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그리는 것 자체가 의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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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그리는 것 자체가 의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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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기에서 노동의 의미를 발견한 친구

친구의 손에 들린 붓이 캔버스를 지나갈 때마다 감탄이 흘러나왔다. “우와-. 정말 굉장하구나.” 친구는 정말 그림을 참 잘 그렸다. 친구가 다니는 미술과의 교수님들까지도 지방대학에 다니기에는 아깝다는 이야기를 하시곤 할 만큼 그림에 대해선 소질이 있는 학생이라는게 세간의 평이었다.

나는 친구가 그림을 그리는 그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다. 친구의 손놀림 하나하나에 따라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는 그 생생한 과정이 너무나 신기했다. 그래서 그 모습을 보고 싶어서 시간이 날 때마다 미술관 친구의 작업실에 자리를 잡고 않아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친구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곤 했다.

학기 중에는 미술과 학생들이 모두 집에 돌아가고 난 저녁 늦은 시간에, 아무도 미술관을 찾지 않는 방학 때에는 아예 아침부터 친구의 작업실에 같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렇게 친구는 그림을 그리고, 나는 친구의 옆에 앉아서 공부를 하였다. 눈을 책에 박고 있어도 코끝에 감겨져오는 야릇한 그림물감의 냄새와 물감을 개고, 그림을 그리는 친구의 몸동작의 자취가 그렇게 향기로울 수가 없었다.

나는 친구가 정말 그림에 소질이 있다고 했다는 미술과 교수님들을 평을 들을 때 짐짓 속으로는 “친구가 얼마나 노력을 하는지 알고는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미술과 친구는 내가 미술관을 찾을 때면 거의 한 번도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그림을 그리고 또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나 또한 미술관에 늘 앉아 있었고, 나의 다른 친구들이 나를 찾으려면 미술관에 오면 된다는 것을 알게 될 만큼...

그는 철저한 노력파였다. 물론 남들이 말하는 것처럼 소질이 있기도 했겠지만, 그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면 ‘삶의 진지함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들며, 나도 한결 더 공부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래서 미술관을 더욱 자주 찾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친구는 말이 없었다. 나도 친구의 곁에서 별로 말을 하지 않았다. 가끔 미술관 앞 벤치에 않아 술잔을 나눌 때도 친구는 그저 쓱 미소를 지을 뿐 술김에라도 속에 있는 말을 털어놓는 법이 없었다. 그러던 친구가 갑자기 한 보름간을 미술관에 나타나지 않은 적이 있었다.

그때쯤은 나도 미술관의 경비아저씨와 웬만큼 낮이 익은 상태였으니, 나는 별다른 부담을 느끼지 않고 친구가 없는 텅 빈 미술관의 친구의 옆자리, 내가 늘 앉던 그 자리에 앉아서 공부를 하며 친구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름 만에 마침내 나타난 친구는 좀 핼쓱해 보였다.

좀처럼 입을 열려고 하지 않던 그는 결국 나의 간청을 이기지 못하고, 그 동안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학비는 장학금으로 다닐 수 있고, 캔버스도 손수 만들어 사용하면 되는데 물감은 돈을 주고 사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물감 값을 벌기 위해 그 동안 미술관에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땀 흘린 돈으로 산 물감으로 그리는 그림이 더 의미 있지 않을까.” 그는 그렇게 말했다.

어차피 아르바이트를 하려면 다른 미술과 학생들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화실에서 학생들 지도하는 것이 훨씬 편하지 않느냐고 내가 재차 물을 때에도, 그는 그냥 씩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는 늘 그런 식으로 내 마음을 답답하게 만들곤 했다. 그가 왜 그런 아르바이트를 일부러 택했는가 하는 궁금증이 풀린 것은 얼마 후의 일이였다.

어느 날 친구는 갑자기 그림을 그리기를 중단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선을 죽죽 긋기만 하고 있는 것이었다. “기본이 부족한 것 같아서...” 그는 그렇게 말했다. “데생이야 말로 그림의 기초야. 그게 안 되면 아무 것도 제대로 할 수 없어...”라고 늘 말하면서 틈틈이 데생 연습을 계속해오던 친구가 이젠 아예 선긋기로 되돌아간 것이다. 친구는 그렇게 철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름이 막 찾아오기 시작하던 6월의 하루. 교정에는 최류탄이 하얀 연기처럼 푸른 하늘을 뒤덮고, 학생들의 우렁찬 함성이 천지를 울리던 어느 날이었다. 좀처럼 나서기 어렵던 교문을 마침내 뚫어 버리고, 마치 축제날 마라톤을 하듯이 많은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머나먼 시청을 향해 달려 나가던 바로 그날, 친구는 그날도 미술관에 앉아 있었다.

“그림에는 기술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담는 것도 중요하지 않아?” 시청에 다녀온 후 가방을 챙기러 도서관에 들렀다 친구를 찾아간 나는 당시 미술과 학생 사이에 유행하던 질문을 친구에게 던져보았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것을 함께 느끼고 체험해보는 것도 그림에 필요한 자양분이 아닐까?”

그는 역시 씩 웃었다. 그리고 한참의 뜸을 들인 후에 대답했다. “무엇을 담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마음으로 그리는가도 중요하지 않을까? 나에게 그림은 신성한 노동의 의미로 느껴져. 사람들이 노동의 정당한 가치를 돌려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나에겐 그림에 잔기술이 아닌 진정한 노동 그 자체를 쏟아 넣는 것이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하루의 노동을 채우기 위해 지금도 그림을 그리는 것이야.”

친구는 그 후 그림을 더 배우고 싶다며, 빈손으로 일본으로 떠났다. 항상 그런 것처럼, 무슨 돈으로 어떻게 공부를 하려고 하는지, 어디서 무엇을 배우려고 하는지도 알려주지 않은 채. 그러나 나는 그가 어떻게 지내는지 막연히 추측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언젠가 방학 때 갑자기 일본에 다녀왔다는 그가 “일주일 내내 바나나만 먹었다. 그곳에선 바나나가 젤 싸더군, 라면은 무지 비싸고...”하며 빙긋이 웃는 모습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이젠 그가 돌아올 즈음이 되지 않았을까? 요즘 들어 신문을 펼치면 미술관련 기사를 다시 유심히 보는 버릇이 생겼다. 요즘 들어서 다시 가끔 그토록 진지하게 그림과 삶을 대면하던 내 친구의 생각이 나곤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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