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댁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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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댁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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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추억 속의 그 이름>삶은 감자와 징검다리

 
   
  ^^^▲ 어린날 외할머니댁으로 가는 길과 꼭 닮은 논길
ⓒ 이종찬 ^^^
 
 

그때가 아마도 내 나이 열 살 남짓했을 때였을 거야. 1960년대 끝 무렵이었으니까.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먹을 게 그리 흔하지 않았지. 게다가 부모님께서 농사를 지었으니까 돈이란 것은 구경조차 하기 어려운 때였고. 그러니까 그때는 군것질이라는 단어 자체를 아예 몰랐을 때야.

게다가 지금처럼 하얀 쌀밥은 구경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어. 끼니 때마다 시커먼 꽁보리밥을 물에 말아서 먹었으니까. 하지만 한창 자라나는 우리들로서는 꽁보리밥 한 그릇만 가지고는 배고픔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 밥상을 물리고 방귀 한대 뿡 뀌고 나면 이내 배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났으니까.

그래서 우리들은 끼니 때마다 할아버지의 밥상을 넘보곤 했어. 왜냐구? 할아버지의 밥상 위에는 늘 하얀 쌀밥과 생선 한 토막이 놓여 있었거든. 그리고 할아버지께서는 늘 쌀밥 반 그릇과 생선 반 토막을 남겼어.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면 할아버지께서는 일부러 그랬던 것 같아. 시커먼 꽁보리밥을 입에 넣으면서도 자꾸만 곁눈짓을 하고 있는 우리들을 위해서 말이야.

"정지(부엌)에 뭐 묵을 꺼 좀 없더나?"
"아까 아침에 옴마(엄마)가 솥두껑에 찐 밀떡이 조깨(조금) 남아 있었는데, 새터때기(새터댁)가 와서 묵었다 아이가."
"새터때기가 뭔데 남의 떡을 훔쳐먹는데?"
"나중에 한 소쿠리 쪄준다 캄시로(하면서) 한 개도 안 남기고 다 묵어뿟다 아이가."

당시 우리들은 학교를 파하면 늘 도시락을 달그락거리며 상남다리를 건너 집으로 돌아오곤 했어. 그리고 제일 먼저 들어가는 곳이 부엌이었지. 뭔가 먹을 게 없는가 하고 말이야. 근데 그날은 어머니께서 아침에 쪄놓은 밀떡조차도 이웃에 사는 새터댁이 다 먹어버리고 말았다는 거야.

배는 계속 꼬르륵거리고 어떻게 하겠어. 가까운 외할머니 댁으로 가는 수밖에. 외할머니 댁은 둑길을 따라 10여 분 남짓 걸어가야 했어. 미나리꽝을 지나 모가 시퍼렇게 자라는 논길을 따라 걸어가면 끄트머리에 징검다리가 놓인 시내가 하나 있어. 그 시내는 비음산과 봉림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합쳐지는 곳이기도 했고.

그렇게 합쳐진 시내는 외할머니께서 사는 마을을 가로질러 흘러내렸어. 그러다가 외할머니 마을과 봉암 앞바다 중간쯤에서 남면벌을 가로지르고 달려온 시내와 합쳐져 큰 강을 이루며 마산 앞바다로 흘러내렸어. 그 강 이름이 남천이야. 남천에는 은어떼와 잉어, 붕어가 참 많았어. 그래서 우리들은 여름방학이 되면 남천으로 가끔 낚시를 하러 가기도 했고.

"혹시 외할매가 오데(어디) 가시고 집에 안 계시모 우짜지?"
"괘않타. 그때 외할매가 이래 안 카더나. 혹시 할매가 없으모 정지에 들어가서 솥두껑을 열어보라꼬."
"그래도 외할매가 계셔야 할낀데."
"와? 또 외할매가 주는 그 눈깔사탕이 묵고 싶나?"

그날도 우리들은 외할머니께서 삶아주던 그 맛있는 감자를 떠올리며 징검다리를 향해 열심히 걸어갔어. 근데 이를 어째. 외할머니와 우리들을 이어주는 오작교 같은 역할을 했던 그 징검다리가 보이지 않는 거야. 그리고 그 징검다리가 있었던 자리에는 벌건 황토물이 콸콸콸 소리를 내며 뱀장어처럼 요동치고 있었어.

그래. 삶은 감자 먹을 생각에 빠져 그만 깜빡 잊고 있었던 거야. 어제 진종일 장맛비가 내렸다는 것을 말이야. 어쩌겠어. 외할머니 집을 코 앞에 두고도 그냥 뒤돌아서서 들판을 터덜터덜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수밖에. 그때 멀리서 외할머니의 갈라지는 목소리가 들렸어.

 

 
   
  ^^^▲ 감자를 바라보면 외할머니의 얼굴이 떠오른다
ⓒ 이고향^^^
 
 

야(얘)들아! 며칠 있다가 냇물이 줄어들모 그때 건너온나. 할매가 알라(아기) 머리통만한 감자로 억수로 많이 캐놨다."
"외할매! 상남다리로 돌아가꼬 가모 안되것나."
"고마(그만) 오늘은 퍼뜩 집에 들어가라카이."

다음 날, 우리들은 다시 그 징검다리를 향해 상남 훈련소 신병처럼 씩씩하게 걸어갔어. 오늘은 삶은 감자를 정말 배 터지게 먹을 거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근데 그때까지도 제법 많은 물이 흐르고 있는 거야. 물론 어제보다는 물이 엄청나게 많이 줄어들고 맑아져서 바닥까지 훤하게 보였지만 말이야.

근데 물 속을 아무리 자세히 들여다 보아도 징검다리가 보이지 않는 거야. 징검다리가 있어야 그나마 옷을 적게 적시며 쉬이 건널 수가 있었거든. 아마도 황톳물에 떠내려 가버렸던 것 같았어. 그렇지만 우리들은 삶은 감자를 결코 포기할 수가 없었어. 그래서 바지를 엉덩이까지 바싹 끌어올린 채 엉거주춤 시내로 들어갔어.

바닥은 제법 미끄러웠어. 자칫하다가 돌멩이를 잘못 디디면 금새 물속에 퐁당 빠질 수도 있었어. 그리고 시내 중간쯤으로 다가갈수록 점점 깊어지기 시작했어. 물살도 제법 거셌고. 하지만 늘 물가에서 멱을 감고 놀았던 우리들은 그 정도 깊이와 물살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어.

"징검다리만 있었어도 벌써 감자로 배 터지게 묵고 있을 낀데 그쟈?"
"니 그라다가 옷 다 베리것다(버리겠다)."
"감자 묵을 때 외할매 보고 말려달라카모 되지 뭐."
"그라다가 옴마한테 들키모 우짤라꼬?"
"외할매는 입이 쎄띠(쇳덩이)맨치로 무겁다 아이가."

그렇게 우리들이 시내를 거의 다 건너왔을 때였어. 나는 얼른 삶은 감자 먹을 욕심에 발걸음을 서둘렀어. 그런데 그때 발바닥에서 무언가 아주 미끄러운 촉감이 느껴졌어. 뱀장어인가? 아니면 미꾸라지? 그와 동시에 나는 그만 철퍼덕 하고 물속에 넘어지고 말았어. 그리고 물살이 거세 조금 떠내려 갔어.

"저…저런!"
"에이! 요놈의 뱀장언지 미꾸라진지 땜에 재수 옴 올랐다카이."
"니 옷을 다 베리가꼬(버려가지고) 인자 우짤끼고?"
"옴마한테 이러지만(일러 바치지만) 마라."

그래. 나는 요즘도 삶은 감자를 바라보면 한입 볼 터지게 먹고 싶어. 하루는 그때 생각이 간절히 떠올라서 재래시장에 나가 어른 주먹만한 감자를 열 개 남짓 사다가 삶아 먹은 적도 있었어.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때 그 맛이 나지 않는 것 같았어. 그래도 감자는 지금도 먹을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야.

문제는 돌다리야. 그때 내가 건넜던 그런 징검다리는 요즈음에는 좀처럼 볼 수가 없었거든. 그래서 나는 그동안 이곳 저곳에 여행을 다니면서 그런 징검다리가 있는지 살펴 보았어. 하지만 아무리 눈을 비비고 살펴보아도 그런 징검다리는 없었어. 시내는 그때 그 시내와 비슷한 곳이 몇몇 있었지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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