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 저수지에서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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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 저수지에서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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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를 피해 얼떨결에 떠난 여행아닌 여행

호기심이 많기도 하지만 겁도 많은 사람이 바로 ‘나’다. 전부터 집의 맞은 편 산허리를 지나가는 마을버스를 보면서 저 산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지만, 선 듯 알아보러 나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여름날의 하루, 마침 방학이라 별로 할일이 없던 친구를 구슬리는데 성공했다. ‘멍하니 책만 보고 있지 말고 그곳에 한번 가보자’고, 또 ‘혹시 그곳에 우리가 모르던 아름다운 경치라도 있을지 모르는 일이 아닌가’ 라고. 거기다가 나는 ‘생각보다는 멀지 않은 곳에 괜찮은 곳이 숨겨져 있는 일이 많은 법이다’란 말까지 추가했었다.

그 말에 설득이 되어선지, 아니면 자신도 여름날 푹푹 찌는 더위가 주는 무료함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던지 친구는 나를 따라 그곳을 향해 나섰다. 집에서 마시고 나온 시원한 콩국의 냉기는 맞은편 산 입구에 가기도 전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친구는 나를 따라나선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사실 길을 나선 것을 후회하고 있었던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필이면 이렇게 더운 날에 길을 나서다니...’

어쨌든 우리는 한참을 투덜거리다가 마침내 그 산을 넘어 들어가는 마을버스를 탈수 있었다. 버스가 비틀거리며 조금을 달리자 우리는 탄성을 금할 수가 없었다. ‘도시의 한 구석에 그런 곳이 있다니!’ 그곳은 그냥 시골이었다. 산을 넘어서자 산비탈 조그만 틈새마다 빼곡히 밭이 들어차 있었고, 농부차림의 사람들이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무언가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던 우리는 “어디까지 가세요?”하고 물어오는 기사아저씨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정쩡히 않아있던 우리는 종점에서 아주머니 한분과 같이 내렸다. “총각” 당시 사람들이 우리를 부르던 호칭대로 아줌마는 우리를 그렇게 불렀다. “놀러 온 모양인데, 어디 갈데없으면 저-어기 우리 집에 와서 삼계탕이나 먹고 가지...” 아줌마가 가리킨 곳은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 위에 보이는 기와집이었다.

버스는 내렸지만, 갈 곳이 막연했다. 금방 목이 말라진 우리는 버스종점에 있는 조그만 가게에서 음료수를 하나 사서 마시면서 가게주인 아저씨에게 물어보았다. “아저씨, 여기엔 어디 갈만한 곳이 없어요?” 아저씨는 뜻밖의 질문을 한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갈 곳이 없긴 왜 없어. 여기가 전부 물 천지인데. 이 길을 따라서 조금만 가면 바로 저수지야. 여기에 학생들이 많이 놀러들 와요.”

그 아저씨 말 대로였다. 흙길을 따라서 조금 걸어가자 바로 물이 나왔다. 수원지를 따라 한여름의 물기를 잔뜩 머금고 늘어져 있는 버드나무 가지 사이로, 거의 호수라고 할만한 커다란 저수지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파란 개구리밥이 떠도는 물가를 걷다가, 우거진 풀밭에 드리워진 그늘 아래에 우리는 드러누웠다. 무더운 여름날의 길을 걷기것이 힘들기도 했지만, 경치가 워낙 아름다워 그냥 그렇게 누워만 있어도 충분히 좋았던 것이었다.

그렇게 여름날을 즐기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빗방울이 하나둘 내리기 시작했다. 여름날의 비는 금세 소나기로 변하는 법이다. 우리는 급하게 뛰었다. 비를 주룩주룩 맞으며 버스정류장에 도착하자, 가게주인 아저씨가 안됐다는 듯이 혀를 차며 “버스는 저녁이나 되어야 오는데!” 라고 말한다. 가게 앞 추녀는 한 뼘도 채 되지 않았고, 가게 안은 주인아저씨 한 사람이 겨우 들어설 공간밖에 없었다. 그때 아까 버스에서 내릴 때, 갈데없으면 오라고 하던 아주머니 생각이 났다.

언덕위에 빤히 보이는 기와집은 생각보다는 그리 가깝지 않았다. 비에 흠뻑 젖을 만큼 걸어 이제 거의 다 왔다고 생각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이었다. 웬걸. 저수지가 좁아지며 여울져 흐르는 물길이, 그 집이 있는 언덕과 우리가 서 있는 길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아닌가! 비에 몸이 젖을 대로 젖은 우리는 그만 질퍽한 땅바닥에 주저 않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낭패였다.

그런데 굵은 빗줄기 사이로 강가에서 그 언덕 아래로 향하는 밧줄이 하나 걸려있는 것이 언 듯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 밧줄 밑에는 드럼통을 반으로 잘라놓은 듯한 ‘배아닌 배’ 같은 것이 걸려있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흔들리는 드럼통에 두 사람이 올라탔다. 그러나 도무지 어떻게 해야 그 ‘배’를 움직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노도 없었고, 밀대로 쓸만한 작대도 없었다. 이리저리 궁리를 해보다 줄을 잡고 당기니, 거짓말같이 배가 언덕 쪽으로 움직여 가는 것이 아닌가. 억수같이 내리는 비를 맞으면서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고 환하게 웃었다.

언덕위에는 널찍한 마당을 가진 제법 큰 기와집이 있었다. 시골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그런 기와집이 아니었다. 혹시 이집이 아닌 것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둘러보았다. 닫힌 대문 한 구석에 한문으로 삼계탕이라고 커다랗게 써놓은 글이 붙여져 있는 게 보였다. 그제야 안심하고 큰 소리로 대문을 두들겼다. 조금 뒤 낮에 본 그 아주머니가 문을 열어주었다.

“아이고, 이렇게 비를 쫄딱 맞고서...”

아줌마는 비에 젖은 생쥐 모양인 우리를 반겨 맞아주었다.

아주머니가 준 수건으로 대충 딱았지만, 온몸에 배인 물기는 자꾸만 우리가 자리 잡은 대청마루에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추위 덜덜 떨면서도 조금 정신을 차리고 나니 머리에 내가 가진 돈이 없다는 것이 생각났다. 친구에게 물어보았다.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혹시나 해서 아무리 주머니를 뒤져도 돈이 없이 별로 없었다. 애당초 갑자기 마음이 동해서 버스타고 구경이나 가자고 떠나온 걸음이던 것이다. 비가 내리자 급한 마음에 달려오기는 했지만, 저마다 친구의 주머니 사정을 몰랐던 것이었다.

아주머니는 다행히 “상관없다. 몸이나 녹이고 가라.” 고 하시며 천 원짜리 한 장을 겨우 내미는 우리에게 고추와 오이, 푸짐한 파전과 함께 소주 한 병을 내주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당시 물가로도 천원으로는 어림도 없는 것이었다. 피부 속까지 젖은 비가 가져다주는 한기에 벌벌 떨리던 몸에 소주 몇 잔이 들어가자, 우리는 금세 기력을 찾을 수 있었다. 그제야 우리의 귓가에 두둑-두둑- 커다랗게 소리를 내며,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던 그 엄청난 빗소리가 제대로 들어왔다.

처음에 우리는 몸에서 떨어지던 물이 마루를 적시는 것이 싫어서 제자리에 가만히 쪼그리고 있었다. 몸이 좀 마르자 술기운이 돌기 시작하자, 큰 기와집 여기저기를 슬슬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상당히 규모가 크고 기품이 있어 보이는 집이었다. 우리가 않은 큰 대청마루 뒤편에는 쇠 고리로 닫긴 문이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마침내 그 문을 열어버렸다.

순간 “아-” 하는 경탄이 절로 나왔다. 그 문 아래로 커다란 저수지가 그림같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저수지의 물을 들이키며 언덕 아래에서부터 자라서 올라온 수백 년은 되었음직한 아름드리나무가 바로 눈앞까지 풍성한 가지를 펼치고 있었다. 그리고 하늘위에서부터 저 아래 저수지까지 온 세상을 뿌옇게 회색으로 칠을 한 듯이 내리는 한여름의 소낙비가 짙푸른 녹음을 덥고 있었다.

시원하게 하늘에서 내려오는 그 빗줄기. 푸름으로 가득하던 그 저수지. 그리고 끝없이 내려오던 그 장한 비. 고생 끝에 만난 아주머니의 따뜻한 인심. 그리고 비 오는 저수지의 그 아름다운 풍경.

한여름의 지루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얼떨결에 떠난 그 여행 아닌 여행의 추억은, 아직도 내 가슴에 젊은 날의 가장 아름다웠던 추억중 하나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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