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교악의 지리산 남명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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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교악의 지리산 남명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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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지리산은 우리 민족에 큰 별 두개를 주셨다

 
   
  ▲ 지리산 - 연하봉(왼쪽)과 천왕봉  
 

지리산 품안은 한없이 넓다. 이를 두고 태산(泰山)이라 하고 지리산 천왕봉은 높이 솟구친다. 이를 보고 교악(喬嶽)이라 한다. 조선팔도의 인물평에는 태산교악(泰山喬嶽)이라는 말이 있다. 바로 영남인의 기질을 일러 태산교악이라 했던 것이다.

영남지방이라고 하면 태백산에서 지리산까지의 산줄기가 다시 지리산에서 김해까지의 산줄기의 낙동강우측과 태백산에서 부산 몰운대에 이르는 낙동강좌측으로 크게 나누어 울타리처럼 가둔 곳이 바로 경상도이다.

지리산은 민족의 영산(靈山)이기에 오늘날에도 당당히 국립공원 제1호라는 명칭이 부여되어 있고, 소백산은 그 품새의 압권으로 인해 당대 풍수가(風水家) 남사고는 산을 향하여 큰절을 올렸다고 하는 풍수적 국보급의 산이다.

소백산 비로봉은 바위가 아닌 흙들로 형성된 토산(土山)이다. 토산은 후덕해 보이고 인자한 기운을 담고 있다. 백두대간 중 소백산과 덕유산이 이에 속하고, 지리산 천왕봉은 높이 솟은 바위들로 형성되어 있다. 백두대간 중 이러한 석산(石山)을 대표할 수 있는 것은 설악산과 지리산 천왕봉이다.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에 있다는데 어찌 이러한 지령의 산세에서 인걸에도 구별이 있다는데 1501년, 소백산과 지리산은 우리 민족에게 큰 별을 두개를 내려 주셨다. 하나는 소백산하의 안동향리에서 탄생한 퇴계(退溪)이황 (李滉 :1501∼1570년)이요, 또 하나는 지리산하 삼가(三嘉)향리로 내려준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년)이다.

퇴계학은 설득력으로 품어주는 자모(慈母)와 같아 소백산의 품새이며, 남명학은 직설적이고 대쪽같은 엄부(嚴父)의 기풍이 지리산의 기세를 닮고 있다고 하겠다.

사람들은 두 문하를 물줄기로서도 구별 지어 낙동강 좌편에 자리한 까닭에 퇴계문하는 강좌학파(江左學派)라하고, 또한 낙동강 우편에 자리한 남명문하를 강우학파(江右學派)라 칭했었다.

국난인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남명의 가르침을 받은 선비들은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모집해 싸웠으며 남명 문하에서 궐기한 의병장만도 홍의장군 곽재우(남명의 사위)를 비롯해 정인홍, 최영경 등 50여 명에 이르렀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으로 대표되는 문하생(유성룡 등)들은 대부분 집권세력으로 선조대왕 몽진을 도왔으며 직접국정에 참여했다고 볼 수 있다.

 
   
  ▲ 국망봉에서 바라본 소백산 비로봉  
 

남명의 생애

선생은 1501(연산군 7년) 경상도 삼가현 토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그 곳에서 보내다가, 7세 때부터 부친의 임지로 따라다녔는데, 19세 때 절에서 독서를 하다가 조광조(趙光祖) 등의 죽음을 들었고, 또 숙부 언경 도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고는, 어진 사람들이 간신배에게 몰려 경륜을 펴지 못하는 것을 못내 슬퍼하였다.

25세 때 원나라 학자 허형(許衡)이 "벼슬에 나아가서도 이룬 일이 없고, 물러나 있으면서도 아무런 지조가 없다면, 뜻을 둔 것과 배운 것이 장차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말한 구절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30세 때부터 김해 신어산 아래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하여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기 시작하였다. 38세 때 이언적(李彦迪) 등의 천거로 헌릉(獻陵) 참봉(參奉)에 제수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45세 때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평소에 친분이 두터웠던 이림(李霖), 곽순(郭珣), 성우(成遇) 등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들이 화를 당하는 모습을 보고는 더욱 벼슬할 뜻을 버렸다.

선생의 상소 중에 "대비(文定王后)는 진실로 생각이 깊지만 궁궐 속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殿下)는 돌아가신 임금의 어린 고아일 따름입니다."라는 구절은 조야(朝野)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명종(明宗)은 남명의 글이 공손치 못하다 하여 처벌하려 했으나, 산림처사가 나라를 걱정하는 상소를 책잡아 처벌하는 것은 언로(言路)를 막는 부당한 조처라는 조정 신하들의 변호로 무사하게 되었다.

이 때 벌써 선생의 명망은 조야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또 산림처사를 대표할 만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임금이라 할지라도 사사로운 감정으로 처벌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온갖 부조리가 만연하던 당시의 정치 상황에서 선생의 과감한 직언은 산림처사의 비중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61세 때 지리산 아래 덕산(德山)으로 옮겨 산천재(山天齋)를 지어 제자들을 가르쳤다. 65세 되던 해 문정왕후가 죽고 곧 이어 윤원형이 관직에서 쫓겨나자, 을사사화 때 유배되었던 선비들이 다시 조정에 돌아오게 되었다.

그 이듬해 다시 임금으로부터 부름이 있자, 임금의 교지(敎旨)도 거듭 내리니 한 번 가서 군신의 도리를 밝히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서울로 가서 사정전(思政殿)에서 임금을 독대하였다.

명종이 나라 다스리는 도리를 묻자, 선생은 '정치 제도를 혁신할 것, 인재를 등용하려는 성의를 보일 것, 정치의 근본이 되는 임금 자신의 학문에 힘쓸 것 등'을 건의하였다.

조정에는 윤원형을 둘러싼 간신배들이 축출되고 어진 사람들이 복귀하여 명종이 비로소 직접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으므로, 선생은 평생토록 쌓은 학문과 경륜을 한 번 펴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러나 명종을 만나 대화를 나눈 후, 그가 무슨 일을 할 만한 임금이 아님을 간파하고는 서울에 간 지 7일 만에 곧바로 돌아왔다.

72세 때 선생은 산천재에서 일생을 마쳤다. 임종시에 모시고 있던 제자 김우무(金宇毋)옹이 "명정에 어떻게 쓸까요."라고 물으니 선생은 "처사(處士)라고 쓰는 것이 좋겠다."라고 대답하였다. 선조는 곧 예관을 보내어 제사지내고, 대사간을 추증하였다. 이어 광해군 때에는 문정공(文貞公)이란 시호(諡號)가 내려지고, 영의정에 추증 되었다. 

 
   
  ▲ 지리산 중산리에 500년 된 은행나무와 경(敬)과 의(義)를 강론하신 덕천서원이 자리를 잡고 있다.  
 

남명의 사상

선생의 핵심 명제인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것도 '자신의 수양을 전제로 한 현실세계의 구제'라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적 실천'지향의 사상은 자신의 수양에 관련되는 것과 현실 세계의 구제에 관련되는 것으로 구분해서 볼 수 있는 바, '경(敬)'과 '의(義)'가 바로 그 두 축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경'과 '의'는 "敬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義로써 밖을 반듯하게 한다(敬以直內 義以方外)."라고 한 것이 그 출전이다. 송대(宋代)의 성리학자들이 특히 이 가운데의 '경'을 적출 하여 심성 수양의 요체로 삼았던 것인데, 선생은 이 둘 敬, 義를 다 뽑아서 '경'은 내적 수양과 관련시키고 '의'는 외적 실천과 관련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산천재의 벽과 창문 사이에 이 두 글자를 써 두고서, '우리 집에 경 과 의라는 이 두 글자가 있는 것은 마치 하늘에 일월이 있는 것과 같아서 영원토록 바뀌지 아니할 것이니, 성현의 온갖 말씀이 모두 결국은 경과 의라는 이 두 글자를 넘어서지 않는다." 라고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경'은 마음을 수양하는 요체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선생은 마음을 수양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라면 꼭 유가(儒家)의 주장에만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장자(莊子)에 나오는 '南冥'을 자신의 호로 삼고 또 장자에 나오는 '시거이룡현 연묵이뢰성(尸居而龍見 淵默而雷聲:시동처럼 가만히 있다가 용처럼 대단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깊은 연못처럼 고요히 침잠해 있다가 우레 같은 소리를 낸다)'라는 말을 따다가 '뇌룡정(雷龍亭)'으로 강학(講學)하는 장소 이름을 삼았다고 한다.

또한 익힌 학문을 사회적 실천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내적 수양이 필수적으로 요구되기에 '경'을 내적 수양의 방법으로 중시하는 한편, 사회적 실천을 위한 가장 절실한 것으로서 선생이 제시한 것이 바로 '의'이다.

선생이 항상 차고 다니는 칼에다 새긴 글이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 外斷者義: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은 의이다.'라는 것에서 내적 수양을 통한 사회적 실천의 결연한 의지를 볼 수 있다.

또한 민중 세계에 대한 강렬한 관심과 애정, 그리고 선비가 해야 할 것으로서 음양, 지리 의약 등은 물론 활 쏘고 말달리는 것 등의 공부도 유의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한 점에서 선생의 현실 세계에 대한 인식이 철저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선생께서 예순 한 살 때 이곳으로 들어와 산천재를 짓고 시냇가 정자에 써 붙였다는 ‘남명선생시비’가 있다. 시비에는 ‘덕산 시냇가 정자 기둥에 쓴다(題德山溪亭柱)’천 섬 들이 큰 종을 보소서(請看千石鍾)/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 없다오(非大撞無聲)/ 어떻게 해야만 두류산처럼(爭似頭流山)/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까(千嗚猶不嗚)라고 적혀 있다.

산천재 에서 덕산 중심가를 지나 중산리 방면으로 더 오르면 500년 된 은행나무와 함께 덕천서원이 자리를 잡고 있다. 경(敬)과 의(義)를 평생 학문의 요체로 삼았던 남명선생의 사상이 살아 숨 쉬는 곳으로 서원 맞은 편 강가에는 선생이 살아 있을 때부터 있었다는 세심정(洗心亭)에 이르면 더욱 선생의 운치를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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