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과 서동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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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과 서동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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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는 설화일 뿐!

국경을 초월한 고대의 사랑이야기가 요즘 화제다.

논란의 쟁점은 누가 서동요의 진짜 주인공인가 하는 문제다. 그 실마리를 풀 수 있는 획기적인 발견이 익산 미륵사지 석탑 해체 보수과정에서 사찰 및 석탑 창건 내력을 담은 금판(金版)에서 나왔다. 그에 따르면 미륵사는 “좌평 사택적덕의 딸인 무왕의 왕후가 기해년(己亥年-639년)에 지은 것”이라 기록되어있고, 문화재청도 이 사실을 발표했다.

우선 일연스님이 지은 <삼국유사>에 향가로 기록한 서동요부터 보자!

- 선화공주님은 / 남몰래 얼려두고 / 맛둥서방님을 / 밤에 몰래 품으러 가네. (善化公主主隱 / 他密只嫁良置古 / 薯童房之 / 夜矣卯乙抱遺去如) -

이처럼 ‘서동요’에는 1400년 전 원수처럼 으르렁거리며 전쟁으로 세월을 보내던 신라와 백제 간 국경을 초월한 왕자와 공주의 진한 사랑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러나 미륵사지 석탑에서 사실적 내용을 담은 금석문이 발견됨으로써 고대 국경을 뛰어넘은 숭고한 사랑의 연가인 백제왕자 서동과 신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는 하루아침에 허구가 되어버렸다. 이로써 드라마까지 방영되었던 기존의 무왕관련 서동요 전설이 성립되지 않을 수 있다는 근거를 제공하게 됐다.

이와 관련 사재동 충남대 명예교수(백제불교문화대학장)는 ‘미륵사지 석탑 출토 사리봉안기 기해년(己亥年)의 의미’라는 논문에서 서동요의 주인공이 무왕이 아니라 무령왕이라고 여전히 주장하고 있다. 매우 의미 있는 일 같으나 당시 상황을 하나하나 대입하여 검증할 필요성이 있어 반론으로 필자의 견해를 밝힌다.

사 교수는 서동요의 주인공이 무왕이 아니라 무령왕이라는 근거로 세 가지를 들고 있다. 그 첫째는 <삼국유사> 원본에 적힌 무강왕(武康王)의 ‘강(康:편안할강)’이 무령왕의 ‘녕(寧:편안할녕) 자와 통하는 글자라 하여 서동요의 주인공을 무왕이 아니라 무령왕이라는 것이요, 때문에 “사리봉안기에 나오는 기해년(己亥年)은 무왕 40년인 639년이 아니라 이보다 120년 앞선 무령왕 18년인 519년”이며, “<삼국유사> ‘무왕’ 조에 미륵사 창건전설과 서동설화가 기록되어 있어 ‘무왕 창건설’ 중심으로 기해년을 해석하다보니 639년으로 단정 짓는 오류를 범했다.”는 밝혔다. 사교수의 이러한 주장은 이미 1971년에 발표한 ‘서동설화연구’라는 논문과 2006년에 낸 ‘백제 무령대왕과 불교문화사’에서도 확인된다. 자신의 학설이 무너짐에 보강 차원에서 또 다시 논문을 발표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로 국력과 재정이 어려운 무왕 대에 백제가람사에서 국가가 주체가 되어 대규모 사찰을 지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때문에 서동요 주인공은 무왕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 사 교수는 “무왕은 신라와의 잦은 싸움과 음주가무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고 국력과 재정을 탕진해 부왕이 창건하기 시작한 왕흥사를 35년 만에 겨우 완성했을 정도였는데 거대 규모의 사찰을 짓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정 지었다.

세 번째 이유로 사 교수는 백제불교문화사의 흐름을 분석해 볼 때 백제의 국력과 비례해 무령왕 대에 불교가 가장 번성하다가 무왕 대에는 쇠퇴일로를 밟았다는 것이다. 대규모 사찰을 짓기 위해서는 왕과 왕비의 절대적 지원이 필요할 것이요, “삼국사기를 봐도 무령왕은 인자 관후하고 백성을 귀하게 여기는 보살상을 연상케 그려진 반면 무왕은 무인다운 기색은 있으나 자비 신심의 면모는 없게 나온다.”며 미륵사 무령왕 창건설을 강력 주장하고 있다.

이에 필자의 반론을 제기한다.

첫째 주장인 무강왕 = 무령왕이라는 설에 관해서다. 이는 언어학적 접근으로 편안할강(康) 자가 편안할녕(寧) 자와 통하는 글자임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무령왕을 사마왕(斯麻[or 摩]王), 호령왕(虎寧王)이라 했어도 <삼국유사>고본 이외에는 그 어디에도 무강왕이라 했다는 기록이 없어 보다 철저한 고증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일연스님이 쓴 <삼국유사>는 우리의 야사와 전설은 물론 단군신화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나이가 들어 쓴 탓인지 <삼국사기>에 비하여 부정확한 면이 많은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백제 중흥을 이룩한 무령왕 대에 대규모 사찰을 지을 수 있어도 음주가무를 즐기던 쇠퇴기의 무왕 대에는 미륵사 같은 큰 사찰 건립은 불가능했다는 주장이다. 무령왕 대에 국력이 일취월장 성장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산간을 개척하여 논과 밭을 만드는데 많은 인력이 필요하자, 무령왕은 가야로 도망쳤던 백제인의 3,4대까지 추적, 귀국시켜 일자리를 주고 경제를 활성화 시켜 백제중흥을 이룬 군주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령왕 대에 대규모 사찰을 지었다는 기록은 없다.

무령왕 대는 불교보다는 오히려 도교가 유행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은제탁잔에 그려진 진기한 새와 동물, 용 그림을 볼 때 도교가 추구하는 이상세계임을 엿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무령왕릉에서 나온 매지권을 보아도 이 모든 의식이 도교적 산물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도교가 왕성하던 양나라와 잦은 사신왕래를 통해 그들 문화를 적극 받아들였음도 드러난다.

실제로 무령왕은 512년에 양나라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있는데, 이때의 목적은 첫 왕비(大夫人:왕비)의 죽음에 쓰일 벽돌 등 부장품을 수입하기 위함이라 보인다. 실제로 송산리 6호분(무령왕의 첫째 왕비로 추정)에 쓰인 벽돌 명문에 임진년작(壬辰年作-512년에 만듦)이란 문구가 있어 이를 증명한다. 그때 양나라 완제품을 수입했는지, 벽돌 찍는 장인을 데려와 만들었는지는 차후 연구과제이나 하여튼 이때 사용하고 남은 벽돌 중 일부가 무령왕릉 축조에도 쓰였음이요, 6호분에 설치된 두 개의 관 대 중 하나는 비어있었다 함은 무령왕이 처음 약속과는 달리 새로운 젊은 왕비(발견된 이빨로 30대 추정)와 함께 묻혔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도교문화를 꽃피웠던 무령왕은 이를 일본열도에도 적극 전파한다. 이는 서기 513년에 오경박사 단양이를 일본에 파견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고, 3년 후인 516년에 교체요원으로 역시 오경박사 고안무를 보낸 것으로도 확인된다. 오경박사라 함은 사서삼경은 물론 노자와 장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는 도교사상에도 일가견이 있던 당대 최고의 엘리트로 무령왕 시대를 도교시대라 보기에 충분하다.

만일 무령왕이 미륵사 같은 대규모 사찰을 지었다면 분명히 <삼국사기>나 적어도 일본과 우호적이었던 인물이기에 <일본서기>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신라의 선화공주와 무령왕이 결혼했다는 기록은 없다.

사 교수가 주장하는 무령왕 대 불교융성은 오히려 그 아들 성왕 때가 아닌가 한다. 실제로 성왕은 불교를 적극 받아들여 큰 사찰을 지었다. 결과 왕실로부터 불교가 점점 융성해지고, 성왕7년(529)에는 수도였던 웅진(현재의 공주)에 대통사(大通寺)를 건립했다. 공주시 반죽동에 백제시대의 대통사 터가 있는 까닭이다. 아울러 538년에는 승려를 일본에 보내 불교를 전파했다. 이로써 비로소 일본열도에 불교가 처음 전해짐이요, 그들이 불교문화를 전파해준 은인으로 백제 성왕을 지극히 섬기는 이유이다.

고로 사 교수가 주장하는 무령왕 대 불교융성은 사실 성왕 때 일이요, 사마왕 시대에는 도교가 훨씬 유행했음이다.

세 번째 반론 또한 두 번째 사유와 비슷하다. 무령왕 때 국력이 융성한 것은 사실이나 무왕이 재위 41년간 나라 발전을 위해 노력했고 신라를 자주 공격한 점을 보아도 왕권이 강화된 시기라 가능했다는 점이요, 국가가 안정되었다는 반증이다. 무령왕이 인자 관후하였다는 점 또한 반드시 불교와 관련지을 일도 아니라는 점이다. 무령왕의 인품이 백성을 사랑하고 자비를 베푼 점이 불교 때문이라는 주장은 비약이 아닐까한다. 오히려 무령왕의 정치철학이 도교적 노장사상(老莊思想:노자, 장자의 철학사상)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당시 신라 상황을 보아도 서동요의 마동이 무령왕일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 물론 493년에 백제의 동성왕과 신라 이찬(伊飡) 비지(比智)의 딸이 국제결혼을 하여 결혼동맹을 맺은 적은 있다. 그러나 무령왕 대 어느 기록에도 신라왕의 딸과 결혼했다는 흔적은 없다.

무령왕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늦은 나이인 501년 12월, 40세 때 왕권을 차지했다. 무령왕의 어린 시절은 분명 일본열도에서 보냈음은 필자가 누누이 강조하고 있음이다. 이는 열도 내 백제 분국왕(담로장)으로 지냈던 흔적이 왜왕무(倭王武)가 478년 송나라 황제에게 보낸 상표문으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갑자기 ‘부친과 형이 죽어 상중에 있었다.’는 암상부형(奄喪父兄)이란 말은 당시 일본 천황가는 물론 동아시아 전체의 왕조사를 보아도 없었다는 점이다. 결국 이 내용은 475년 아차산성에서 고구려 장수왕에게 죽임을 당한 무령왕의 부왕인 개로왕과 왕비 그리고 다섯 형들을 이름이다.

뿐만 아니라 무령왕이 신라 공주와 장가를 갔다면 분명 지증왕(500~514 재위)의 딸일 것이다. 그러나 신체가 워낙 구서구석 컸던 지증왕인지라 한참동안 장가를 못 가던 차에 전국에 수소문, 변(便)이 가장 굵은 여성과 간신히 결혼한 처지에 딸이 세 명이라거나 선화공주가 있었다는 기록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또한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진평왕(579~632 재위)은 아들이 없어 장녀 덕만으로 왕을 삼으니, 그가 신라최초의 여왕 선덕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사 교수는 미륵사지에서 발견된 기해년(639)을 무령왕 대에 무리하게 짜 맞추다보니, 2주갑, 즉 120년을 내려 서기 519년이라 주장하지만, 과연 그럴까? <일본서기>가 비교적 기년이 정확한 <삼국사기>에 맞춰보면 120년 차이가 나기에 ‘신공기(神功紀)’ 등을 2주갑을 내려야 일치하지만 무왕 대 설화를 무령왕 대로 끌어올려 보기에는 상기 필자의 반론으로 보아도 무리 일 것 같다.

또한 <삼국유사> 기록도 역사적 사실로 보기 어려운 점은 선화공주란 이름이 정사인 <삼국사기>에 언급이 없고, <화랑세기>에도 나오지 않는다. 특히 사교수 주장대로 선화공주와 사마왕자(무령왕)의 국제결혼이 사실이라면 일본의 남제왕(계체)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던 만큼 백제 관련 기사가 많은 <일본서기>에도 분명 나올법한데 그러한 단서가 될 만한 기록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삼국유사> 기록을 믿기 어려운 점은 또 있다. 즉, 진평왕의 딸이 세 명으로 정사 기록대로 첫째 딸이 선덕여왕이고, <삼국유사> 말대로 셋째가 백제 무왕에게 시집갔다면 둘째 딸이 선덕여왕 다음 왕으로 즉위해야하나, 그 어떠한 말도 없다는 점이다. 선덕여왕 다음으로 왕이 되는 승만은 진평왕의 둘째 딸이 아니라 덕만(선덕여왕)과 4촌이라는 점이다. 고로 선화공주가 진평왕 셋째 딸이라는 근거는 <삼국유사>의 기이편(奇異編) 설화 말고는 그 어디에도 없다.

한편, 서동요의 전설이 깨지는 것이 못내 아쉬운지 일부 연구자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미륵삼존과 연못의 존재가 확인됐으며 연못을 메워 절을 건립하고 사자사(사자암) 가는 길 용화산 아래에 있다는 기록과도 일치하기 때문에 봉안기 하나만으로 서동설화를 부정하는 것은 과도한 해석이다.”라고 견해를 밝히나 이 또한 어불성설이다. 왜냐하면 <삼국유사>를 쓴 고려 승려 일연(1206~89)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미륵사를 방문했을 저자가 그 주변을 실제로 둘러보고 정사인 <삼국사기>에는 없으나 기이한 설화이기에 채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로 실제 연못 등 당시의 지리 묘사가 정확하다하여 선화공주 설화마저 옳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설화는 설화이기에 일연도 <삼국유사>에 채록하면서도 반신반의하면서 기이편에 기록으로 남긴 것 아니겠는가? 이러한 민담 수준의 설화는 각 지자체에서 편찬하는 ‘○○향토지’ 등에도 수 없이 많은 유형이다. 이러한 불교 관련 설화집은 이웃 일본의 <닛뽄료오이끼(日本靈異記)>에도 수도 없이 나온다. 이 책은 야쿠시지(藥師寺)의 경계(景戒) 스님이 787년 집필한 고전으로 신라, 백제, 고구려 관련 설화도 많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저자 경계는 백제 멸망 후 일본열도로 이주해간 백제인의 후손이라는 점이다.

고로 설화는 설화로써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할 것 같다. 결론적으로 서동요는 가능성이 희박했던 꿈을 이룬 무왕 관련 전설이 아닌가 한다. 법왕의 태자가 아닌 서자출신으로 백제왕 도 되고 예쁜 부인(귀인)도 맞아들여 결혼했다는 해피엔딩 속에 극적 효과를 주기 위해 신라의 선화공주가 덧칠해진 것이 아닐까한다. 어쩌면 선화공주의 역할을 백제 8대 성씨로 큰 권력의 한축을 행사하던 좌평 사택적덕이 서동을 백제왕으로 뒤에서 물심양면 도와줘 등극시킨 귀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 일이 시간이 지나면서 사택적덕의 딸이 신라 선화공주로 왜곡된 것은 아닐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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