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에 조애가 깊은 그 선배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연주회에 익숙하지 못했다. 나에겐 음악 감상이란 빛이 새어들지 못하게 두꺼운 커튼을 쳐놓은 음악 감상실의 구석진 자리를 의미하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나는 선배의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그리 가슴에 와닿지는 않았다. 당시 음악연주회는 나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에게도 처음부터 음악이란 어두운 곳에서 듣는 것으로 생각된 건 아니다. 내가 고전음악을 듣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시절부터다. 솔직히 그건 음악 감상이 아니었다. 공부만 하면 금세 졸려오는 것을 막기 위해 단지 음악방송을 켜놓고 공부했을 뿐이다. 방송의 말소리 때문에 주의가 분산되지 않아야 했다. 그래서 대사가 없는 고전음악 방송을, 공부에 지장이 안 될 정도로 조그맣게 틀어 놓았던 것 뿐이다.
그런데 마치 서당 개처럼 한 삼년 가량 지나고 대학에 입학할 무렵이 되니, 이젠 고전음악이 정말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학교안 고전음악감상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음악이 좋아지기 시작하던 그 시절, 음악 감상실은 나에게 본격적으로 음악을 만나게 해주었다. 그곳에서 여러 가지 음악을 듣다가 마음에 와닿는 음악이 있으면, 기억해 두었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 LP판을 사서, 조용히 다시 음미하는 것이 당시 나의 큰 즐거움이었다.
소파에 편히 않아서 조용히 눈을 감고 듣는 음악의 느낌은, 음악 감상실에서 듣는 느낌과 또 달랐다. ‘음악은 듣는 방법에 따라서 같은 음악이라도 다르게 느껴지는 구나’ 하는 느낌을 그때 처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음악 감상실의 그 진지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편안하게 음악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럴 때 음악은 벌을 서듯이 듣는 것이 아니라는 선배의 말이 희미하게 느껴지곤 했었다.
그러다 한동안은 더 이상 음악 감상실을 다닐 여유가 없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그런 생활이 십년이 넘게 지난 언젠가, 문득 다시 음악을 생각할 만큼의 조금의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그 뒤로는 주로 출퇴근을 하면서 음악을 듣는다. 차안에서는 예전 어두운 감상실에서 듣던 것처럼 그렇게 집중해서 들을 수는 없다. 때로 이렇게 건성으로 듣는 것이 음악을 듣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요즘으로선 그렇게라도 음악을 접할 수 있는 것이 그나마 삶의 활력소가 된다.
주말에도 여러 가지 번잡한 일이 많지만, 가끔씩 시간을 내어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 요즘 주말이면 주로 케이블 TV를 틀고 음악을 연주하는 모습과 함께 음악을 듣는다. 예전 어느 날 선배가 나에게 말하던 것처럼. 나도 이젠 음악을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서, 밝은 곳에서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비록 연주회장에 직접 가서 듣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옛날 LP판을 통해 듣고 싶은 음악을 선택해서 조용한 집에서 홀로 음악을 들으며, 무언지 알 수 없던 인생의 모습을 음미하던 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이젠 DVD를 통해 듣고 싶은 음악을 골라서 들을 수도 있다. 더 이상 어둠에 쌓여서가 아니라 이젠 가족들과 함께.
그러나 오래된 습관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인지, 나는 아직도 가끔은 어두운 밤, 어두운 방에서 홀로 조용한 음악을 듣고 싶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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