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부산 첨사 정발은 해상순시와 군사훈련을 목적으로 절영도에 사냥을 하고 있던 중 왜선들이 몰려드는 것을 보고 급히 돌아오는데 왜병들이 첨사를 뒤쫓아 상륙하여 부산진성에서 첫 전투가 시작되었다.
전국시대의 전통적 전술전법이 적진이 갖추어지기 전 속전이 성공의 첩경이라고 인식한 왜병들을 부산 첨사 정발이 진영을 갖추지 않았다고 보고 그날 밤 바로 전투가 개시 됐다는 것이다.
임진왜란후인 1640년에 신경(申炅)이 쓴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에 의하면 당시 부산 첨사가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어 죽도록 싸우는데 남문위에서 감색 옷을 입은 무사가 나타나 활을 당기어 적을 쏠 적마다 화살에 맞아 죽은 왜인이 수없이 많았다.
이 무사의 분전으로 그날 성이 함락되지 않았을 뻔했으나 부산진성 북쪽 모퉁이에 엉성한 담장이 있어 왜적이 그리로 성을 넘어 들어와 성을 점령했다고 했다.
정발장군은 왜군의 침입을 예상하고 대비했으므로 이 전투는 용전으로 기록 되고 있다.
남문에서 싸운 푸른 옷의 조선 측 무사를 흔히 정발장군으로 보지만 재조번방지의 저자 신경은 검은 옷의 무사를 정발장군이 아닌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미루어 볼 때 왜인의 침공을 알아 챈 부산진첨사 정발장군은 해상에서 저지하기에는 이미 늦은 상태로 보고 부산진으로 배를 돌린 후에 경상좌수영 본영에 있던 경상좌수사 박홍에게 적전 상황보고와 구원군을 요청했을 것이다.
그래서 구원군을 맞을 북쪽 성체에는 방어체제를 다소 소홀했을 수도 있었다고 보여 지며, 당시 1차로 침략하여 들어온 소서행장의 군대는 1만 3천명에 불과 했고 그중에 실제 전투병은 약 5천명 정도였다고 한다.
만약 조선수군의 최전선 지역사령관인 경상좌수사 박홍이 이 사실을 보고 받고 겁에 질려 도망칠 것이 아니라 군사를 이끌고 분산진성을 사수하였다면 연이은 다대포 전투에서의 패전, 동래성의 함락 등으로 이어 지지 않았을 것이고, 임진왜란 7년 전쟁이 어떠한 상황으로 전개되었을지도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에 나오는 남문 위에서 감색 옷을 입은 무사가 누구인지에 대해 찾아보려고 했지만 어느 곳을 펼쳐 봐도 밝혀진 자료가 없어 아쉽다 하겠다.
이렇게 무명의 전사로 400년의 역사는 흘러가고 이 땅에 역사가 생긴 이래 수없이 많은 외침을 맞아 이름 없이 국토를 지키다 가신 분들이 그 얼마나 될까를 상상하여 오히려 그러한 선현들께 추모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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