벨 때가 거의 없었지요. 하지만 이젠 풀 베다 먹이는 사람 흔치 않습니다. 소를 들로 끌고 나가 뜯길만한 자리도 거의 없었답니다.
ⓒ 김규환^^^
 
 

조심하라던 아버지의 세 가지 걱정

미숫가루를 한 그릇 되직하게 타 먹고 집을 나서는 막내아들을 보시고 아버지께서는 걱정이 앞섰던 모양이다. 농약 친 논두렁에서 꼴을 베어다 주었던 까닭에 작년에 우리 소가 죽었던 적이 있었다. 그 뒤론 버릇처럼 빠트리지 않고 말씀을 하셨다.

“규환아, 농약 쳤는가 모른께 조심혀라와~. 아무데서나 비지(베지)말고~.”
“예.”

길을 떠나는데도 미덥지 않았던지 멀어져 가는 자식 뒤로 한 말씀 또 하신다.

“비얌 조심허고~”
“알았어라우~”

“낫 조심혀!”
“예!”
“손 조심허란 말이여~”
“아부지, 걱정마시랑께요.”

다소 거친 말투가 섞여 나온 건 아직도 나를 믿지 못하는 아버지에 대한 작은 반항이었다.

 

 
   
  ^^^▲ 논두렁에 풀이 없으면 이 '소깨잘'이나 '고마니대'를 대신 베어다 줬습니다. 과자처럼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 김규환^^^
 
 

여섯 살부터 갈고 닦은 내 낫질 솜씨와 소 꼴 베는 건 어머니와 자식들 몫

여섯 살 때부터 꼴을 베었으니 내 꼴 베는 솜씨도 보통은 아니었다. 학교 들어가기 전 이미 3년에, 이제 2학년이니 낫질 벌써 5년째다. 잘 든 낫으로 춤도 출 수 있었다. 돌부리만 만나지 않으면 눈감고도 쓱싹쓱싹 흙 한 줌 들어가지 않게 가지런히 좋은 풀만 골라 벨 수 있는 실력을 갖춘 것이다.

이 때 어지간한 아이라면 놀기 바쁠 테지만 우리 마을에서는 나를 포함한 절반 이상은 어른들 대신 소먹일 풀을 베어와야 했다. 황소를 기르는 집은 그래도 덜 했지만 암소가 송아지라도 한 마리 낳는 날에는 소 풀의 양은 감당하기 힘겹게 늘어만 갔다.

어른들은 퇴비 만들 풋나무를 해오는 게 일이었으니 소먹이는 것은 아녀자 몫이었다. 간혹 여유가 있으시거나 상황이 급할 때만 거들어 주는 정도였다.

일의 양으로만 보면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에겐 강제노동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똘망똘망 곧 튀어나올 것 같은 착한 눈을 가진 소를 보면 ‘얼른 자라서 우리 집 부자 되게 해 주라~’며 더 열심히 베어 왔다.

집으로 가져와서는 꼴 망태 집어 던지고 그냥 집 밖으로 나가 놀지도 않았다. 꼴 청에 있던 작두 날이 하루가 지나지 않았는데도 물기를 가득 먹어 녹이 탱탱 슬어 있다. 작두로 몽글게 썰어두고서 잠시 휴식 취할 요량으로 동네 한 바퀴 돌고 오는 게 일과였다.

 

 
   
  ^^^▲ 백아산 근처는 아직도 그 모양입니다. 나는 그게 더 좋습니다. 언젠가 빛을 볼 때가 있을 것입니다. 언제 한 번 같이 가실까요?
ⓒ 김규환^^^
 
 

흐린 오후 논두렁 베러 가기

흐린 오후였다. 비가 언제 내릴지 모르게 후텁지근한 날씨다. 장마가 끝났는지 30도가 넘는 날이 지속된다. 소나기가 내리려나 보다. 이리저리 돌며 풀을 벨 자리를 물색하느라 바쁘다.

여덟 살 이후로는 거추장스럽고 비 오는 날엔 빗물에 젖어 흐느적거리는 꼴 망태를 지고 나가지 않았다. 대신 지게에 싸리나무로 만든 발채를 얹어 나간다. 그래야 몇 깍지 걷어 차곡차곡 쌓으면 일도 수월하고 한번에 훨씬 많은 양을 베어 올 수 있어서 좋았다.

학교 가는 날에는 학교 마치고 한 번, 반공휴일인 토요일은 오후에 두 번, 일요일이나 여름 방학 때는 하루 세 번에서 네 번은 꼴을 베어와야 했다. 그 뿐이 아니다. 휴일에는 우리 논두렁을 죄다 베어야 한다. 그런 날은 아예 숫돌과 낫 하나를 더 챙겨간다. 가을걷이 할 때까지 이런 작업은 5회 정도 반복이 되었으니 여러 논을 돌아가며 베고 나면 찬바람이 불고 풀도 일시적으로 죽어 그 일을 잠시 멈출 뿐이다.

 

 
   
  ^^^▲ 벼가 자라고 있는 논두렁에 바랭이 보다 더 맛있는 풀이 자라고 있습니다. 풀이 꽃이 피면 소도 살이 찌겠지요.
ⓒ 김규환^^^
 
 

소 꼴 베는 초동

일단 논두렁에 도착하여서는 거센 바람에도 넘어지지 않게 지게를 바닥에 내려놓는다. 때로 작대기를 무른 땅에 잘못 받쳐 뒀다가는 지게가 엎어져 나중에 지고 오기 힘들 수도 있으니 아예 내려놓는 게 상책이다.

한쪽 끝으로 가서 한 발은 논두렁 언덕 아래 푹푹 빠지는 논에 담그고 나머지 한 발은 논두렁에 무릎 꿇는 자세를 취한다. 대강 쪼그리고 베었다가는 허벅지가 아파 오래 벨 수 없고 깔끔하게 벨 수 없는 까닭이다.

“스걱스걱” “쓱쓱” 날렵하고 잘 든 왜낫에 풀이 잘도 베어진다. 바랭이와 쑥, 긴 잔디가 섞여 한 줌 제대로 베어지면 한 깍지 꾹 눌러 논두렁 위에 올려놓는다. 서너 줌을 한 데 모아 나중에 걷기 편하게 하려면 뒤돌아 모으는 것도 감수한다.

다시 베기를 거듭하지만 논두렁 콩을 심어 놓았으므로 이제 막 보라색 꽃을 피운 콩 대 하나 잘릴까봐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다. 옹색하기 짝이 없다. 한 두렁을 한 시간 가량 베다보면 더디 나가는 진도에 졸음까지 온다.

이때 긴장감이 떨어져 까딱 잘못했다가는 손 베는 수가 많았다. 비탈진 산골짜기 층층으로 된 좁고 작은 다랑이 논배미는 200평 한 마지기도 안되었지만 논두렁 둘레는 100미터에 가까웠으니 오죽하겠는가.

 

 
   
  ^^^▲ 논두렁 콩 심는 이가 별로 없는 요즘 농촌입니다. 일손이 있어야 뭘 해보죠. 더군다나 요즘엔 휴경지가 얼마나 많습니까?
ⓒ 김규환^^^
 
 

손 베면 보드라운 쑥을 푹푹 찧어 붙여 주는 게 약

1/5 정도 남겨둔 끝이 얼마 남지 않고 날이 무뎌져 미끄러지기 쉬울 때다. 손은 낫이 잘든 초반보다 후반부에 더 많이 베는 게 일반적이다. 작은 돌멩이나 툭 불거진 나뭇가지에 낫이 튀어 오르면 곧잘 손이 베이고 만다.

풀을 잡았던 왼손 검지 손톱 바로 윗부분을 베였다.

“앗야!”
“에잇, 씨...”

검붉은 피가 흐르면서 싸한 슬픈 아픔이 아려왔다. 얼른 낫을 내려두고 꼬옥 감싸 잠시 지혈을 하느라 물기 많은 논두렁에 풀썩 주저앉았다. 2분쯤 지났을까. 살짝 떼어보니 두세 땀 정도 길이로 상처가 나있다. 깊게 베인 것 같지는 않았다.

빨갛게 피를 머금어 언제고 다시 흐를 상처를 베인 손 엄지와 가운뎃손가락으로만 잡고 오른손으로 보드라운 쑥을 한 줌 뜯는다. 쑥을 낫자루 꽁댕이로 돌 위에 올려 “팍팍”, “푹푹” 찧는다. 짙푸른 쑥물이 흘러나왔다.

찧기를 멈추고 쑥을 “턱” 갖다 댄다. 몹시 쓰라린 아픔이 몰려온다.

“으~”

신음에 가까운 소리도 잠시였다.

손에 쑥을 부여잡고 논물 대는 물꼬 입구로 비닐을 구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마침 너덜너덜 닳기 직전인 비닐이 수로에 걸려 있었다. 흙과 이끼를 헹구고 기다랗게 낫으로 잘라서 손에 칭칭 감아나갔다.

 

 
   
  ^^^▲ 쑥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독하지 않으려거든 야외에서 상처났을 때 쑥을 찧어 바르세요. 쑥은 대단한 존재입니다. 먹기도 하고 바르기도 하고 쓰임새가 참 많습니다. 단군신화에도 나오잖아요.
ⓒ 김규환^^^
 
 

끝까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내 손은 흉터 투성이

긴장이 풀어진 탓에 손을 베었지만 여기서 논두렁 베기를 멈출 수 없었다. 논가에 있는 샘물을 엎드려서 양껏 마시고 다시 끝까지 베어 나갔다. 잘 묶는다고 묶었던 비닐이 걸리적거려 거추장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이 정도 벤 것 가지고 집으로 그냥 갔다가는 어른들에게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르는 일이다. 오늘 하지 않으면 내일 또 다시 이곳으로 와야 하니 이왕 여기까지 한 것 마저 마치고 가는 게 맘이 편하기도 하다.

어스름해질 무렵 일이 끝났다. 황급히 논두렁을 뛰어다니며 베어둔 꼴을 지게에 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 검지 손가락을 잘 보십시오. 손가락이 시작되는 부분과 마디, 그리고 손톱 가까이 희미하게 흉이 보이십니까? 손이 쪼글쪼글해서 못 찾겠다구요? 손을 이쁘게 가꾸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 김규환^^^
 
 

그래서 내 왼손은 성한 데가 없다. 지금 확인 가능한 흉터만 50곳이 넘는다. 꼴 베는 일은 내가 고등학교 간 후로 끝이 났다.

요즘은 제초제를 뿌려서 풀이 발갛게 죽은 논두렁이 더 많다. 과연 몇 사람이나 풀을 베어 소를 먹일까? 이런 아비를 보고 아이들은 또 뭐라 할까? ‘왜 그렇게 부잡했느냐’고나 할 테지. 자랑스런 아버지의 훈장을 두고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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