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사건은 반자유민주주의의 폭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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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사건은 반자유민주주의의 폭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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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유족회등 "4.3사건 희생자로 선정된 이들을 ‘폭도'로 규정"

 
   
  ▲ 제주 4.3사건 위령제에서 묵념하는 노무현 대통령
ⓒ 청와대 홈페이지
 
 

“제주4·3사건, 反국가적 무장폭동”

우파단체들이 노무현 정권의 ‘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 폐기’를 비롯 ‘4.3평화공원’ 공사를 즉각 중단시킬 것을 대통령직인수위에 진정한 것으로 알려져 진상규명이란 미명아래 좌파정권 하에서 빚어진 각종 역사왜곡의 사건들이 속속 드러나고있다.

지난 29일 건국유족회 제주유족회·자유시민연대·대한민국수호연합 등 5개 시민단체가 최근 대통령직 인수위 측에 전달한 진성서는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가짜로 작성됐으며, 4.3사건 희생자로 선정된 이들을 ‘폭도'로 규정했다.

또 이들 단체는 “4.3역사를 통해 비극의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세계적 평화공원으로 추진되고 있는 제주시 봉개동 4.3평화공원은 ‘폭도공원’”이며 “국군과 경찰을 증오와 타도의 대상이 되게 하고 대한민국을 적화통일 학습장으로 만들려 한다는 ‘역사왜곡’” 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이들 단체는 인수위측에 전달한 진정서를 통해 "4.3진상보고서의 즉각 폐기와 4.3폭도공원 공사 즉시 중단, 진상보고서를 작성한 전문위원(16명)을 사임시킬 것"을 대통령직 인수위 측에 전달하는 한편, 현 정권이 지난 2003년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를 확정하고, 이를 토대로 노무현 대통령이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사과하자 ‘위헌’이라며, 이듬해 헌재에 위헌심판소송을 제기했으나 각하 된 바 있다.

제주 4.3사건 진단

기자가 본 "역사의 현장"광복에서 제 5공화국까지의 역사의 기록에서

그러면 어떻게 하여 이 엄청난 비극이 조용한 한라산에서 발생하여 이 유혈극을 남겼던 것일까, 8.15 해방은 이 땅에 여러 가지 변화를 일으켰지만 그 중에서도 남해 고도 제주도에 끼친 영향은 막대한 것이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이 섬의 주민들은 오랫동안 그들 서로간에 얽힌 혈연 관계 때문에 거의 모두가 사돈의 8촌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사상적으로 어떤 죄과를 범했다 해도 이 곳 경찰은 철저하게 처벌할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기밀은 누설되고 또한 8.15와 더불어 일제히 공세를 취하여 온 공산계열의 침투 공작에 대처하여야할 행정적인 기능이 그다지 철저하지 못한 점 등이 누적되어 하나의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할 수 있는 소지가 마련 되었던 것이다.

민족정기에 불타는 뜻있는 청년 지사와 민족진영이 있었으나 그 당시의 객관적 조건의 미비와 함께 주관적 약체는 그들의 웅지를 무참히도 좌절시키고 좌익의 철막 밑에서 침체와 암흑이 계속 되어오던 이 섬에 강압의 찬서리가 내리자 좌익분자들은 일제히 지하로 들어가 집요하게 흉악한 음모를 꾸몄다.

당시 육지로부터 스며든 애국 청년들의 정치 운동이 활발해지자 광명을 찾던 제주도 민들에게는 갑자기 활기를 갖다준 민족주의 국민 운동의 노선은 지하에 잠복한 좌익 계열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였으며 드디어 그들의 음모에 결정적인 자극을 줌에 이르렀다.

태평양 전쟁 때 일본이 본토 작전 최후의 결전장으로 구축한 대소 각양의 진지에 항복하여 철수할 당시 숨겨져 있던 총기를 파내어 이를 이용함으로써 그들의 만행은 시작되었으며 무분별한 학살과 파괴와 방화가 자행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온상지에는 행정을 맡고 있는 관공리 가운데 도민 출신의 좌익 계열이 대부분 그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전도민을 움직일 수 있는 보다 좋은 여건이 되었다.

제주도에서는 당시 남로당 전남 도위원회 산하에 민애청, 민주 여성 위원과는 별도로 군사부가 있었다. 이 군사부 아래 소위 인민해방군이라는 것이 조직되어 각 읍면에 중대 편성을 하고 있었다.

군사부 최고 간부급에는 과거에 일본 군대에서 그리고 팔로군 등에서 상당한 훈련을 받은 자도 있었고 각 촌락에서 강제징발한 청년을 일선에 몰아 세우고 팔로군 등이 산악 지대에서 상투적으로 쓰고 있는 소위 나와 전법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총인원은 약 천명에 달했는데 그들의 협박으로 혹은 선전에 빠져 살길을 찾아 행동을 같이 한자를 합하면 약 2천명에 달했다. 이러한 규모의 폭도 유격대들은 순경 1만원, 경사 2만원, 경위 이상 3만원씩을, 그 중에서도 경찰 유력자는 1백만원의 살인 현상금을 내걸고 경찰관의 살해를 촉구하였다.

따라서 각 읍면에서는 후원대를 조직하여 물자를 공급케하고 "목포에까지 김일성 장군이 도래하였으니 안심하라"는 소문을 퍼트리면서 등사판과 종이를 준비하여 방공호 진지 안에서 삐라 신문까지도 발행하고 있었다.

해방전 인구 15만명이 고작이던 제주도는 8.15와 더불어 인구 가 30만으로 불었다. 일본 대판과 구주 등지에서 종전과 함께 주민들이 돌아온 것이다.

이 가운데는 일본군에서 복무하던자, 중국 팔로군에 있던자, 그리고 오랫동안 섬을 떠나 객지생활을 하던 끝에 과격한 사상에 빠진 자 등 그 구성 성격이 다양했다.

이조 400년 동안에도 본토와 거의 두절 상태에 빠졌던 제주 도민은 고(高) 부(夫) 양(梁) 3성의 원주민들을 제외하고는 대게가 고려 말엽부터 이조 초 중기에 이르기까지 간신배들에게 몰려 유형을 당한 자손들로 거의 모두가 선한 핏줄을 이어 받은 사람들이다.

해방이후 갑자기 공산주의를 열열히 지지하고 나올 까닭도 없었다. 또한 이곳 주민들은 본토 원주민과 고려, 이조 때 조정에서 버림 받은 사람들을 조상으로 하는 동시에 오랫동안 중앙 문화와의 교류가 단절되었기에 어부, 농부 또는 초부로서 그날 그날 생계를 유지하는 순박한 섬주민들이 해방과 더불어 이 땅을 휩쓴 공산주의라는 것을 신봉 할 까닭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극의 대사건은 발생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조용했던 한라산 기슭에서 울린 요란한 총성은 이 전설어린 섬나라를 유혈극으로 만들었다.

그 날 새벽을 기해 일제히 일어난 폭동은 경찰 무기 탄약고를 습격하여 제주시 경찰서를 습격 방화하는 등, 비극은 순식간에 도처에서 발생했다.

4월 3일 아침부터 시작된 유혈극으로 5.10선거가 치러지기까지 경찰관 12명과 그 가족 6명이 참살 당하고 중상자가 경관 21명, 가족 3명, 민간인 사망 37명, 중경상자 58명, 관공리 사망 5명, 부상자 9명, 방화 45건, 납치 경찰관 2명, 양민 19명이다.

뿐만 아니라 사건 발단 이래 도내 400개 부락 가운데 295부락이 전소되고 12250호가 불에 타고 면 사무소 12개중 소실 5개소 경찰서 소실 12개소, 학교 소실 34개소, 우체국 소실 1개소, 기타 통신기관을 비롯한 각 관공서의 파괴 등 사상자와 이재민 10만명 이라는 놀라운 희생과 국가의 재산이 재가 되었다.

매국 공산 도배의 잔학한 만행에 국민의 의분이 한층 뒤끓어 마침내 매국 도배들을 소탕 하려는 국군과 경찰의 총성은 끓이지 않았다

22일간의 인민공화국 천하

4.3사건이 발생하고 난 얼마 동안까지도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유격전을 감행하던 제주도의 폭도 세력은 막대한 것이었다. 공산폭도의 총사령관 이덕구(32)는 지리적으로 지형이 험하고 높은 풀숲과 장글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월남의 베트공 게릴라전술) 천연적인 군사기지를 만들었다.

원래 주모자는 김달삼이었지만 그는 사건의 전개가 불리해지자 해주로 도피하였다. 그들의 20여일에 걸친 천하는(광주사태 9일천하) 경비대와 국군이 27일 반격을(광주사태 도청 탈환일도 27일자)개시함으로써 무너지기 시작하였으나 그들은 밤마다 부락을 돌아다니며 음식이 될 수 있는 것은 모두 강탈하기 시작하였으니 이른바 낮이면 대한민국이고 밤이면 인민공화국이 되는 세상이 시작됐다.

국군은 그동안 삐라와 담화로 여러번 폭도들에게 귀순을 권고하였으나(광주사태시 최규하 대통령의 광주상공 헬기 방송)폭도측은 이에 불응할 뿐만 아니라 더욱 흉악한 본성을 드러내 국군과 경찰은 눈물을 머금고 조국과 도민을 살해하는 매국 도배의 소탕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도민들은 사건 발생이후 국군이 바뀔때마다 또 경찰대가 바뀔 때마다 당국 수뇌부에 대하여 기탄없는 호소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국자들은 민중의 여론과 비판에 귀를 기울일 수 없었다. 그 원인은 대체적으로 제주도 도민들이 과거에 좌익의 과오를 범하였기 때문에 항상 위협을 느끼고 있었던 것에 기인한다.

확실한 죄가 없었던 사람들과 기회주의자적 태도를 취해왔던 사람들도 당국으로부터 언제 어떤 의심을 받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태하에서는 당국에 대한 일종의 원망은 있을지 모르나 진정한 충고나 호소는 없었다. 다만 국군과 경찰에 충실한 체 하는 자들만이 당국의 호감을 사기에 급급했을 뿐이었다.

때문에 실패는 실패대로 솔직히 호소하는 진실한 비평이 당국자의 귀에 들어가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도민들은 서로 중상 모략을 하여 이에 따른 희생자가 속출하는 것 도 어쩔 수 없었다. 이 4.3사태로 인해 원주민들은 사상 유래 없는 참혹한 고통을 받았다. 매일 밤마다 10여명씩 짝을 지어 산간지역을 습격, 약탈하며 심지어는 제주도 변두리까지 친입하기가 일쑤인 폭도들을 막기 위하여 군경은 피나는 노력을 하였다.

특히 폭도들에게 집과 부모를 잃은 도민들은 폭도 진압에 군경과 함께 앞장을 섰다. 주민들은 총궐기하여 인가를 한곳에 모으고 그 변두리에 수많은 돌로 높히 성을 쌓고 군데군데 초막을 세워 낮이고 밤이고 군경과 함께 보초를 서는 힘겨운 일을 감당했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제2연대가 진주하면서 도내 모략 분자와 기회주의자들이 뉘우치기 시작하여 국군과 경찰의 편이 되었다. 국군은 후방선의 사상통일과 민심 수습에 전력을 다하고 이재민의 생업 보도와 타버린 집들과 부락의 건설에 힘썼다. 뿐만 아니라 폭도들에게 귀순의 길을 열어 공산도배들의 지시를 받아온 수많은 도민들이 자수를 하러 사령부를 찾아왔다.

이와 같은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이들 제주도민들이 폭도도 될 수 있었고 관민도 쉽게 될 수 있었다는, 다시말해 그토록 불우한 환경에 처하여 있는 무식한 동포였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폭동과 만행의 참상

질서를 교란하고 치안을 파괴하여 북한과 같이 소련에 예속시키려는 공산 계열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자비한 폭동과 만행이 총선거 실시에 따라 민중에 대한 공포심 주입과 최후의 발악으로 더 한층 포학과 잔인성을 드러내었으니 그일례를 제주도 폭동에서 찾아볼 수 있다.

폭동이 일어나자 1읍, 12면의 경찰서가 빠짐없이 습격 당하였고, 저지리, 청수리 등의 전 부락이 폭도의 방화로 타버렸을 뿐만 아니라 그 사살 방법도 잔인하여 4월 18일 신촌에서는 6순이 넘은 경찰관의 늙은 부모의 목을 잘라 죽인 후 수족을 절단하였으며,

대동청년단 지부장의 임신 6개월 된 형수를 참혹하게 타살하였고 4월 20일에는 임신중인 경찰관의 부인을 배를 갈라 죽였고, 4월 22일 모슬포에서는 경찰관의 노부친을 총살한 후 수족을 절단하였으며,

임신 7개월된 경찰관의 누이를 생매장하였고, 5월 19일 제주읍 도두리에서는 대동청년단 간부로서 피살된 김모의 처 김모(24)와 3세된 장남을 30여명의 폭도가 같은 동네 고모씨 집에 납치한 후 10여명이 윤간하였으며, 같은 동네 김모의 노모 김씨(60) 누이 옥분, 김의 처 이씨(50). 16세된 부녀 , 36세된 김모의 딸 정모의 처와 장남, 20세된 허모의 딸,

그의 5세, 3세의 어린이등 11명을 고모의 집에 감금하고 무수히 난타한 후 <눈노름>이라는 삼림지대에 끌고가서 노소를 불문하고 50여명이 강제로 윤간을 하고 그도 부족하여 총창과 죽창, 그리고 일본도 등으로 부녀의 젖, 배, 음부, 볼기 등을 찔러 미처 절명 하기도 전에 땅에 생매장하였는데 그중 김모(여)만은 구사일생으로 살아 나왔다.

또한 폭도들은 식량을 얻기 위하여 부락의 식량, 가축을 강탈함은 물론 심지어 부녀에게 매음을 강요하여 자금을 조달하는 등 천인공노할 비인도적 만행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현지 답사기

1948년 4월 3일. 이날은 제주도에 피비린내가 풍기는 날이다. 약탈과 방화, 그리고 갈피잡지 못할 살인의 소용돌이 속에서 섬 전체가 중병에 걸려있는 모습이다.

무고한 노동자와 농민을 몰아세워 노동자 농민 자신들의 집을 불살라 버리고 학살하며, 가정을 파괴하는 등의 참사가 꼬리를 물고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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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영 2008-05-29 10:52:26
귀하의 기사 잘 보았습니다. 본인은 제주4.3사건당시 무장폭도들에게 희생된 가족으로서 지금까지도 4.3의 한을 품고 살고있는 당76세의 늙은이입니다. 필요하다면 본인이 살던부락에서 이러났던 4.3사건의 형태를 기록으로 보내고자 하니 귀하의 우편수신처를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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