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근대문학사에 있어 문체의 한 장르를 세운 작가라는 평가가 무색하지 않다. 그것은 작가의 독특한 세상 보기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독특함은 평범한 것이며 주위에 널린 언어지만 실제 현실에 있어서는 그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것은 곧 자유를 지칭함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 속에서 자유는 단지 이름으로만 존재한다.
하지만 작가 손창섭은 그것을 ‘모색’해야 한다고 한다. 따라서 그 모색의 과정이 삶이며 곧 자유가 될 수 있는 가능을 열게 한다고 하는 것이다.
"하루에 몇 번씩 혹은 몇십 번씩 <해결>을 생각하고 거기에 도취하면서도 종시 나는 해결을 짓지 못한 채 지금까지 이러고 있는 것이다. 나는 도무지 주위와 나를 어떠한 필연성 밑에 연결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이 작품의 ‘식구’에서는 의미없음과 의미있음의 경계가 분명하다. 그것은 ‘대장’으로 지칭되는 아버지의 ‘죽어라, 죽어’와 ‘고무장갑 같은 손이 내 따귀를 갈기는 것’인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것과 여동생인 ‘지숙’에게는 ‘경멸’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식구’들 사이에 ‘이방인시’ 되고 그러한 ‘이방인’에게는 ‘주저없이 힐난과 조소를 퍼부을 수 있’게 된다. ‘나’에 대한 그런 ‘식구’들의 비난은 의미 없는 자란 것이다.
심지어 두 동생의 ‘영어 실력’과 ‘양행(洋行)’의 여부에 따라 ‘인간의 가치를 평가’ 함에 있어 ‘나’에 대한 식구들의 평가는 가혹하며 한 점 의문이 없다.
‘식구’들이 기준으로 생각하는 ‘인간의 자격’과 ‘인간의 가치’의 요건에 어느 것 하나 일치됨이 없기에 ‘나’는 철저히 ‘이방인’이 되며 ‘주저없이 힐난과 조소를 퍼부을 수 있는’ 대상이 되곤 한다.
이러한 의미 없음과 있음에 대한 ‘식구’들의 철저함에 비해 ‘나’는 ‘세상 사람이 죄다 유령인지도 모른다'고 하며 동시에 자신을 ‘인간도 유령도 아닌 너무나 막연한 자신의 몰골’이라고 한다.
그러나 ‘식구’들에게 ‘나’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다’라고 한다. 자신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음에도 반감이나 이렇다 하는 아무런 감정을 품고 있지 않다.
단지 그에게 ‘골치가 아픈' 것은 ‘과중한 질문’이 되는 ‘왜 사느냐 하는 물음이’ 있다. 즉 그것은
"나는 주위와 자신의 중압감을 감당해 나갈 수 없는 것이다. 이 대가리가, 동체가, 팔다리가, 그리고 먼지와 함께 방 안에 빼곡 차 있는 무의미가 나는 무거워 견딜 수 없는 것이다"
라는 ‘무의미’에 대한 ‘견딜 수 없’음에 대한 것이다.
그런 ‘나’의 ‘무의미’에 대한 ‘해결’의 ‘나’의 모색은, ‘죽음’도 이룰 수 없다. 그것은 ‘죽는다구 해서 이 세상이’다르게 되느냐는 질문과 그 질문은 죽어 ‘없어지면 그래 지구덩이의 피부병이 완치’될 수 있는가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나’에게 있어 ‘무의미’의 ‘해결’은 ‘죽음’이란 것도 ‘해결’에 이를 수 없다고 한다.
여기서의 ‘피부병’으로 이름 붙임은 다름 아닌 ‘<인간>이라는 박테리아’에 의해 ‘신음하고 있는 지구덩이’의 병인 것이다. 심지어 ‘나’는 성인이 아닌 아이들을 ‘아직 완전히 발육하지 못한 인간의 세균’이며 또한 ‘앞으로의 지구덩이의 피부를 파먹어’ 갈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
'견딜 수 없’는 ‘나’의 ‘무의미’는 이런 인간에 대한 인식 즉 ‘피부가 썩어서 는질는질 무너나고 구정물이 질질 흐르는 지구덩이’로 만드는 인간이며 그 자신이 된다.
그런 ‘나’ 에 이러한 ‘무의미’는
"나는 사실 죽음보다도 더 절실히 기다리는 것이 있는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없을지도 모르는 내 인생의 해결에 관해서 나는 병신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며, 그 ‘영원히 없을지도 모르는’, ‘해결’을 비록 ‘병신처럼’ 이지만 ‘생각’ 한다.
그럼에 ‘나’는 ‘무의미’가 아닌 의미가 있을 ‘해결’에 대해 ‘영원히 없을지’는 몰라도 ‘생각’을 멈추지는 않는다. 비록 그것이 ‘병신’ 같아도 ‘해결’인 곳에 이르기 위해서는 중단하거나 멈출 수는 없다고 하는 것이다. 다다를 곳이 없어도 그곳을 ‘생각’해야 되는 잊지 않아야 되는 것으로 한다.
미해결의 장의 부제인 군소리의 의미에서 그 ‘의미’는 ‘왜 사느냐’의 물음에 대한 ‘낡은 노우트장’에 ‘군소리를 끄적’이는 행위이며 그 ‘끄적’임이 작고 사소하지만 해결의 ‘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결과로 이 작품의 ‘나’를 포함한 모든 인물들의 의미의 유무에 대한 경계는 사라지고 없다. 분명하게 상대적인 위치에 있는 의미의 묘사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란 것은 실상 잠정적이며 미 해결로 남아 있다.
이 작품 속의 모든 것은 정 반대의 것도 ‘의미’를 위한 하나의 ‘끄적’임의 행위이자 의미가 되는 과정이 된다.
2.
미해결의 장은 작가의 다른 작품과 크게 다름 없이 무력하고 사회에서 소외된 인간상이 나온다. 가장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가장들과 그런 것에 이은 식구들의 가난과 비참함도 드러난다. 그럼에도 그 가난과 비참은 하나의 작품 구성을 위한 부분에 머무를 뿐이다.
실상 가난과 비참함이 그리고 사회에서 소외된 인간이라는 것이 어떤 그것이지만, 그것이 바로 어떤 그것이라고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삶의 참된 의미란 바로 이런 것 이다 라며 작가는 단정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작가는 삶과 인간에 대해 단정을 짖지 않으므로-유예는 곧 자신과 타인의로 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므로- 즉 의미(자유)를 모색하는 과정으로 하기에 그 모색은, 즉 그의 작품은 폭과 깊이가 넓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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