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6월 12일자 사설 "'추모' 편승해 무슨 이익 챙기겠다는 건가" 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작년 촛불시위는 어린 학생과 주부들이 건강을 염려하는 순수한 동기에서 시작됐다. 그랬다가 진보연대·참여연대가 주도한 광우병대책회의가 출범하고, 민노총 전교조 공기업노조 등이 자기네 이익을 위해 가세하면서 시위가 변질되고 폭력화했다. - - 지금 야당과 좌파단체들이 미디어법, 4대강 살리기 같은 이슈를 놓고 유인물을 뿌리고 구호를 외쳐대는 것도 노 전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과는 아무 관련 없는 문제들이다. 고인의 죽음을 이용하겠다는 것일 뿐이다"
다른 구절에 대해선 동의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년 촛불시위는 어린 학생과 주부들이 건강을 염려하는 순수한 동기에서 시작됐다"는 구절을 보는 나는 어떤 감회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작년 5월 말과 6월 초, 촛불시위에 참여한 그 많은 청소년들을 보고 당혹한 나는 "배후가 있는 것 같지도 않다"는 내용의 글을 홈 페이지에 올렸다.
그랬더니 프리존 뉴스라는 데서 '보수 논객'인 내가 "촛불 시위에 배후가 없다"고 했고, "시위에 참여한 청소년들을 칭찬했다"는 내용으로 기사를 썼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그 기사를 본 한 지인(知人)이 고약한 기사가 났다고 알려 줘서 나중에 알았다. 그것도 잠깐 이었고, 다른 매체에서 내 글을 기사로 다루어서 별안간 엉뚱한 '유명세(稅)'를 치르게 되었다.
프리존 뉴스는 내가 '보수 논객' 임에도 그런 판단을 했다고 매도했는데, 다른 매체에서는 '보수 논객' 임에도 다른 주장을 했다고 썼다. 그런 소식이 아고라 등등으로 끝없이 번져 갔다. 정해진 '보수 프레임'을 따라야 하는 '보수 논객'이 사고를 쳤다는 것이다.
원래 '논객' 이란 타이틀은 일본 용어로, 문예춘추(誌)의 주간(主幹) 정도는 되어야 내걸 수 있는 명칭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1960-70년대는 조선일보 주필을 지낸 소설가 선우휘 선생, 동아일보 주필을 지낸 역사학자 천관우 선생을 '논객'으로 불렀다. ( 두분은 내가 학창시절에 존경했던 언론인이자 학자이자 문학가였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에선 '논객'은 정해진 '프레임'에 따라서 쓰고 말하는 사람을 지칭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 팽배한 '진영 논리'에 꼭 들어맞는 용어라고 하겠다.
'논객' 이라는 용어는 남이 불러주는 용어이지, 자기가 자기를 내세우는 명칭은 아니다. '논객' 이라는 용어가 듣기 좋은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도 있다.
2007년 봄, 지금은 법제처장을 하고 있는 이석연 변호사가 은행회관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었는데,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이 축사를 했다. 사회를 보던 이두아 변호사(현 한나라당 국회의원)가 류 전 주필을 '보수 논객'으로 소개를 했다. 그러자 류 전 주필은 축사를 시작하기 전에 정색을 하고, "나는 언론인이지 보수 논객이 아니다"고 소개를 정정해서 이 변호사가 머쓱해 졌다.
지난 세월이 주마등(走馬燈)처럼 느껴지는 시절이다.
뉴스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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