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新보수주의의 代父 어빙 크리스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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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新보수주의의 代父 어빙 크리스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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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사상가 列傳 (9)

 
   
  ▲ Kristol, Irving  
 

『新보수주의자, 종교적 보수주의자, 전통 보수주의자들의 「保守 大연합」 형성, 反體制 문화에 대응해야』

● 젊은 시절 스탈린주의, 트로츠키주의 섭렵, 1950년대에 「자유주의적 반공주의」로 전향
●「코멘터리」, 「인카운터」, 「퍼블릭 인터레스트」, 「내셔널 인터레스트」 등 잡지 활동 통해 新보수주의 이념 전파
● 1970년대에 WSJ 등과 新보수주의 미디어 네트워크 구축
● 가난한 자들에게 정치적 힘이 주어지면, 부유층과 권력층의 희생을 통해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빈곤과의 전쟁」 논리는 환상
● 新보수주의는 미래를 향한 비전 제시, 改善主義, 도덕적·규범적인 면 중시

헌팅턴, 자유주의자들의 轉向 예견

조지 W 부시 現 대통령과 그의 행정부는 新보수주의 르네상스에 의해 창출된 (지금의) 정치적 환경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현재 미국 정책을 이끌어 가는 新보수주의자(Neoconservative 혹은 Neocon)들의 代父 어빙 크리스톨(Irving Kristol)은 최근 미국기업연구소(AEI·American Enterprise Institute) 기고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치·사회 평론가, 언론인으로 일생을 보내온 크리스톨의 이념적 배경을 이해 하기 위해서는 먼저 미국 사회에서 보수주의와 자유주의가 갖는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세기의 석학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은 미국 보수주의의 근원은 자유주의 사상이라고 말한다. 미국은 시장경제, 개인의 자유, 제한된 정부 역할이라는 자유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 원리下에 건국되었다. 따라서 미국 보수주의는 태생적으로 反共주의, 反사회주의, 反전체주의 성향을 띠고 있다.

미국 보수주의의 또 다른 특징은 종교적 전통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을 바탕으로 형성된 미국 사회는 유태-기독교 (Judeo-Christian) 원리가 도덕적 규범으로 자리잡아 왔다. 미국에서 「보수주의」가 자유주의 정치·경제 체제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자유주의」 혹은 「진보주의」는 자유주의 체제를 변화시키려는 이념적, 사상적 체계나 정치·사회·문화 운동으로 봐야 한다.

미국內 자유주의 운동은 1930년대 이래 자본주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주로 左派的 시각에서 체제 변혁을 추구해 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빈곤과의 전쟁」(War on
soverty)을 통한 복지국가 건설, 反戰평화 운동, 民權 운동(Civil Movement) 등으로 표출되면서 미국 사회의 기존 질서에 도전했다. 자유주의자들은 경제·정치·교육행정 분야에서는 적극적인 국가 개입을 지지했으나, 종교·교육과정 및 내용·문화 분야에서는 더 많은 자유를 요구해 왔다.

헌팅턴은 『미국 자유주의 체제가 공산주의 체제로부터 위협받고 있는 상황下에서 자유주의 체제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미국內 자유주의자들도 보수주의로 돌아설 수밖에 없다』고 예견했었다. 그의 예견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 「新보수주의」 운동이다. 크리스톨에 의하면 新보수주의는 少數의 자유주의 학자·지식인들이 자유주의 사상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나 보수적 성향을 띠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후에 「新보수주의자」라고 불리게 되는 이 자유주의자들은 대부분 中下層 혹은 노동계층 출신의 지식인이었다. 이들은 대공황을 피부로 겪었고, 제2차 세계대전 에 참전했던 세대이다. 이들은 國內的으로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New Deal) 정책을 적극 지지했으며, 對外的으로는 공화당의 정통 보수 정책인 고립주의(Isolationism)를 반대했었다.

그러나 이들은 1960년대 민주당의 린든 존슨(Lyndon Johson) 대통령의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 정책에 깊은 회의를 품게 되면서, 점차 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세계관·인간관, 그리고 민주당의 정책에 대해 불신하게 된다. 「반항적 자유주의자」로 자신들을 규정했던 이들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자유주의 진영과 결별, 본격적으로 <新보수주의>로서의 正體性을 확립하기 시작한다.

공화당 本流의 非탄력성에도 비판적

新보수주의자들은 정치적으로는 민주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공화당을 지지하게 되지만, 정통 공화당 보수파의 非현실성·非타협성·非탄력성 등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따라서 이들은 공화당 本流와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1980년대 레이건 정부의 출범을 시작으로 행정부에 참여하기 시작한 新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사상을 정책으로 실현하면서 이후 美 보수주의 진영에 확고한 자리를 잡게 된다. 그리고 크리스톨의 말대로 현재 新보수주의는 부시 現 정부下에서 절정기를 맞고 있다.

新보수주의자들의 知的 방황은 바로 어빙 크리스톨의 인생 그 자체였다. 크리스톨은 1920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유럽계 유태인으로 경제적으로는 그리 넉넉하지 않은 中下流層이었다. 그의 집안은 유태교를 믿기는 했으나, 가족이 모두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지는 않았다. 어린 시절 크리스톨의 신앙심은 「유태교 학습에 대한 관심이 없었으나, 반항하지는 않는」 정도였다.

청년 시절에 접어들면서 크리스톨은 미국의 기독교윤리학자이자 정치학자인 *라인홀트 니버(뉴욕의 신좌익 사상중 하나, 우리의 경우, 미 공화당의 역사속에서 태동했던 "뉴라이트"의 이름을 빌어 행세하는 좌파출신 뉴라이트 인사들이 자주 인용하는 미국의 신 좌파사상. 맑은샘의 신좌익 사상비판 참조.) 의 저서를 탐독하는 등 기독교 사상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는 특히 기독교의 原罪論(원죄론)이 제시하는 인간이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는 도덕적 한계성」에 대해 절대적으로 공감했다. 그는 후에 『사람에게는 종교가 필요하며, 종교는 도덕적 전통을 만들어 간다. 그런 중요한 역할을 그 어느 것도 대신할 수 없다』고 말했다.

청년 크리스톨은 라이오넬 트릴링 (Lionel Trilling)과 레오 스트라우스 (Leo Strauss)의 사상에서 도 많은 감명을 받았다. 美 컬럼비아大 교수 겸 문학비평가인 트릴링은 『近代 前衛예술 사상과 진보주의 정치는 불일치하고 있다』면서 당시의 진보주의·자유주의 지식인 사회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懷疑的(회의적) 자유주의자」였다.

시카고大 교수였던 스트라우스는 古典 사상을 존중하면서도 當代의 보수적 시각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던 「회의적 보수주의자」였다. 미국 사회의 진보주의·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 정통 보수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新보수주의」 사상은 이 당시 이미 크리스톨의 마음속에 싹트기 시작했던 것이다.

1930년 뉴욕市立大에서 역사학 학사 학위를 받은 크리스톨은 대학 시절 *트로츠키 사상(전체주의 스탈린은 마르크스를 왜곡했다며, 다시 마르크스로 되돌아 가자는 트로츠키의 사상, 대개 무정부주의자(아나키스트)가 된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 김일성에게 숙청당했던 남조선 로동당 박헌영 같은 이를 생각하면 되고 실지 트로츠키도 스탈린에게 살해 당했다. 트로츠키 역시 좌파다.)에 심취하여 청년사회주의연합(Young People’ Socialist League)에 가입, 활동했다.

당시 중하류층이나 노동계층 출신 유태계 학생들이 많았던 뉴욕市立大에서는 급진 사상이 팽배해 있었다. 이들은 사회주의를 선호하면서 뉴딜정책을 적극 지지하고 있었다. 急進(급진) 학생들은 親스탈린系와 反스탈린系로 나누어져 있었다. 크리스톨은 처음에는 親스탈린 그룹에 속했으나, 스탈린 사상과 소련 지도자들의 지식인들에 대한 압제에 대해 회의를 품고 反스탈린 그룹으로 전향했다.

젊은 시절 스탈린주의, 트로츠키주의 섭렵

反스탈린 그룹은 트로츠키주의,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등 다양한 사상 그룹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크리스톨은 가장 큰 그룹이었던 트로츠키 그룹에 속해 있었다. 反스탈린주의 급진 학생들은 스탈린주의에만 몰두했던 親스탈린系 급진주의자들과는 달리, 정치학·경제학·사회학·인류학 등 여러 사회과학 이론을 학습했다.

당시 트로츠키 그룹에 속했던 많은 학생들이 후에 미국 지식인 사회의 지도자級으로 성장했다. 대표적인 예가 정치사회학자 세이머 마틴 립셋(Seymour Martin Lipset) 스탠퍼드大 교수와 「이데올로기의 종언」 등의 저자인 다니엘 벨 (Daniel Bell) 하버드大 교수 등이다.

크리스톨과 그의 동료들이 즐겨 읽던 잡지는 「뉴 인터내셔널」(New International)과 「파티즌 리뷰」(Partisan Review)였다. 「뉴 인터내셔널」은 트로츠키주의를 중심으로 하면서 그 밖에 마르크스주의 사상도 다루었다. 「파티즌 리뷰」는 문화지로 左翼系 反스탈린주의 前衛문화를 주로 다루었다. 크리스톨은 이 「파티즌 리뷰」에 매료되었는데, 특히 트릴링, 시드니 후크(Sydney Hook·뉴욕大 철학과 교수), 매리 매카시(Marry McCarthy·미국의 작가 겸 평론가), 해롤드 로젠버그(Harold Rosenberg·미국의 작가 겸 평론가)의 글들을 애독했다.

크리스톨은 『「파티즌 리뷰」는 특히 예술분야에 있어서 사회주의적 인문주의 (Socialist Humanism)와 1930년대 당시 反動的 정치관으로 비판받던 개인주의적 근대주의(Individualistic Modernism)을 절충하는 것이 근본 목적이었고, 그 과정에 섬세한 창의적 에너지를 표출하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대학을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크리스톨은 브루클린에 있는 「청년 트로츠키 」지부 모임에 참석했다. 그곳에서 그는 당시 18세이던 비(Bea)라고 불리는 知的이고 감성적인 여자를 만났다. 그녀가 바로 훗날 크리스톨의 인생 동반자이자, 知的 동료가 되는 부인 저트루드 힘멜하브였다. 처음에 저트루드의 부모는 크리스톨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두 사람의 결혼에 반대했다. 당시 초보 기계제작공이었던 그의 週給(주급)은 13달러89센트이었다. 후일 크리스톨은 당시 자신은 보헤미안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즐기던 다른 청년 트로츠키주의자들과는 달리 「부르주아지」였다고 회고했다. 그는 결혼을 위해 최선을 다해 돈을 벌려고 노력했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기계제작공들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週給이 22달러로 올라가자, 저트루드의 부모는 두 사람의 결혼을 승락했다.

『「시민적 자유권」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적용 안 돼』

결혼은 크리스톨이 트로츠키주의와 결별하는 계기가 됐다. 저트루드가 시카고大에 입학하게 되면서 크리스톨도 급진 지식인들의 도시였던 뉴욕을 떠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시카고에서 軍입대를 기다리며 그는 문학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 그는 文人들의 文體를 연구하면서 문필가로서의 인생을 꿈꾸었다. 그는 훗날 노벨 문학상을 타게 되는 솔 벨로(Saul Bellow)에게 자신이 작가가 될 잠재력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크리스톨은 西유럽 전선에서 싸웠다. 전쟁을 경험하면서 그는 종래 지니고 있던 권위에 대한 저항감을 씻어 버리게 됐다. 연합군들이 독일인을 약탈하고 여인들을 겁탈하는 것을 보면서 크리스톨은 인간 사회에는 法的·도덕적 통제와 규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됐다. 그가 1960, 1970년대 미국 反體制 문화 운동을 정면으로 나서서 비난했던 것도 전쟁에서 느낀 아노미 현상에 대한 우려와 경계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50년대는 크리스톨에게는 이념적으로 전환기였다. 그는 급진 左派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에 대해 온정적인 자유주의 지식인들에 대해서도 깊은 회의를 갖게 됐다. 크리스톨은 소위 「자유주의적 반공주의」 입장을 택했다. 그는 공산주의를 左派 사상의 극단적인 형태의 하나로 보면서 공산주의도 개혁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여기는 左派 자유주의자들을 경계했다.

크리스톨은 그런 주장의 허구성과 그들이 공산주의에 동정적이게 되는 이유를 밝히는 데 주력했다. 그는 西方 세계 및 제3세계 지식인들 사이에 유행병처럼 번져가는 좌파적 감상주의와 이상주의를 주시하면서, 『西方 세계의 이념적 혼란은 바로 지식인들, 학계·언론계에 퍼져 있는 좌파적 자유주의 사조 때문』이라고 역설했다. 크리스톨에게는 「冷戰」(냉전·Cold War)은 바로 당시 左派 자유주의들과의 싸움이었다.

1952년 미국은 매카시즘의 열풍에 싸여 있었다. 左派 자유주의자들은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公職에서 일할 수 있는 시민으로서의 자유권(Civil Liberties)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들 가운데는 한국전쟁에 대한 미국의 참여 동기를 공공연히 의심하는 자들도 있었고, 미국 공산주의자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북한을 지지하는 극단적인 자들도 있었다. 당시 뉴욕에서 새로 창간된 유태계 잡지 「코멘터리」 편집主幹(주간)으로 있던 크리스톨은 『미국 공산주의자들은 헌법이 규정하는 「公民權」(Civil Rights)은 갖고 있으나, 어느 미국인도 정부에서 일할 「당연한 권리(Right)」는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시민적 자유권」(Civil Liberties)의 개념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런 크리스톨의 주장은 자유주의자들 사이에 큰반향을 일으켰다. 이는 그의 이념적 轉向을 굳히는 또 다른 계기가 됐다.

新보수주의의 元祖 「퍼블릭 인터레스트」 誌 창간

크리스톨은 1953년 「문화자유회의」 (the Congress of Cultural Freedom·西歐 민주주의 사회의 親共 자유주의자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파리에 설립된 자유주의적 反共단체)로부터 영국에서 反共주의 잡지를 창간해 달라는 제안을 받고 런던으로 건너갔다. 크리스톨은 여기서 詩人이자 사회·정치비평가였던 스티븐 스펜서(Stephen Spenser)와 함께 「인카운터」(Encounter)誌를 창간했다. 「인카운터」誌를 후원했던 파필드 재단은 인도주의적 목적의 순수 기부금과 함께 美 CIA의 자금지원도 받았다. 이 때문에 훗날 크리스톨은 美 CIA와 연계가 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그는 美 CIA와 파필드 재단의 관계를 모르고 있었다. 美 CIA는 크리스톨을 CIA 요인으로 만들 생각도 했으나, 그의 급진주의자 前歷(전력) 때문에 그만두었다고 한다.

1958년 뉴욕으로 돌아온 크리스톨은 「리포트」誌에 잠시 근무한 후 「베이식 북스」 출판사 상무로 자리를 옮겼다.

1960년 미국 사회는 자유주의 운동이 절정에 이르는 시기였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일어난 反體制 문화 운동은 기존의 미국 문화를 뒤흔들고 있었다. 新좌파 운동으로 대변되는 급진 정치 운동은 노동 문제를 넘어서 소외·아노미·권위주의 등 현대 물질 사회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미국의 기존 권위 체제를 위협했다. 대학 캠퍼스를 중심으로 反戰 데모와 民權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는 「빈곤과의 전쟁」이라는 모토 아래 복지국가에 대한 열망이 강렬하게 일어나고 있었
다.

이러한 흐름에 대해 보수주의자들은 이렇다 할 代案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오히려 극단적인 입장만 취했다. 1964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보수주의자 배리 골드워터는 트루먼 前 대통령을 한국전쟁에서 勝戰(승전) 전략을 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회주의자라고 비난했다. 그는 뉴딜정책을 전면 부인했고, 民權정책에 반대했다. 보수주의를 대변하던 「내셔널 리뷰」誌도 극단적인 논조로 보수 진영의 의견을 전달하고 있었다.

이런 이념적 혼돈의 시기에 크리스톨은 1965년 新보수주의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퍼블릭 인터레스트」(the Public Interest)誌를 창간했다. 목적은 당시 정치·사회 문제에 대한 현실적 해결책을 찾는 것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크리스톨과 그의 동료들은 자신들을 자유주의자로 생각하면서, 정치적으로는 민주당을 계속 지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反體制 문화 운동과 新좌파 운동의 파도 속에서 크리스톨은 이미 보수주의 진영으로 들어와 있었다.

퍼블릭 인터레스트」誌의 筆陣은 대부분 중하류층 혹은 노동계층 집안 출신들이었으나, 「전투적인 정치 성향은 빈곤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정치적 힘이 주어지면, 부유층과 권력층의 희생을 통해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빈곤과의 전쟁」 논리는 환상이며, 그와 같은 논리를 바탕으로 한 「위대한 사회」 건설이라는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은 사회주의자들의 계급투쟁론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新좌파적 강령에 실망, 민주당과 결별

1972년 조지 맥거번(George McGovern) 의원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고, 新좌파적 강령이 채택되자 크리스톨은 민주당과 결별했다. 이는 크리스톨이 자유주의 진영을 떠난다는 것을 對外的으로 선언하는 것이었다. 「월스트리트 저널」의 로버트 바틀리(Robert Bartley)는 『새로운 바람이 일어나고 있다』면서 「크리스톨과 그의 친구들」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는 「퍼블릭 인터레스트」와 新보수주의자들에 대한 대중적 인지도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1970년대 중반은 新보수주의자들에게 있어 정치적 분수령이 됐다. 카터 당시 대통령의 외교정책에 실망한 新보수주의자들은 대부분 민주당을 떠나 공화당으로 전향했다. 그들은 근거지를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옮겼는데, 이는 新보수주의자들의 현실정치 참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시드니 후크의 주선으로 뉴욕大 경영대학원 교수로 있던 크리스톨도 1976년 워싱턴에 있는 미국기업연구소(AEI)로 자리를 옮겼다. AEI는 원래 보수 성향의 경제전문연구소였으나, 소장 빌 바로디 (Bill Baroody)는 종교·정치·철학과 기타 사회과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1970년대, 1980년대 바로디를 통해 레이건 행정부 때 유엔 대사를 지낸 진 커크패트릭 (Jeane Kirkpatrik), 신학자·사상가·언론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마이클 노박 (Michael Novak) 등 상당수의 新보수주의자들이 AEI와 인연을 맺었다. AEI의 후원자인 브래들리 재단과 존 M 올린 재단의 경영진에는 마이클 조이스 (Michael
Joyce) 등 新보수주의 지지자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1970년대 중반 크리스톨은 경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그때까지 그는 케인즈의 이론이 시장경제 메커니즘을 가장 잘 설명하며, 정부의 기술적인 회계 운영으로 성장과 균형의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과 불황을 동반한 스태그플레이션 상황 속에서 크리스톨은 「월스트리트 저널」 논설위원이었던 주드 와 니스키로(Jude Wanniski)부터 새로운 보수주의 경제학이라 할 수 있는 「공급 측면 경제학」을 접하게 됐다. 그는 稅率(세율)을 내려 투자를 높이고 경제 성장을 지속시킬 수 있다는 「공급 측면 경제학」의 논지에 공감했다. 크리스톨은 후에 레이건 대통령 에게 「공급 측면 경제학」 이론을 설득시킨 잭 켐프(Jack Kemp) 의원과도 친분을 갖게 됐다.

冷戰 종식을 앞둔 1980년대 중반 크리스톨은 다시 외교문제로 눈을 돌려 「내셔널 인터레스트」(the National Interest) 誌를 창간했다. 「퍼블릭 인터레스트」가 국내 문제에 대한 新보수주의의 견해를 대중들에게 전달해 주는 매체라면, 「내셔널 인터레스트」는 국제 문제 전문지이다. 두 잡지는 크리스톨이 운영하는 「내셔널 어페어즈」(National Affairs Inc.)에서 발간되는데, 헨리 키신저 前 美 국무장관, 진 커크패트릭 前 駐UN 미국 대사, 찰스 머레이(Charles Murray)가 자문위원으로 있다.

2002년 크리스톨은 조지 W 부시 美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자유 메달」을 받았다. 현재 그는 미국기업연구소(AEI)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아들 윌리엄 크리스톨은 부시 現행정부의 외교안보팀이 가장 즐겨 읽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新보수주의의 대변지 「더 위클리 스탠다드」(The Weekly Standard)의 편집인으로 있다.

新보수주의 미디어 네트워크 구축

크리스톨은 미국 보수주의를 단순한 「정치 행위」가 아닌 「대중 운동」으로 이해하면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보수주의는 세 단계를 걸쳐서 변화해 왔다고 본다.

첫 번째는, 1964년 美 공화당 대통령 후보 골드워터의 선거戰으로 대변되는 공화당 정통 보수주의 부활 운동이다. 이 움직임을 대중화한 것은 「내셔널 리뷰」誌였다. 크리스톨은 「내셔널 리뷰」誌는 공격적이고 통속적이었을 뿐, 체계적이고 이론적인 보수주의 代案을 내놓지 못했다고 본다. 특히 극단적인 「反국가주의」에 입각해 뉴딜정책을 전면 부정하는 바람에 대중들에게 공감을 얻지 못했다.

두 번째는 「新보수주의」의 등장이다. 1965년 「퍼블릭 인터레스트」誌의 창간으로 대중성을 띠기 시작한 新보수주의는 1970년대에 들어와 「코멘터리」誌와 「월스트리트 저널」이 新보수주의 논지에 공조함으로써 전국적인 미디어 네트워크를 구축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新보수주의는 많은 정치인들과 평론가들의 주목을 받게 됐다.

新보수주의는 세 가지 측면에서 정통 공화당 보수주의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 넣었다.

첫째, 미래 지향적인 태도다. 新보수주의는 기성의 보수주의처럼 「안정과 현상 유지」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고 희망을 불어넣는 진취적인 보수주의를 추구한다. 이는 新보수주의가 현실을 바꾸려는 자유주의 운동으로부터 발전해 왔기 때문이다.

둘째, 改善主義이다. 「퍼블릭 인터레스트」誌가 비록 존슨 행정부의 「위대한 사회」 정책을 비판하긴 했지만, 정통 보수주의의 非타협적 태도와는 달리 사회복지제도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新보수주의는 경제 성장을 계속 유지하면서 복지국가를 실현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代案을 제시하고자 한다.

크리스톨은 『공화당 보수주의자들은 비즈니스 멘털러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현실 정치감이 없으며, 예산 수지 균형에만 매달려 보수적 사회복지제도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셋째, 新보수주의자들은 지식인 출신이기 때문에 철학적·이데올로기적 측면을 중요시한다. 정책 결정에 있어서 효율성에 우선 순위를 두는 정통 보수주의에 대해, 新보수주의자들은 도덕적·규범적인 면에 더 중요성을 둔다.

『미국 보수주의가 건재한 것은 新보수주의 때문』

크리스톨은 미국 보수주의의 세 번째 변화 물결은 「종교적 보수주의」의 등장이라고 말한다. 「종교적 도덕주의」는 미국 건국 시기부터 사회 底邊(저변)에 흐르고 있는 보수주의 성향이다. 「종교적 보수주의」가 정치 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전투적 자유주의」와 「세속주의」 때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기독교인들 눈에는 미국 사회가 세속적인 타락의 길을 걷고 있는 것으로 비쳤다. 세속주의·자유주의 思潮(사조)가 민주당·교육계·사법계·언론계를 휩쓸고 있었다. 종교계까지도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고등학교에서는 동성 연애와 관련된 출판물이 자유자재로 배포되고 10代 청소년들에게 아무 거리낌 없이 콘돔이 나누어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대법원은 십계명을 교실 벽에 거는 것을 금지하는 판결을 내렸다.

자신들의 생활과 가치관이 정치·사회 제도권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다고 느끼기 시작한 기독교인들은 점차적으로 정치세력화하기 시작했다. 「기독교 보수주의」라 불리는 이들은 공화당 정통 보수주의와의 연합을 시도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효율성을 중시하는 정통 보수주의자들과 미묘한 가치관적 차이가 있었다. 그 극단적인 예가 포르노 산업에 대한 것이다. 크리스천 보수주의자들은 포르노 산업의 확산을 강력 반대하는 반면, 자유 경쟁 원칙을 중시하는 보수주의자들은 산업 규제 철폐라는 관점에서 문제를 접근했다.

크리스톨은 종교적 보수주의 운동이 미국 보수주의 향방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보지만, 현재로서는 新보수주의가 미국 보수주의의 대세를 이끌고 가고 있다고 본다.

최근 크리스톨은 「新보수주의 신조」에서 다음과 같이 新보수주의적 르네상스를 통한 미국 보수주의의 확립과 그 정당성을 설파했다.

<新보수주의는 미국 보수주의의 20세기 첫 번째 변형으로 철저히 미국적이다. 미국의 보수주의가 유럽의 보수주의보다 더 건재하고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것은 바로 新보수주의 때문이다. 新보수주의의 역사적 과업과 정치적 목적은 공화당과 미국 보수주의를 민주주의 체제에 적합한 새로운 보수주의로 전향시키는 것이다. 20세기 新보수주의 영웅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로널드 레이건이며, 대중적 인기가 높은 공화당 대통령들이 출현했던 것은 바로 그들이 지닌 新보수주의 성향 때문이었다>

크리스톨이 冷戰을 종식시킨 로널드 레이건과 함께 20세기 초 일련의 정치·경제·사회 개혁을 추진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 뉴딜정책을 추진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新보수주의의 영웅」으로 꼽은 것은 그가 정통 보수주의자들과는 달리 복지에도 관심을 기울이면서, 사회 모순의 극복을 위해서는 제한된 범위에서 국가가 개입하는 것을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反體制 문화에 대항하는 보수 大연합 주장

크리스톨은 新보수주의에 기반한 보수주의의 르네상스를 위한 정책으로 다음 세 가지를 제시해 왔다.

첫 번째,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보수주의적 복지정책의 확립이다. 크리스톨은 레이건式 공급 측면의 경제정책으로 세율을 낮춰 투자를 활성화시켜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레이건의 정책이 막대한 재정 赤字 등 후유증을 가져왔던 것은 이론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운영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반박한다. 그는 초기 민주주의 사회는 자산가와 無産者들 간의 파괴적인 계급 갈등이 끊이지 않았던 정치 체제였음을 상기시키면서, 근대 민주주의 체제에 정통성과 지속성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모든 구성원들이 비록 동시에 혹은 균등하게는 아닐지라도 더 번창한 삶
을 살 수 있게 하는 경제성장이라고 강조한다.

성장 논리를 주장하나, 뉴딜정책의 지지자였던 크리스톨은 정통 보수주의자와는 달리 복지정책 역시 중요하게 여긴다. 다만, 국가에 의한 소득의 분배라는 「사회 정의」 이론에 입각한 복지정책이 아닌 「보수적 복지정책」을 택할 것을 주장한다.

그 핵심은 세율을 높이기보다는 의료 보험금 등 복지정책 수혜 대상 항목에 대한 비용 지출에 대하여 세금 공제 혜택을 주는 것이다. 크리스톨은 1960년대에 수많은 흑인 가정이 파괴되고 사회적으로 도덕적 가치관이 흔들린 것은 사회보장제도의 지나친 확산으로 일을 하려고 하기보다는 국가가 주는 혜택에만 의존하려는 성향이 높아지면서 家長의 책임감이 없어지고 그 권위가 실추된 데 원인이 있다고 본다. 따라서 크리스톨은 복지정책은 개인의 자립성을 증진시키면서, 국가의 과도한 개입을 방지할 수 있도록 추진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두 번째, 「反體制 문화」에 대한 보수 연합이다. 「反體制 문화」는 「新계급」으로 불리는 지식인 그룹이 주도하는 포스트모던 문화를 가리킨다. 크리스톨은 이 「新계급」을 미국의 가치관을 형성하고 있는 자본주의, 개인주의, 기독교 전통 그리고 理性主義를 부정하는 파괴적인 요소로 본다. 정치에 있어서 底邊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그는 新보수주의자들이 종교적 보수주의자들, 정통 보수주의자들과 「保守 大연합」을 형성해서 反體制 문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해야만 보수적 사회 질서를 유지해 나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애국주의는 건전하고 자연스러운 것』

세 번째는 現 부시 행정부의 강경 외교 정책의 지속적인 추진이다. 크리스톨은 다음 네 가지를 주장하고 있다.

첫째, 애국주의는 건전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적극 권장되어야 한다. 이는 現 부시정부가 미국인들의 전투적 애국심에 호소하며 反테러 전쟁,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공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는 것과 상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세계 정부는 세계 專制(전제) 정치로 가는 길이며, 세계 정부 구성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하는 국제기구 역시 의심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주장은 미국의 일방주의적인 외교정책을 지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 敵과 동지를 명확하게 구분해야 한다.

넷째, 미국의 國益은 地政學的인 요인 외에도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에서 定義되어야 하며, 反민주주의 국가들의 위협으로부터 민주주의 국가들을 방어해야 한다.

크리스톨은 『미국은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한 유일 초강대국으로 自意에 의하건, 他意에 의하건 군사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면서 現 정부의 전투적 강경정책을 지지한다. 그는 또 공화당 전통 외교정책인 고립주의는 미국이 유일 초강대국으로 남은 現국제질서 아래서는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그에 대한 유일한 代案은 新보수주의 정책이라고 강조한다. 

 
   
  ▲ Kristol, Irving  
 

Kristol, Irving

[EXCERPT FROM: The Feeding Trough, by Phil Wilayto].

Irving Kristol, a Depression-era student - radical - turned - reactionary, is often called the "godfather" of the neoconservative movement. He founded and edits The Public Interest, one of the first conservative publications to actively address issues of culture, religion and "values," as opposed to simple reactive hostility to the New Deal liberal politics of the 30s.

A former professor (of Social Thought-- whatever that is!) at New York University and a frequent contributor to The Wall Street Journal, Kristol has long been associated with the American Enterprise Institute (AEI). He played a pivotal role in the recruitment of conservative and formerly liberal writers, professors and intellecturals into the neoconservative movement. His son, William, was chief of staff to former Vice President Dan Quayle and principle director of the "Bradley Proejct on the 90s."

Irving Kristol says that he personally arranged for Wall Street Journal editorial writer Jude Wanniski to get a grant from the AEI to write the first book on supply-side economics. Says Kristol, "It was Jude who introduced me to Jack Kemp, a young congressman and a recent convert. It was Jack Kemp who, almost single-handed, converted Ronald Reagan to supply-side economics."

To give a flavor of the racial politics of these characters, here's a quote by Irving Kristol from a 1991 essay entitled "The Tragedy of 'Multiculturalism'":

"Though the educational establishment would rather die that admit it, multiculturalism is a desperate -- and surely self-defeating -- strategy for coping with the educational deficiencies, and associated social pathologies, of young blacks. Did these black students and their problems not exists, we would hear little of multiculturalism." ["Neo-Conservativism, The Autobiography of an Idea, Selected Essays 1949-1995" by Irving Kristol.]

-- The Feeding Trough

[EXCERPT FROM: The Idea Brokers: Think Tanks and The Rise of the New Policy Elite, by James A. Smith, 1991]:

Kristol is the editor of The Public Interest and a professor of social thought at New York University. For many years Kristol made his Washington base of operations at the American Enterprise Institute...Kristol, in particular, serve[d] as a broker between conservative funding sources and the Washington-based research organizations, [and] supplied new arguments--if they were really needed--for supporting AEI and similar research endeavors...

Kristol and other neoconservatives infused conservative intellectuals, executives of foundations, and corporate donors with a missionary zeal. He announced to his readers, in an essay in the Wall Street Journal (provoked by the resignation of Henry Ford II as a trustee of the Ford Foundation), the "fact" that most large foundations and major universities "exude a climate of opinion wherein an antibusiness bent becomes a perfectly natural inclination."

With a polemical style that managed simultaneously to accuse and retract, he conceded that foundations and universitites "are not homogeneous or totalitarian institutions" but that they tended to be populated by a "New Class" that was hostile to the private sector and more sympathetic to the public sector. This "New Class," a term borrowed from Milovan Djilas's analysis of the Communist party functionaries who controlled the economies of Eastern Europe, seemed in the American context to mean primarily those white-collar professionals whose careers depended on the public sector. Kristol included scientists, lawyers, city planners, social workers, educators, criminologists, sociologists, and public health physicians whose hidden agenda, he discerned, was to propel the nation toward an economic system "so stringently regulated in detail as to fulfill many of the traditional anticapitalist aspirations of the Left."...

...Kristol asked whether it was in the long-term interest of corporations to continue to support institutions that had proved so hostile. He appealed for a more discriminating corporate philanthropy that would identify and support those academics and intellectuals who believed in a strong private sector. Though they were few, they could be found, he insisted. And through the *Institute for Educational Affairs which he and William E. Simon founded in 1978, financial resources directed toward sympathetic scholars and the research projects of think tan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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