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과수기와 시래기 된장국이 먹고 싶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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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과수기와 시래기 된장국이 먹고 싶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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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의 <세상사는 이야기>

1. "전도사님요, 나와보시래요. 과수기 끓여 왔어요."

여름 장마철 비가 주룩주룩 내리면 먹고 싶은 게 있습니다. 비 오는 날 녹두빈대떡이 먹고 싶기도 하지만, 진짜 먹고 싶은 건 ‘과수기’입니다. ‘과수기’를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과수기’는 강원도 정선 음식입니다.
 

 
   
  ^^^▲ 1987년 덕송교회 시절. 오른쪽 맨 아래가 지정자 성도이다.
ⓒ 박철^^^
 
 

일종의 국수입니다. 밀가루에 콩가루를 조금 섞어 물을 넣고 반죽을 해서 밀대로 얇게 밀어 칼로 썹니다. 여느 칼국수를 만드는 방법과 꼭 같습니다. 그 다음 이걸 잘 삶는데 끓는 물에 고추장을 풉니다. 다른 양념은 거의 하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맛이 있겠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강원도 정선에서는 일반 가정에서 흔히 먹는 음식입니다.

비가 오는 날, 동네 아낙들이 모여 정선 아라리를 부르기도 하고,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면서 과수기를 만듭니다. 그리고 동네 남정네들이 다 모여 뜨거운 과수기를 호호 불어가며 먹습니다. 고추장 국물이 걸쭉하고 구수해서 중국 집 짬뽕국물은 저리 가라입니다. 그 맛에 빠지면 맨 날 과수기 해먹자고 마누라에게 졸라댑니다.

18년 전 강원도 정선에서 나는 과수기 맛에 홀딱 빠졌습니다. 동네에서 무슨 큰 일이 있거나 부역하는 일이 있거나 하면, 의례히 계절을 가리지 않고 과수기를 끓여 놓습니다. 남정네들은 과수기를 안주 삼아 소주병을 비우기도 합니다.

내가 과수기를 잘 먹는다고 소문이 나서 교인들이 아무 때고 과수기를 만들어 잡수러 오라고 하기도 하고, 만들어 보내기도 합니다. 내가 섬기던 교회에서 지정자라는 아주머니가 계셨는데, 그 동네에서 제일 가난한 분이셨습니다. 남편은 장마철에 고기 잡으러 나갔다 물살에 떠내려가 시체도 못 건졌고, 중학교 다니는 아들 하나를 키우며 이런 저런 잡일을 하며 입에 풀칠하는 정도로 빈한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주머니가 이따금 과수기를 끓여 갖고 주택으로 옵니다. 그 아주머니 집에서 교회까지 300미터쯤 되는 거리고, 그것도 신작로가 아니고 논두렁길입니다. 과수기를 삶아 머리에 이고 오는 것입니다.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 얻어먹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제발 그만 갖고 오시라고 사정을 해도 지정자 아주머니는 막무가내로 과수기를 만들어 머리에 이고 오십니다.

그만큼 의지가지가 없는 그분에게 우리 내외가 유일한 말벗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번은 비가 질금질금 내리는데 지정자 아주머니가 과수기를 삶아 또 머리에 이고 오다 소낙비를 만났습니다. 다시 집으로 갈 수도 없고 미끄러운 논두렁길을 넘어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장대비를 뚫고 주택에 와서 나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전도사님요, 전도사님요, 나와보시래요. 과수기 끓여 왔어요!”

깜짝 놀라 나가 보았더니 쟁반을 뒤집어 씌웠던 신문지는 빗물에 다 찢어져 너덜거리고, 미끄러운 길을 넘어지지 않으려고 하다보니, 자주 기우뚱거려 과수기는 절반이 넘게 쏟아져서 지정자 아주머니 잔등에 국수 가락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 지정자 성도와 아들 전제우
ⓒ 박철^^^
 
 

갑자기 목에서 뜨거운 것이 왈칵 치밀어 올라왔습니다. 지정자 아주머니를 방으로 들어오시게 한 다음, 다 식은 과수기를 먹는데, 눈물 콧물이 쏟아져 과수기를 먹는 것인지 눈물 콧물을 먹는 것인지 모를 정도가 되었습니다.

시나브로 세월이 많이 지났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이미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래서 비가 오면 이따금 강원도 정선 과수기가 생각나곤 합니다.

2. "목사님, 고기반찬은 없지만 맛있게 잡수세유!"

남양에서 목회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성탄절을 앞두고 부흥회 대신 신앙수련회라는 이름으로 존경하는 이현주 목사님을 초청해서 2박3일 말씀을 들었습니다. 시간 시간 교우들이 귀한 말씀에 매료되어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현주 목사님은 아침밥은 안 드시고 점심, 저녁 하루 두 끼 식사를 하시는데 식사를 맡은 가정에서는 지극 정성으로 음식을 준비해서 대접하는 것이었습니다.

집집마다 빠지지 않고 고깃국에 불고기, 잡채 등 기름진 반찬이 상에 올랐습니다. 이현주 목사님은 고기를 안 드시는 것은 아니지만,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도 천천히 음식을 잡수시는데 밥 한 공기를 다 비우는 적이 없으셨습니다.

꼭 반 공기를 남기셨습니다. 소식(小食)을 하셨습니다. 식사를 대접하는 교우들 가정에서는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내가 대신 이현주 목사님 몫까지 곱빼기로 먹어야 했습니다.

마지막 날 오후시간이었습니다. 집회는 절정에 다 달아 모든 교우들이 은혜에 진수에 빠져들어 얼굴이 천사처럼 환하게 빛났습니다. 이제 마지막 점심밥을 대접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걱정이 되었습니다. 마지막 점심밥을 대접하기로 한 가정은, 70이 넘은 혼자 사시는 임봉순 할머니 집사님 가정이었습니다.

우리 교회에 제일 가난한 집이었습니다. 집도 방 한 칸이고, 어른이 서로 마주보고 네 명이 앉으면 딱 맞을 만큼 작았습니다. 주일낮 예배 시 광고시간에 강사 식사대접을 하실 분들은 자원해서 신청하라고 했더니, 주일 오후 임봉순 할머니가 주택으로 나를 찾아오셨습니다.

 

 
   
  ^^^▲ 1992년 장덕교회 교우들과 함께 겨울 신앙수련회를 마치고.
ⓒ 박철^^^
 
 

“목사님, 지가유.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 모르지만, 오늘날 까정 하느님 은혜로 살아왔시유. 그란디 한번도 주의 종님들 따뜻한 밥 한 그릇을 대접 못했어유. 그래서 내가 죽으면 그게 제일로 한이 될 것 같아 이번 집회에 강사 목사님과 우리 박 목사님 점심밥 한끼 대접하고 싶은디유. 이 할망구가 주책이지유. 내가 아까 교회에서 목사님 광고하실 때 창피해서 손을 못 들겠더라구유. 그래서 이렇게 찾아왔는디유. 목사님 제 청을 들어 주실라유?”

내가 임봉순 할머니 손을 붙잡고 ‘고맙다’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 날 점심식사를 대접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현주 목사님과 나와 아내 셋이 임봉순 할머니 댁을 방문했습니다. 군불을 얼마나 지폈는지 도저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담요를 깔고 앉았습니다.

임봉순 할머니 집사님이 음식을 차리기 시작하는데 한상 가득히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차려놓았습니다. 그릇도 거의 옛날 사기그릇이었고 반찬은 전부 나물 종류였습니다. 임봉순 할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지가유, 돈주고 산 건 하나도 없어유. 지가 작정하고 지난봄부터 준비한 나물이여유. 고기반찬은 없지만 맛있게 잡수세유.”

이현주 목사님이 감사기도를 하는데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이현주 목사님도 목이 메이는지 기도를 하시다 잠시 멈칫하셨습니다. 음식은 모두 정갈했습니다. 국은 시래기 된장국이었습니다. 이현주 목사님은 공기 밥을 국에 다 말더니 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그리고 반 공기를 더 달라고 하시곤 마저 다 잡수시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속으로 얼마나 감격하고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밥을 먹었습니다. 이현주 목사님이 ‘잘 먹었습니다’ 인사를 하자 임봉순 할머니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십니다. 임봉순 할머니 얼굴은 새색시 얼굴처럼 발그스름해졌습니다. 임봉순 할머니는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추운 겨울날에는 임봉순 할머니가 끓여준 시래기 된장국이 가끔 먹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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