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낮도깨비처럼 보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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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낮도깨비처럼 보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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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추억 속의 그 이름>혹부리 아지메

 
   
  ^^^▲ 북채밭으로 가는 길과 닮은 비음산 다랑이논과 밭들
ⓒ 이종찬^^^
 
 

"우와! 백사다, 백사."
"이야~ 눈맨치로(눈처럼) 하얀 저 뱀을 오데서 잡았을꼬?"
"와? 니도 잡으로 갈라꼬?"
"그라다가 물리모 죽을라꼬?"
"봉림삣쭉 말로는 근치(용지봉) 방구(바위) 틈에서 잡았다 카더라."

그래. 초복을 지난 감들이 여기 저기 떨어져 뒹굴던 그 북채밭. 그 북채밭은 우리 마을 서쪽을 가로지르는 앞산가새 허리춤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지. 우리들이 중학교 등하교길에 반드시 지나쳐야만 했던 그 북채밭. 떨어진 감이 홍시가 되어 물컹거려도 봉림삣쭉이 무서워 주워 먹을 엄두도 못냈던 그 북채밭, 그 떨감.

지난 번에 한번 얘기했었지? 감나무가 특히 많았던 그 북채밭을 지키는 사람이 봉림삣쭉이었다고. 그리고 늘 턱에 찬박(박)만한 큰 혹을 매달고 다니던 혹부리 아지메. 그래. 박처럼 둥그렇게 매달린 그 혹이 너무나 무거워 누런 삼베쪼가리로 혹을 묶어, 머리에 칭칭 동여매고 다녔던 그 혹부리 아지메. 그 아지메는 봉림삣쭉의 부인이었지.

그래. 봉림삣쭉과 혹부리 아지메가 살고 있었던 그 오막살이는 반쯤 기울어 있었어. 또한 우리들은 누구나 그 오막살이 앞을 지나쳐야만 중학교로 갈 수가 있었고. 하지만 우리들은 그 오막살이 앞을 지나치기를 몹시 무서워했어. 왜냐구? 그 오막살이 앞에는 수많은 뱀들이 갈라진 긴 혓바닥을 수시로 들락거리고 있었거든.

뭐라구? 그렇다면 봉림삣쭉과 혹부리 아지메는 어떻게 살았냐구? 그게 아니라, 그 오막살이 앞에는 뱀을 가둔 철망이 여러 개 놓여 있었거든. 마치 벌통처럼 말이야. 수많은 뱀들은 가는 그물처럼 촘촘하게 둘러쳐진 그 철망 속에서 마구 우글거리고 있었지.

그 뱀들 중에는 몸뚱이가 하얀 뱀도 있었어. 우리는 목에 까만 띠가 그어진 그 뱀을 백사라고 불렀어. 그럼 그 분들이 뱀장수를 했냐고? 그래. 봉림삣쭉과 혹부리 아지메는 감나무 과수원을 지키면서도 뱀장수를 했어. 그 당시에만 해도 산과 들판에는 뱀들이 참으로 많았거든. 하지만 그 오막살이에 있는 뱀들은 우리들이 흔히 보는 능구렁이나 물뱀이 아니었어.

꼬리가 뭉텅한 살모사에서부터 몸집이 아주 가느다란 실뱀도 있었어. 또 온몸에 꽃무늬가 새겨진 뱀에서부터 어른 팔뚝보다 더 굵은 뱀들도 있었지. 온몸이 새까만 흑사도 가끔 보였고. 그래서 우리들은 그 오막살이 앞을 지날 때마다 징그러워하면서도 철망 속을 힐끔힐끔 쳐다보곤 했지.

"뱀이 그렇게도 징그럽니?"
"네에에?"
"너거들 배 고푸제? 아나! 삶은 강냉이다."
"아, 아입니더. 됐십니더."

그날은 봉림삣죽과 혹부리 아지메가 보이지 않았어. 그래서 우리들은 오랜만에 뱀들을 실컷 구경할 수가 있었지. 누구나 입을 반쯤 헤 벌린 채 멀찌감치 떨어져서 말이야. 그리고 긴 나뭇가지로 철망 속의 뱀들을 쿡쿡 찔러보기도 했어. 다른 한편으로는 여학생들이 오면 놀려줄 생각도 하면서 말이야.

그런데 우리들 등 뒤에서 불쑥 혹부리 아지메가 나타난 거야. 그리고 기겁을 하는 우리들을 바라보며 싱그시 웃던 그 혹부리 아지메가 삶은 옥수수를 내미는 게 아니겠어. 마치 우리들 이빨처럼 노오란 알멩이가 촘촘하게 박힌 그 옥수수는 보기만 해도 절로 침이 넘어갔어.

하지만 아무도 혹부리 아지메가 내미는 그 옥수수를 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어. 왜냐하면 그 옥수수를 내미는 혹부리 아지메의 손이 마치 뱀 허물처럼 보였거든. 근데, 그때 혹부리 아지메가 우리들 마음을 훤히 궤뚫고 있다는 것처럼 이렇게 이야기 했어. 이 세상에서 뱀이 가장 깨끗한 동물이라고.

그러나 아무도 혹부리 아지메의 그 말을 믿지 않았어. 금방 찐 것처럼 달콤한 옥수수 내음이 코끝에서 감돌 때마다 우리들 자신도 모르게 침이 목구녕으로 꼴깍, 하고 넘어갔지만 말이야. 그때 혹부리 아지메가 다시 턱에 매달린 혹을 한번 치켜들어 올렸어. 몹시 불편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너거들 내가 낮도깨비처럼 보이제? 그라고 더럽제? 턱쪼가리에 찬박 만한 혹도 달고 있고, 징그러운 뱀장사나 한깨네."
"아... 아입니더."
"그라모 와 내가 주는 강냉이로 안 받아 묵노?"
"...주...주이소."
"가다가 버릴라카모 안 줄끼고."
"무... 묵을낍니더."

그날, 우리들은 엉겁결에 혹부리 아지메로부터 노오란 옥수수를 하나씩 받아 들었어. 하지만 아무도 옥수수에 입을 대지 않았어. 왜냐하면 옥수수의 희부연 껍질이 자꾸만 뱀 허물 같다는 그런 느낌이 들었거든. 그렇다고 옥수수를 버릴 수도 없었어. 혹부리 아지메와 굳게 약속까지 했으니까.

"야, 고마 묵자. 아까 혹부리 아지메가 뱀이 사람보다 더 깨끗한 동물이라 안 카더나?"
"그래. 묵고 죽은 귀신은 색깔도 좋다 카던데. 이거 묵고 오데 죽기야 하것나."
"그래도..."
"그라모 우리 도랑물에 깨끗히 씻어가 묵자."

그래. 도랑물에 깨끗히 씻은 그 옥수수는 정말 맛 있었어. 하지만 뱀 허물과 혹부리 아지메의 그 커다란 혹이 떠오를 때마다 조금 메스꺼웠어. 혹부리 아지메는 그 뒤로도 가끔 우리들에게 삶은 감자 같은 것을 주기도 했어. 근데 그때마다 우리들은 도랑물에 깨끗히 헹군 뒤에 먹었어.

"야~야이~ 이거 참기름하고 들깨기름이다. 퍼뜩 혹부리 아지메한테 갖다 주고, 강냉이 하고 바꿔 온나. 감자가 있으모 누구메(너희 엄마)가 감자도 쪼매 도라 카더라 카고.(달라 하더라 전하고)"
"예에에~ 그라모 지금까지 집에서 묵은 강냉이하고 감자가 혹부리 아지메한테서 가꼬 온깁니꺼?"

그래. 그때서야 나는 알았어. 동네에서 얄궂기로 소문 난 봉림삣쭉과 낮도깨비 같았던 혹부리 아지메도 엄연한 우리 마을의 어르신들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때 나는 사람에게는 귀천이 없느니라, 고 수업시간에 누누이 말씀하시던 한문 선생님의 참 뜻이 무엇인가를 처음으로 깨달았지.

그래. 지금도 후회가 돼. 그리고 눈 앞에 생생하게 가물거려. 우리들이 그 옥수수를 벌레 만지듯이 억지로 받았을 때, 쓸쓸하게 짓던 혹부리 아지메의 그 슬픈 표정이. 그리고 박 만한 큰 혹을 치켜올리며 내가 더럽제, 라며 눈물을 글썽, 하던 혹부리 아지메의 그 젖은 눈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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