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보훈처는 장인환(1876.3.10~1930.4.24)선생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 ||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친일 외교관 스티븐스(D.W.Stevens)를 처단한 샌프란시스코 의거 100주년을 맞이하여 장인환(1876.3.10~1930.4.24)선생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1876년 3월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으며, 1904년 노동이민으로 하와이로 갔다가 1906년 8월 도미하여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된 미주 한인 독립운동단체인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 회원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08년 3월, 대한제국 외교고문으로 있던 스티븐스가 일제의 지령으로 미국에서 대한제국의 무능력을 적극 홍보하고, 일제의 침략행위를 정당화하는 선전활동을 펴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신문기자들에게 을사늑약을 비호하고 한국을 비판하는 내용의 발언을 하였다.
이에 미주 한인독립운동 단체인 대동보국회에서는 최유섭, 정재관 등을 보내 신문에 보도된 내용에 대해 힐문하고 취소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동포 대표단을 만난 스티븐스는 매국노 이완용(李完用)을 충신이라 칭하고, 한국의 인민은 우매하여 독립할 자격이 없다고 하는 등 폭언과 궤변을 서슴지 않았다. 이에 선생은 스티븐스의 죄악을 징치(懲治)하고, 한국민의 자주독립 정신을 세계만방에 떨치고자 그를 처단하기로 결심하였다.
1908년 3월 23일 아침 스티븐스가 워싱턴으로 출발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페리선창에 도착하자 그를 향해 총을 겨냥하려 할 때 한 남자가 나타나 스티븐스를 향해 권총을 쥔 채로 돌진하여 놀란 스티븐스와 격투가 벌어졌다. 그 남자는 전명운(田明雲)의사로서 스티븐스를 처단하기 위해 권총을 발사하였으나 불행히도 불발이 되자 그에게 달려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선생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권총을 연속 세발 발사하여 두발이 스티븐스의 가슴과 다리에 명중하였고, 한발은 전명운 의사의 어깨에 맞았다.
선생은 총성을 듣고 출동한 미국 경찰에 체포되어 구속되었다. 선생은 미국 법정에서 "스티븐스가 보호조약을 찬성하니 이것은 이천만 동포를 독살하려는 자이다. 이 도적을 죽이지 않으면 우리 동포가 반드시 멸망하게 되겠으므로 내가 신명을 내놓고 이 일을 한 것이다"라고 당당하고 의연하게 거사 이유를 밝혔다. 이러한 선생의 애국정신은 많은 동포들의 애국심을 고취시켰으며 심지어는 미국인들마저 선생의 거사에 대해 찬탄을 일으키게 하였다.
선생은 1908년 12월 미국 법정에서 징역 25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19년 1월 10일 가석방되었고, 이어 1924년 4월 10일에는 완전 자유의 몸이 되었다.
1927년 4월 20일 잠시 귀국하여 윤치복(尹致福)과 결혼하였으나 일본제국주의자들의 감시와 옥고로 인한 신병 때문에 그해 10월 11일 다시 샌프란시스코에 돌아가 생활하던 중 병고에 시달리다가 자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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