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과 고독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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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과 고독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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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나눈 긴 대화의 주제

나에겐 좋은 친구가 하나 있었다. 대학 초년시절. 듣기 싫은 수업시간에 강의실 뒷자리에 않아서 엉뚱한 책을 뒤적이고 있다가 같은 처지에 있는 한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친구의 도수 높은 안경은 항상 초점이 맞지 않았다. 나 보다 시력이 나쁜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그는 세상을 바라보지 않았고, 늘 그 뒤에 숨어 있는 무엇을 보고 있었다. 내가 손가락을 가리키면 그는 달을 보았다. 발랄한 젊음이 가득한 캠퍼스에서 그의 마음은 항상 저 높은 곳 어딘가를 향해 있었다.

재수생이란 딱지를 붙이고, 그는 서울의 학원에서 한해를 보내고 내려왔다. 그래서 한해만큼의 서울생활을 하고 왔었다. 그래서 그의 방황의 역사는 나보다는 한수 위였었다. 나의 그리움이 막연한 것이라면, 그의 고독은 보다 절실해 보였다. 세상 물정에 어리숙한 나에게 ‘훼드라’며 ‘하우스 오브 더 라이징 선’같은 것을 가르쳐 준 것도 그였다.

또 나를 처음으로 산에 데려다 준 것도 그였다. 딱 한번 그를 따라 지리산 등반을 갔었다. 학교에선 숨을 쉴 힘조차 없어 보일 정도로 나약하기만 하던 그는, 산에 오르자 물을 만난 고기처럼 펄펄 날아다녔다. 그에겐 ‘산’이 생명의 장소, 혹은 의미로 충만한 곳으로 보였다.

한번의 산행을 같이 다녀온 뒤, 그는 나의 요청을 냉정하게 뿌리치고 혼자서 산을 찾아다녔다. 나의 취약한 건강 때문이 아니었다. ‘산은 혼자가야 제 맛이 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는 특히 그 위험하다는 겨울 산행을 좋아했다. 한번의 겨울에만 설악산을 5번, 지리산을 3번씩 가는 그의 광적인 산행에서는 구도자적인 느낌보다는 고독이 풀풀 묻어났었다.

나는 그와 만나면 함께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긴 논쟁을 벌이곤 했었다. 나는 논쟁을 좋아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논쟁이란 무익하기 그지없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와 하는 것이 나의 유일한 논쟁이었고, 그 주제는 언제나 누구의 인생이 더 힘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는 항상 고독했고, 나는 늘 알 수 없는 이유로 외로웠었다.

“고독은 희망이 없는 것이므로 더 힘든 것이다. 네가 과연 절망을 아느냐?” 그는 그렇게 주장했다. “그리움은 결코 희망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절실한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부딪쳐야만 하는 고통을 네가 이해 할 수 있느냐,” 그것이 나의 주장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바른말을 잘 하는 덕으로 백발이 성성하실 때까지, 시골로만 돌아다니시다, 그 무렵 정년이 다 되어서야 겨우 도시에 발령을 받은 교사였다. 그의 아버지가 시 외곽에 마련한 작은 집에는, 시집못간 노처녀인 누나가 함께 살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수제소리를 들으며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작은 형은, 온 가족의 기대를 물리치고 데모하다 군대에 끌려갔다. 그리고 수없이 사법고시에 낙방하기만 하는 그의 큰 형의 그늘이 묻어있는 그 집에는, 우울증에 걸린 그의 어머니의 어둠이 가득했다.

그의 집 좁은 방에 같은 이불을 덮고 누워 두런두런 세상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꾸만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우리의 내쉰 나지막한 한숨은 낮은 천정에 부딪혀 다시 우리의 귓전에 되돌아왔다. 우리는 그 한숨을 그의 어머니가 힘든 몸으로 끓여 온 라면에 말아서 먹곤 했다.

그의 집에는 학교도서관에서 보기 어려운 작은형이 남긴 책들과, 군대에 보내준 “지금은 우리가 힘들고 지쳐 있지만...”이란 소리로 시작하는 테입이 있었다. 우리는 그 테입을 수없이 듣고 또 들으며 저마다 알 수 없는 느낌에 잠기곤 했다.

우리는 참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달랐다. 같은 방에서 같은 테입을 듣고 그는 절망에 빠져 다시 산으로 떠났고, 나는 어딘가에 숨어있을 것만 같은 그리움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도서관으로 향했다. 우리의 토론은 언제나 같은 자리를 맴돌기만 했다. 그리고 여전히 무엇이 옳은지 알 수 없는 속에서도, 우리는 각자의 후각에 와 닫는 대로 자신에게 진실한 삶을 살았다.

인생에 대한 누구의 견해가 더 올바른 것인지, 누구의 삶이 보다 더 진실한 것인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삶을 선택해야만 한다. 우리는 세상의 여러 가지 문제를 보는 방법이 비슷하면서도 한 가지가 달랐다. 그는 인생에 대해 절망했고, 나는 인생을 긍정했다. 사람에게는 그렇게 자신에게 맞는 삶의 방법이 있는가 보다.

나는 희망을 찾고, 보다 정확한 삶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 그리고 얼마간 인생과 타협을 하기 위해, 또 세상을 바꾸려는 거대한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오래 동안 꿈꾸어오던 서울을 향해 떠났다. 희망과 깨달음을 얻으러, 그리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내가 서울에 직장을 정한 후, 수없이 보낸 엽서에 그는 단 한번도 답장을 주지 않았었다.

내가 서울로 온 후 10년가량 지났을 무렵, 그는 언제나 그랬듯이 불쑥 내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결혼을 축하한다고 했다. 이제는 더 이상 막걸리 집을 찾을 수가 없어, 힘들게 동동주 집을 찾아서 우리는 한 잔의 술을 나누었다. 그는 굳이 그날 밤차로 지방으로 내려가 버렸다. 그게 그를 본 마지막이었다.

그도 이젠 가정을 꾸렸고 아이를 낳았다. 그 후 한번도 만나 보지는 못했다. 나의 우정이 메마른 것인지, 그가 나를 피한 것인지 알 수는 없다. 나의 가장 친한 친구와 나의 우정은 늘 그런 식이었고, 나도 이젠 그의 친구 사귀는 방법에 익숙해졌다.

세상은 항상 과정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만남 후엔 헤어짐이 다르게 마련이다. 그리고 헤어짐 후엔 언젠가 또 다시 만남이 있을 것이다. 그럴 것이다. 언젠가 세상의 다른 모퉁이에서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굳이 만나지 않아도 나는 그를 느낄 수 있고, 그의 숨결이 나에게 속삭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친구는 아마 지금도 고독에 젖어 있을 것이다. 내가 나의 알 수 없는 그리움을 아직도 어찌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무엇에 대한 것인지 알지 못하는 그리움으로 인해 나의 젊음은 많이 힘들었었다. 그러나 그 그리움을 부여잡고 몸부림 쳐온 삶의 흔적들이 남아 있기에 나의 삶은 결코 쓸쓸하지 않다. 나에겐 세상의 모든 것들을 그리워하며 아름다움으로 지켜온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추억의 주변에는 언제나 멀리 산을 향하던 그의 멍한 눈동자가 스며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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