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는 전라도에서 건국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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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전라도에서 건국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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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6촌은 전라도에 있다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은 경주를 신라 천년의 왕도이며, 전라도를 백제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다. 즉 삼국시대 백제가 전라도(全羅道)를 지배하고 660년(의자왕 20)에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게 백제가 멸망하고 4년에 걸친 백제부흥운동의 실패 후 당(唐)나라의 관할 하에 있다가 신라에 귀속되었다. 라고 인식하고 있다.

신라 천년의 도읍지 서라벌은 경상북도 경주가 아니라, 서라벌(徐羅伐), 이름과 같이 넓은 벌판이 펼쳐진 전라북도 김제 평야로 밝혀졌다. 다만 식민사학자 이병도가 고의적으로 전라도를 백제의 영토로 지정 했을 뿐이다.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 이래로 식민사학자 이병도가 편찬한 국사에 대해 단 한 번의 비평과 검증도 없이 오늘날에 이르렀다. 본 고증(考證)은 우리나라 유일한 정통사서의 [삼국사기 본문]으로 신라의 6촌은 경상북도가 아니라 전라북도로 입증하였다. 식민사학자 이병도의 반민족적 범죄행각과 현행 국사의 왜곡, 변조된 실상을 누구나 두 눈으로 확인 할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로 신라 천년의 왕도(王都)는 경상북도 경주인가? 전라북도 김제인가?

신라 6촌은 전라도에 있었다

◈ 신라 시조 박혁거세 왕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1]

신라 시조는 혁거세 거서간(居西干)이다. 시조의 성(姓)은 박씨며 휘(諱)는 혁거세이다. 원년 갑자(BC:57년) 4월 병진일(일설은 정월 15일)날 13세에 즉위하여 호를 거서간(居西干)이라 하고, 국호를 서나벌(徐那伐)이라 하였다. 먼저 고조선 3한이 멸망에 이르자 수많은 유민(遺民)들이 산곡(山谷)에 나누어 六村(6촌)을 이루었다.

新羅始祖 赫居世王 [삼국유사 紀異 第1조]

1,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
촌장은 알평(閼平)이니 처음 표암봉에 내려왔으니 이가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의 조상이 되었다.(노례왕(弩禮王) 9년 부를 두어 급량부라 했다. 고려 태조 天福 5년 庚子에 中興部라 이름을 고쳤다. 波潛, 東山, 彼上의 東村이 여기에 속한다.)

2,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
촌장은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처음에 형산(兄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사량부(沙梁部) 정씨(鄭氏, 三國史記에는 崔氏라 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남산부(南山部)라 하여 구량벌(仇梁伐), 마등오(麻等烏), 도북(道北), 회덕(廻德) 등 남촌(南村)이 여기에 속한다.

3,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 ⇒ 전라북도 무주)
촌장은 구례마(俱禮馬)이다. 처음에 이산(伊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점량부(漸梁部),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長福部)라 하여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西村)이 여기에 속한다.

4, 취산진지촌(珍支村)
촌장은 지백호(智伯虎)로 처음 화산(花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본피부(本彼部) 최씨(崔氏, 三國史記에는 鄭氏라 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통선부(通仙部)라 한다. 시파(柴巴) 등 동남촌(東南村)이 여기에 속한다. 최치원(崔致遠)은 바로 본피부(本彼部) 사람이다. 지금은 황룡사(皇龍寺) 남쪽 미탄사(味呑寺) 남쪽에 옛 터가 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최후(崔侯)의 옛집임이 분명하다.

5,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 ⇒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촌장은 지타이다. 처음에 명활산(明活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한기부(漢岐部:한기부(韓岐部) 배씨(裴氏)조상이다. 지금은 가덕부(加德部)라 하는데 상서지(上西知), 하서지(下西知), 내아(乃兒) 등 동촌(東村)이 여기에 속한다.

6, 명활산고야촌(明活山高耶村)명활산(明活山)
촌장 지백호는 호진(虎珍)이다. 처음에 금강산(金剛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조상이다. 지금은 임천부(臨川部)라고 하는데 물이촌(勿伊村), 잉구미촌, 궐곡(闕谷) 등 동북촌(東北村)이 여기에 속한다.

➤ [동국여지승람] 전북 남원군 일원에서 함양군 마천면 가흥까지의 물굽이를 만수천(萬壽川), 가흥(또는 산내)에서 용류담까지를 임천(臨川), 용류담서 생초면(또는 화계면)가지 50리를 엄천(嚴川)또는 휴천계곡이라 한다.
▲ 상기 [삼국사기 신라 본기와 삼국유사]의 신라 6촌 지명(地名)에서 이미 신라는 건국 초기부터 전라도 지역은 신라 영토로 확인 할 수 있다.

➤ 신라 6촌의 위치

첫째,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 : 전라북도 남원시 교룡산성
둘째,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 :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공원 [突山公園]
셋째,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 :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넷째, 취산진지촌(嘴山珍支村) : 전북 장수군 장수읍의 영취산(靈鷲山)이다.
다섯,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 :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39번지 모악산이다.
여섯, 명활산고야촌(明活山高耶村) : 전라북도 김제시 익산이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 제1 시조 혁거세왕 편]에서 신라의 6촌은 경상북도가 아니라 전라북도로 뚜렷이 기록돼 있다. 그러나 조국이 일찍 멸망해야 자손만대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식민사학자 이병도가 말살, 왜곡, 변조하여 만들어 준 국사교육에 세뇌되어 참과 거짓의 역사를 분별하지 못하고, 경주(慶州)를 신라 천년의 왕도로 인식하고 “아.! 황성 옛터 서라벌 신라의 달밤 ” 을 노래하고 있다.

➤ 신라의 선도산(仙桃山)은 지리산이다
◈지리산(智異山)은 방장산(方丈山) 또는 '두류산(頭流山)' 이라고도 하며, 구역상으로 구례(求禮), 남원(南原), 산청(山淸), 하동(河東), 함양군(咸陽郡) 등 3개 道 5개 郡에 걸쳐있는 큰 산이다. 옛날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왕의 어머니인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가 거쳐하는 영산(靈山)으로 전한다.

옛날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왕과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 성제(聖帝)를 낳은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님이 오랜 세월로 머물러 계셨던 영산(靈山)으로 대한민족의 성지(聖地)입니다. 성모(聖母)는 하백(河伯)의 딸 유화이며 또한 이름은 사소(裟蘇)이다. 선도산 성모는 항상 신라국을 진호하시어 신라에는 신이(神異)한 일이 많이 일어났다. 그리고 하백은 풍농(豐農)과 자식을 점지해 주시는 삼신(三神)이기 때문에 "삼신 할매"라고 불리며 제사를 올리는 노고단(老姑壇)이 있다. 지리산은 천왕봉(天王峰)을 중심으로 반야봉(般若峰)과 노고단(老姑壇)이 3대 주봉을 이루고 있으며 1967년 12월 29일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되었다.

경주시의 충효동 서산의 선도산은 이병도가 조작한 가짜이고, 지리산이 곧 선도산이다. 그리고 지리산을 경계로 동쪽은 가야이고 서쪽은 신라의 국경이 된다. 따라서 신라의 경도 서라벌의 선도산을 서악(西岳), 서술(西術), 서연산(西鳶山), 서형산(西兄山)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 지리산의 여신 마야고(麻耶姑)의 전설
지리산(智異山)의 여신 마야고(麻耶姑)는 남신 반야(般若)를 사모하여, 옷 한 벌을 지어 만나서 전해 줄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기회가 잘 닿지 않아 마음을 태웠다. 달 밝은 어느 날 밤, 마야고는 지리산 중턱에 앉아 반야의 옷을 품에 안고 그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꿈에도 기다리던 반야가 자기 쪽으로 손짓하며 걸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마야고는 바람에 나부끼는 꽃잎의 물결 속으로 반야의 옷을 든 채 달려갔다.

그리고 정신없이 무엇을 잡을 듯이 허우적거렸는데, 이상하게도 잡히는 것이 없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리운 반야는 보이지 않고, 쇠별꽃(계아장(鷄兒腸)·번루(繁縷)·콩버무리라고도 한다)들만 달빛 아래서 바람에 흐느적거릴 뿐이었다. 쇠별꽃의 흐느적거림을 반야가 걸어오는 것으로 착각한 것을 알게 된 마야고는 너무나 실망하여 두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한없이 울었다.

그리고 정성껏 지어 두었던 반야의 옷도 갈기갈기 찢어서 숲 속 여기저기에 흩날려 버렸다. 그리고 매일 같이 얼굴을 비춰보던 산상의 연못도 신통력을 부려서 메워 없애버렸다. 마야고가 갈기갈기 찢어서 바람에 날려버린 반야의 옷은 소나무 가지에 흰 실오라기처럼 기생하기 때문에 풍란(風蘭)이라 부르며 특히 지리산의 풍란은 마야고의 전설로 인하여 '환란(幻蘭)'이라고 부른다.

신라왕도 진위(眞僞) 판별의 핵심
금성(金城), 부산성(富山城), 오봉산(五峰山), 주사산(朱砂山), 여근곡(女根谷), 옥문곡(玉門谷)

 
   
  ▲ 경상북도 경주시  
 
 
   
  ▲ 전라북도 김제시  
 
 
   
  ▲ 신라의 반월성  
 

➤ 신라 月城(월성)은 楊山(양산)에 있었다. 楊山(양산)은 신라 제 2왕궁이 있는 곳이며, 곧 전라북도 김제시(金堤市) 부량면(扶梁面) 포교리(浦橋里)와 월승리(月昇里)에 반월성(半月城)이 있다.

전라북도 남원은 신라의 남원경(南原京)이다.
교룡산(蛟龍山)은 전라북도 남원시내에서 서북쪽으로 산곡동과 대산면을 경계로하여 넓은 들판 위에 홀로 외롭게 서있는 산이다. 교룡산(蛟龍山)은 해발 518m이며 둘레가 ,120m이며, 험준한 산세에 따라 석축산성(石築山城)이다.

교룡산성은 동쪽 수구(水口)에 동문을 설치하고, 산세에 따라 양쪽의 능선을 감싸고 있는 모양이며 동문은 옹성(饔城)에 쌓여 있어 남쪽에서 성벽을 따라 들어가다가 다시 서쪽으로 ㄱ자형으로 꺾인 곳에 홍예문이 있다. 홍예문의 측면은 장대석을 3단으로 쌓고, 그 위의 액부(額部)는 아홉 개의 돌을 아취형으로 맞춘 것이다.

교룡산성 안에는 우물이 99개나 있었고, 계곡도 있어서 유사시에 성을 지키기에 좋은 산이었다. 북쪽은 밀덕봉(密德峰)· 복덕봉(福德峰)의 험준함이 있고 서쪽도 험준하여 남북이 서로 바라다보이지 않는다. 685년 신라 신문왕 5년에 용천사(龍泉寺)를 창건했다. 창건 당시 절 근처에 용천(龍泉)이라는 샘이 있어서 절 이름을 용천사(龍泉寺)라 했다고 전하고 있다.

지금은 사찰이름을 선국사로 바뀌었다고 한다. 선국사(善國寺)는 남원시 교룡산성 (월성)안에 있는 사찰로 신라 신문왕 5년에 창건되었다. 선국사는 신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호남 지역의 6개 군현에서 거둔 군량미(軍糧米)를 이 교룡산성에서 보관했다, 당시 용천사(선국사)는 교룡산성을 지키는 수비대의 본부 역할을 했던 곳이다. 전성기에는 300여 명의 스님이 머물 정도로 큰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교룡산(蛟龍山)의 유래[전북 남원시 산곡동 16-1]
[삼국사기] 서기전 69년 3월 초하루에 신라 6부 촌장들이 자제(子弟)를 거느리고 알천(閼川) 언덕 위에 모여 의논하기를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서 임금을 삼아,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해야 옳지 않겠는가" 이에 남산에 올라 바라보니 양산(楊山:교룡성) 밑에 나정(蘿井)이라는 우물가에 번쩍이는 이상한 기운이 땅에 닿아 비치고 있다. 흰말 한 마리가 땅에 굻어 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기에 찾아가 보았더니 자줏빛 알 한 개(혹 푸른 빛)가 있었다. 말은 사람을 보더니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알을 깨고 어린 사내아이를 얻으니,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그 아이를 동천(東泉; 동천사(東泉寺)는 사뇌야詞腦野 북쪽에 있다)에 목욕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따라서 춤을 췄다. 이내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해졌다. 그 아이를 혁거세 왕이라 이름 하였다.

[삼국유사] 신라 사량리(沙梁里)에 알영정(閼英井; 아리영정娥利英井)이라는 샘이 있었다. 계룡(鷄龍)이 나타나 왼쪽 갈비에서 계집애를 낳았다(혹은 용龍이 나타났다가 죽었는데 그 배를 가르고 계집애를 얻었다고 했다). 얼굴 모습이 매우 고왔으나 입술이 마치 닭부리와 같았다. 이에 월성(月城) 북쪽에 있는 용천(龍泉)에 목욕을 시켰더니 그 부리가 떨어졌기 때문에 그 내를 발천(撥川)이라고 한다.

◆ 일제와 이병도는 삼국사기의 용천사(龍泉寺)는 선국사(善國寺)로 또한 삼국유사는 용천(龍泉)을 동천(東泉)으로 또한 용천사(龍泉寺)는 동천사(東泉寺)로 바꾸어 버렸다. 신라 왕도로 들통 날 것을 염려하여 이름을 바꾸었던 것이다. 본래 전라북도의 신라 왕도를 경상북도 경주로 철저히 얽어 맞추었기 때문에 믿기 어렵게 된 것이다. 여기에 허실이 있다.

 
   
  ▲ 교룡산성 동문의 홍예문 [남원시  
 
 
   
  ▲ 용천사((龍泉寺),선국사) 경내  
 

◆ 신라 신문왕 5년(685)에 전라북도 남원소경(南原小京)의 교룡산성(蛟龍山城)에 용천(龍泉)이라는 샘이 있어 사찰 이름을 용천사(龍泉寺)라 했다. 전라북도 남원의 교룡산(蛟龍山)은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왕과 왕비 알영(閼英)의 두 성인(聖人)이 탄강하신 성지(聖地)로 밝혀다.

➤ 전라도 운봉현에 신라 혁거세 왕후 경덕왕 이름이 있다.

➤ 전라도/운봉현(雲峯縣)[신증동국여지승람 제 39권]운봉현은 동으로 경상도 함양군(咸陽郡) 경계까지 20리, 서쪽으로 남원부(南原府) 경계까지 7리, 남으로 남원부 경계까지 62리, 북으로 남원부 경계까지 9리, 경도 서울과의 거리가 6백 97리에 있다.

【건치연혁】본래 신라의 무산현(毋山縣)이다. 일명 경덕(景德). 아영성(阿英城)ㆍ아막성(阿莫城)이라고도 한다. 뒤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천령군(天嶺郡)에 예속시켰다. 고려 때에는 남원부에 속하였고, 공양왕(恭讓王) 3년에는 아용곡 권농병마사(阿容谷勸農兵馬使)를 겸하게 되었다. 본조 태조(太祖) 원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뒤에 준례에 따라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군명】 모산(毋山)ㆍ아영(阿英:혁거세 왕후이름)ㆍ아막(阿莫)ㆍ운성(雲城)ㆍ경덕(景德:신라왕명). 상기 [신증동국여지승람 제 39권]의【건치연혁】과【군명】은 본래부터 신라의 영토로 확인 했을 것이다. 전라도는 본래 신라의 영토이었으나 왜곡된 국사교육에 세뇌되어 전라도를 백제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을 뿐이다.

남원시는 신라의 남원경(南原京)이다.

전라북도 남원시의 연혁
BC 195년 경 기준왕이 건국한 마한시대에 별궁 이름이 달궁(月城宮)이다.
서기 8년 삼국시대는 신라 [제 2왕궁의 월성(月城)이다. 즉 신라 제 4대 탈해왕이 楊山(양산) 밑에 살고 있는 瓠公宅(호공댁)을 바라보니 좋은 吉地(길지) 땅이므로 계략으로 그 집을 빼앗아 살았다. 그 지역이 뒤에 신라의 月城(월성)이 되었다.는 유래가 전하고 있다. 신라(진한)는 가야(변한)의 국경 지대가 되므로 정령치(鄭嶺峙)와 황령치(黃嶺雉)에 성을 쌓아 침략을 막았다 한다.

삼국사기지리지(三國史記地理志)에 지금 남원시는 삼국시대 초부터 본래 백제와 신라 두 나라 땅으로 나뉘어 있었다. 즉 '한쪽은 신라의 모산현(母山縣)이고 다른 한쪽은 백제의 고룡군(古龍郡)과 거사물현(居斯勿縣)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했다'는 사실이 아니고 거짓이다. 즉 동면(東面)은 삼한시대 기준왕의 마한이 멸망한 후 신라에 속하였고 신라 경덕왕 15년(784) 까지 모산현(母山縣)에 속했기 때문이다.

1, 남원시 산내면은 신라 모산현(母山縣)이다.산내면(山內面)은 고조선 말기 삼한시대는 기준왕(箕準王)의 마한(馬韓)에 속했고, 삼국시대 신라 모산현(母山縣 :운봉현)에 속해 있었으며, 서기 8년 신라 [제 2왕궁의 월성(月城)이다. 828년 신라 흥덕왕(興德王)때 창건한 실상사(實相寺)는 보물과 국보 13점을 보유하고 있는 유명한 사찰이다.

940년(고려 태조 23)에는 운봉현(雲峰縣) 산내방(山內坊)으로 개칭 되었다. 고려 태조 23년(940)에는 역원(驛院)이 설치되어 남원부(南原府) 운봉현(雲峰縣) 인월역(引月驛)이라 하였다. 1413년(조선태종 13)에는 남원도호부 운봉면 산내방(山內坊)이라 칭하였으며,1895년(고종 32) 운봉현이 군(郡)으로 승격되고,1897년에 방(坊)이 면(面)으로 개칭되면서 운봉군 산내면이 되었다.

덕동(德洞), 반선(半仙), 미동(米洞), 와운(臥雲), 하부운(下浮雲), 부운(浮雲), 개선(開仙), 횡치(橫峙), 내령(內靈), 외령(外靈), 팔랑(八郞), 삼화(三化), 입석(立石), 실상(實相), 원천(元泉), 장항(獐項), 유평(柳坪), 대전(大田), 묘동(猫洞), 대정(大井), 매계(梅溪), 중기(中基), 백일(白日), 동수(東水), 서수(西水), 저전(楮田), 하왕(下黃), 상황(上黃), 중황(中黃) 등 29개 리(里)를 관할하였다.

1914년(순종 8) 행정구역통폐합으로 운봉군이 면(面)으로 되어 남원군으로 합병되면서 남원군 산내면이 되었다. 이때 남원군 상원천면(上元泉面 : 현 주천면) 달궁리(達宮里:월성(月城)와 경남 함양군 마천면 도천리(都川里) 일부가 편입되어 덕동(德洞), 부운(浮雲), 내령(內靈), 입석(立石), 장항(獐項), 대정(大井), 백일(白日), 중황(中黃) 등으로 개편되었고 면소재지는 백일리였다.

2, 주천면은 신라 6촌의 명활산(明活山:교룡산) 고야촌(高耶村)이다.하원천방(下元川坊),상원천방(상元川坊),주촌방(朱村坊) 등 3개의 방(坊)이 있었다. 하원천면(下元川面)이 주천면의 중심이다. 당시 상원천면은 내기(內基), 고촌(高村:신라 6촌 중 고야촌), 회덕(會德:삼국유사廻德),노치(蘆峙) 등4개 리(里)가 있다,

하원천면(下元川面)은 신촌(新村),용담(龍潭),호곡(虎谷), 안곡(安谷), 신기(新基), 호정(湖亭), 외평(外坪),무수(無愁), 외룡(外龍), 내룡(內龍), 내촌(內村) 등 11개 리(里)가 있다. 주촌면은 비안(飛雁), 양팔(陽八), 술산(述山:서술산 선도산), 어은(漁隱), 세현(細峴),함파(含波), 상주(上周), 하주(下周), 덕촌(德村), 배촌(盃村), 동송(東松), 서송(西松), 웅치(熊峙), 내송(內松), 외송(外松), 은행(銀杏), 내촌(內村) 등 17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하원천면과 상원천면, 주촌면등 3개 면과 장흥면(長興面)의 천거(川渠),상삽(上揷), 애현(艾峴), 남북교리(南北敎里) 일부와 만덕면(萬德面)의 죽우리(竹遇里) 일부를 병합하여 주천면(朱川面)이라 하였다. 노암(鷺岩), 어현(漁峴), 주천(周川),배덕(盃德), 송치(松峙), 은송(銀松), 고기(高基), 덕치(德峙), 신촌(新村), 용담(龍潭), 호기(虎基), 장안(長安), 용궁(龍宮), 호경(湖景) 등 14개 리(里)로 개편되고, 장안리에 면사무소가 설치되었다. 1956년 노암리가 남원읍으로, 1983년 신촌리와 어현리가 남원시로 편입되었다.

3, 신라의 옛 남산 성삼재후 삼한 시대 기준왕이 건국한 마한의 제6대 효왕의 군대가 진한왕(신라왕)의 침략을 받고 이 전란을 피하여 지리산 심산 유곡으로 찾아들어 달궁계곡에 왕궁(王宮)을 세우고 살았던 곳이다. 마한 6대 효왕(BC113~73년)이 피난할 때, 북쪽 능선에 8명의 장군을 배치하여 지키게 하였으므로 팔랑재, 동쪽은 황 장군이 맡아 지키게 하였으므로 황영재, 그리고 남쪽은 가장 중요한 요지이므로 성이 다른 3명의 장군을 배치하여 방어케 하였으므로 성삼재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 전라도 운봉현에 신라 혁거세 왕후 이름이 있다.
4, 운봉현(雲峯縣)운봉현은 본래 신라의 모산현(母山縣)이며 아영성(阿英城:혁거세 왕비 이름), 혹은 아막성(阿莫城)이라 하였는데, 신라 경덕왕이 운봉현으로 고쳤다, 고려 때 남원부(南原府)의 임내(任內)로 삼았다가, 본조 태조(太祖) 원년 임신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옛 속부곡(屬部曲)이 1이니 아요곡(阿要谷)이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경상도 함양군(咸陽郡)에 이르고 20리 서·남·북쪽으로 남원에 이르고, 남쪽 10리, 서쪽과 북쪽이 각각 7리이다. 【원전】 5 집 662 면

아영면은 1910년까지 운봉군(雲峰郡) 관할의 북상 북하면 지역이었다. 신라 경덕왕 16년(757)까지는 모산현(母山縣)에 속해 천령군(天嶺郡:지금의 경남 함양군)에 예속되었다가 모산현이 운봉현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태조 23년(940)에 운봉현이 남원부(南原府)의 관할이 되어 남원에 예속되어 아용곡(阿容谷), 또는 아영(阿英), 아막(阿莫)이라 하였는데 이 지역에는 북상면(北上面)과 북하면(北下面)이 있었다.

1895년 운봉현이 군(郡)으로 승격되기 전부터 아영면은 운봉현 내 함양군 백전면-매치(정치)-일대저수지-복성치-장수군 번암면 논곡리로 통하는 길을 경계로 북쪽은 상면, 남쪽은 북하면 지역이었으며 북상면의 소재지는 갈계리(葛溪里), 북하면의 소재지는 일대리(日臺里)에 있었다.

그 후 1910년에 북상면의 아곡(阿谷), 점촌(店村), 당동(唐洞), 봉대(奉大), 임곡(林谷), 갈계(葛溪), 인풍(引風), 매산(梅山), 고인(高印), 청계(淸溪), 월산(月山), 구지(舊至), 신지(新至) 등 13개 리(里)와 북하면의 일대(日臺), 구상(九相), 두락(斗落), 성리(城里), 송리(宋里), 부동(釜洞), 의지(蟻池), 월성(月城), 이동(梨洞) 등 9개 리(里)가 병합되어 아영면이 되었다.

4, 구례현(求禮縣)은 신라 6촌장 구례마(俱禮馬)가 있었다.본래 신라의 구차례현(仇次禮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이 구례현으로 고쳐서 곡성군(谷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초에 남원부(南原府)의 임내(任內)를 삼았다가, 인종(仁宗) 21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본조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예(例)에 의하여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별호는 봉성(鳳城)이다.

옛 남전(南田)·방광(放光) 두 현이 소속이고, 부곡(部曲)이 2이니, 사등촌(沙等村)【혹은 사도(沙圖)라고 한다.】·유곡(楡谷)이다. 사방 경계는 동쪽은 경상도 진주(晉州)에 이르고 20리, 남쪽으로 순천(順天)에 이르고 9리 서·북쪽으로 남원(南原)에 이르는데, 서쪽이 39리, 북쪽이 10리이다.[중략] 역(驛)이 1이니, 잔수(潺水)역이며,, 요해(要害)가 2이며 잔수진(潺水津)·미초율현(未草栗峴)이다.【모두 구례(求禮)에서 남쪽으로 순천(順天)으로 가는 지로(指路)이다.】월경(越境)은 경상도 진주(晉州) 임내(任內)의 화개(花開)의 땅이 곤남(昆南)·하동(河東)·악양(岳陽)으로 1백 50여 리를 넘어서 현의 동쪽에 들어와 있다.【원전】5 집 662 면

5, 곡성현(谷城縣)본래 신라(백제)의 욕내군(欲乃郡)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곡성군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 승평(昇平)의 임내로 하였다가, 명종(明宗) 2년 임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별호는 욕천(浴川)이라 한다.

옛 부곡(部曲)이 1이니, 율곡(栗谷)이다. 진산(鎭山)은 동락(動樂)이다.【현의 서북쪽에 있다.】순자진(?子津)은【곡성현 북쪽에 있다.】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구례(求禮)에 이르고 7리, 서쪽으로 옥과(玉果)에 이르고, 20리, 남쪽으로 순천(順川)에 이르고, 50리, 북쪽으로 남원(南原)에 이르기까지 7리이다. 도자기를 만드는 곳이 1이요,【현의 남쪽 우곡(牛谷)에 있었다. 곡성현의 서쪽 묘현(猫峴)에 있는데, 모두 하품이다.】역(驛)이 1이니, 지신(知申)이다.【원전】5 집 663 면

6, 광양현(光陽縣)본래 신라(백제)의 마로현(馬老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이 희양현(晞陽縣)으로 고쳐서 순천(順天)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에서 광양현으로 고쳤고, 본조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감무(監務)를 고쳐 현감(縣監)으로 하였다.

옛 속향(屬鄕)이 2이니, 본정(本井)·삼일(三日)이요, 소(所)가 12이니, 문현(蚊峴)·노을도(奴乙道)·골약(骨若)·거의포(車衣浦)·구량포(仇良浦)·공촌(孔村)·다사천(多沙川)·대곡(大谷)·실점(實岾)·오정(烏頂)·지암천(知巖川)·웅음(熊陰)이요,4,부곡(部曲)은 아마대(阿麻代)·사어곡(沙於谷)·아민(阿民)·율촌(栗村)이 있다.

진산(鎭山)은 백계(白鷄)이다.【현의 북쪽에 있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경상도 진주(晉州)에 이르기 43리, 서쪽으로 순천(順天)에 이르기 9리, 남쪽으로 바다에 이르기 5리, 북쪽으로 경상도 진주에 이르고 20리이다.[중략]

읍 석성(邑石城)【둘레가 3백 62보(步) 남짓하다.】 역(驛)이 2이니, 익신(益申)·섬거(蟾居)요, 요해(要害)가 1이니, 섬진(蟾津)이요,【현의 동쪽에서 경상도 진주(晉州)로 가는 지로(指路)이다.】 봉화가 1곳이니, 건대산(件臺山)이요,【현의 동쪽에 있는데, 남쪽으로 순천(順天) 진례(進禮)에 응한다.】 해도(海島)가 1이니, 태안도(泰安島)이다.【원전】5 집 663 면]

다음은 [신라는 전라도에서 건국했다] 제 2편은 [신라 왕성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서]가 연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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