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는 신라의 왕도가 아니고 가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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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는 신라의 왕도가 아니고 가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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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경주를 신라 천년왕도로 급조했다

 
   
  ▲ 일제가 가짜로 만든 경주의 5능
ⓒ 박병역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왕능은 진짜인가 가짜인가?

신라 천년의 고도(古都) 경주에는 신라의 시조 혁거세왕능을 비릇하여 남산에는 왕릉이 13기, 절터가 147곳과 불상 118기, 탑이 96기, 석등이 22기 등 발견된 문화유적의 수가 672개에 달한다. 경주남산을 유네스코는 2000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신라 천년의 고도(古都) 경주는 한 해 500만 명이 넘는 국내외의 관광객이 찾고 있다.

1.경주는 신라 천년의 왕도인가?

한국 정통사서의 [삼국사기]에 박혁거세왕은 사후 담엄사 북쪽 사능 능원 안에 묘가 있다고 기록돼 있다. 박혁거세(BC 57-AD 3년)왕 알영부인,남해왕(AD4-23년),유리왕(24-56년),파사왕(AD 80-112년)의 5능(五陵)이 있다. 또한 신라의 제6대 지마왕, 7대 일성왕. 8대 아달라왕 등 마지막 제 56대 경순왕(AD 935)릉 등 총 36기의 왕능이 있다. 신라 천년의 왕도이었던 경주 일대는 온통 왕들의 무덤뿐이다. 그리고 신라 시조 박혁거세(BC 57~AD 3년) 왕릉을 비릇하여 5능은 무려 2,064년 전의 무덤이다. 2천년 전의 무덤이 100여년 전의 무덤과 같이 봉분이 깨끗하다.

경주(慶州)는 신라의 시조 혁거세왕부터 마지막 56대 경순왕까지 무려 1000년(992년) 동안 신라의 왕도(王都:서울)입니다. 일반적으로 왕도를 중심으로 정치, 군사, 경제, 문화가 발달하므로 경북 월성군 경주가 신라 천년의 왕도라면 그 어느 도시 보다 왕도 경주에 인구가 집중되고 교통시설이 발달되어 있다는 것은 일반적 상식입니다. 한반도 속의 경북 경주 지역이 신라 천년의 도읍지로 타당한가?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고찰해 봅시다.

2. 경주가 신라 도읍지라는 고증(考證)은 찾아 볼 수 없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1] 신라의 시조는 혁거세(赫居世) 거서간(居西干)이다. 시조의 성(姓)은 박씨며 휘(諱)는 혁거세이다. 원년 갑자(BC:57년) 4월 병진일(일설은 정월 15일)날 13세에 즉위하여 호를 거서간(居西干)이라 하고 국호를 서나벌(徐那伐)이라 하였다. 먼저 조선의 유민(遺民)들이 산곡(山谷)에 나누어 살던 곳으로 六村(6촌)이 있었다.

1,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 2,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3, 취산(嘴山:선도산) 진지촌(珍支村), 4,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 5,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6,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이 있었다. 이것을 진한(辰韓)의 6부(六部)라 한다. (중략)

[삼국사기 신라 본기] 20년(BC:37년) 경성(京城)을 쌓아 금성(金城)이라 하였다. 26년 봄 정월 금성에 궁실을 지었다. 혁거세왕 재위 61년 3월 왕은 하늘로 올라 가셨는데 7일 후에 유체(遺體)가 땅에 떨어져 흩어졌다. 왕후 역시 왕을 따라 세상을 떠나시니 나라의 사람들이 합장하려고 하였으나 큰 뱀이 나타나 쫓아다니며 이를 방해하여 5체(五體)를 각각 장례하여 5능(五陵)이 되었다. 역시 능의 이름을 사능(蛇陵)이라 하였다. 담엄사(曇嚴寺) 북쪽에 이 능(陵)이 있다. 태자 南海(남해)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본문 끝.

3. 신라의 금성(金城)은 양산(楊山:양주)에 있었다

[삼국유사] 옛 진한(辰韓)에는 6村(촌)이 있었다. 1,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 남쪽에 담엄사(曇嚴寺)가 있고 촌장은 알평(閼平)이다. 2,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의 촌장은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3,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의 촌장은 구례마(俱禮馬)이다. 4, 취산진지촌(嘴山珍支村)의 촌장은 지백호(智伯虎)이다. 5,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의 촌장은 지타(祗陀)이다. 6, 명활산고야촌(明活山高耶村)의 촌장은 호진(虎珍)이다.

서기전 69년 3월 1일 당시 사로6촌(斯盧六村)의 촌장(村長)들이 자제를 거느리고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에 모여서 덕성을 겸한 임금을 옹립하여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할 논의를 하고 있었다. 이때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이라는 우물 근처에 하늘에서 땅에 닿도록 신기한 빛이 비추고 흰말(白馬) 한 마리가 꿇어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찾아가보니 말은 하늘로 날아가고, 자주 빛 큰 알이 하나 있었다.

알을 깨고 어린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동천(東泉)에 목욕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찾아와 춤을 추었다. 알이 둥근 박(瓠)과 같다고 하여 성을 박(朴)이라 하고, 몸에는 광채가 나와 그로 인하여 이름을 혁거세라 하였다. 나이 13세에 왕으로 추대되었다. 왕은 국호를 徐羅伐(서라벌) 또는 徐伐(서벌) 혹은 斯羅(사라) 또는 斯盧(사로)라 하였다.

[환단고기의 고구려 본기 제 6] 사로(斯盧)의 시조 혁거세왕은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의 아들이다. 옛날 부여 황제 궁실의 娑蘇(사소)라는 여인이 남편 없이 아이를 잉태하여 사람들의 의심을 받게 되자 눈수(嫩水:흑룡강성)에서 도망하여 東沃沮(동옥저)에 이르렀다.

또 배를 타고 남행하여 진한의 奈乙村(내을촌)에 당도 했을 때 蘇伐都利(소벌도리)가 소문을 듣고 집으로 데리고 와서 길렀는데 나이 13세가 되자 다 숙성하여 聖德(성덕)을 두루 갖추었기에 진한의 6부에서 居世干(거세간:거슬한(居瑟邯)으로 추대하고 국호를 서나벌(徐那伐), 서라벌(徐羅伐), 서벌(徐伐) 혹은 사라(斯羅), 사로(斯盧)라 하였다. BC 37년 경성(京城)에 금성(金城)을 쌓고, BC 32년 궁궐을 지었다. 서기 4년 봄 3월 왕이 승하하시니 사능(蛇陵)에 장례를 하셨는데 曇巖寺(담암사) 북쪽이다. 본문 끝.

상기의 [삼국사기, 삼국유사, 환단고기]의 사서(史書)에 기록된 신라 6부의 지명을 살펴보면 1, 양산(楊山), 2, 돌산(突山), 3, 취산(嘴山), 4, 무산(茂山), 5, 금산(金山), 6, 명활산(明活山)이 있었다. 신라의 6부는 신라의 영토로 유추할 있습니다. 그리고 상기 본문과 같이 신라의 왕도(王都) 금성(金城)과 曇巖寺(담암사)는 양산(楊山:양주(楊州)에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경주(慶州)에 금성(金城)]이 존재한 고증(考證)은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 혁거세왕의 묘지는 강소성 양주에 있습니다.

신라의 시조 혁거세왕의 묘지는 경북 경주 탑리 5능(五陵) 남쪽이라 했다. 그러나 [삼국유사 신라 시조 혁거세왕조]를 살펴보면 담암사는 경북 경주 탐리 오능 남쪽이 아니라 楊山村(양산촌)에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거서간혁거세의 무덤은 虎丘山(호구산)의 雲岩寺(운암사) 남쪽 4里(리)에 있다. 고 기록돼있습니다. 곧 신라의 시조 혁거세의 墓地(묘지)는 중국 강소성 吳縣(오현)의 虎丘山(호구산)에 있습니다. [정부당국자는 철저히 검증하라]

4. 이병도가 금성을 경주로 지정 했을 뿐이다

▶ 대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의 註(주)를 적는다.

[1]. 금성(金城) => 이병도는 註(주)에서 금성(金城)은 여지승람(輿地勝覽) 경주고적조(慶州古蹟條)에서 재부동서리(在府東西里). 토축(土築) 周(주) 2,407척이라 하였으나 지금에는 유적이 뚜렷하지 못하다. 그리고 그 이름은 金城湯池(금성탕지)의 뜻에서 취하였다기 보다 <검城(성)> 즉 <임금성(왕성)>의 뜻이 아닌가 한다. 라고 하였다.

[2]. 담엄사(曇嚴寺) => 조국을 배신한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증서도 없이 임의대로 註(주)에서 담엄사(曇嚴寺)->경주(慶州) 남천(南川) 남(南)라고 했다. [개가 멍멍 짖는다] 지금의 경주가 신라의 도읍지(都邑地)라는 고증(考證)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오직 조국을 배신하고 일왕에게 충성하며, 죽을때까지 부귀영화를 누린 대한민족의 반역자이병도가 만든 현행 국사에서 경주가 신라의 도읍지로 지정돼 있을 뿐입니다. 1905년 국권을 탈취한 일제는 하느님을 숭배한 한국인의 천손사상(天孫思想)과 부모국의 한국 역사를 말살하지 않고, 어찌 식민지로 통치할 수 있겠으며, 전통적 민족문화를 말살하지 않고 어찌 우리나라를 영원히 멸망시킬 수 있겠는가?

즉 우리나라를 강탈한 일제는 1910년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하고, 조선사를 가장 공평하게 저작한다는 미명으로 한국의 국내는 물론 중국 각처에 산재했던 우리나라의 환인, 환웅, 단군관계의 증서 적 고대 사료를 전부 다 색출 수거하여 무려 20만권을 불태워 없애거나 일본으로 가져갔습니다. 또한 무려 7천년의 고대사를 짤라 없애고, 한국의 전통적 고유문화를 철저히 말살하여, 민족적 자긍심을 철저히 말살했습니다.

우리나라를 강탈한 일제는 인류의 부모국이며, 4대문명과 종교 원천국의 우리역사를 말살하고, 세계적 대국의 고조선 삼한(진한, 마한, 변한)과 아세아적 대국의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의 4국을 한반도 속으로 축소하여 한반도 속의 소국 적 사대역사관과 철저한 식민지사관의 망국적 치욕과 패배의식의 역사로 구성되어 대한민국의 장래를 망치고 있습니다.

현행 국사는 현대사를 제외하고, 우리국민의 손으로 만든 국사가 아니고, 나라를 빼앗겼던 일제식민지시대에 일왕의 칙명을 받고, 한국인을 일본사람으로 동화시켜 대한제국을 일찍 멸망시키기 위한 “조선사편수회의 식민사학자”들이 만든 망국적 국사입니다.

5. 1913년 경주고적보존회가 창설되었다

경주는 나라를 빼앗겼던 일제식민지 시대의 1913년 경주고적보존회가 창설되어 1915년부터 옛 객사 건물에 신라 유물을 전시하기 시작하였다. 1926년 9월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으로 되고, 해방과 더불어 1945년 9월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으로 개편되었다. 1975년 7월에 현재의 위치에 본관을 신축하여 이전하고, 8월에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승격했다.

국립경주박물관의 전시실은 제1실이 선사시대실, 제2실이 고신라토기실, 제3·4실이 고신라공예실, 제5실이 와전실(瓦塼室), 제6실이 통일신라토기실, 제7실이 통일신라 금속공예실, 제8실이 조각실로 되어 있다. 별관은 천마총과 제98호 고분 유물실이며, 정원에는 성덕대왕신종 및 석탑·석불 등이 전시되어 있다. 최근에는 안압지관(雁鴨池館)이 개관되어 안압지 출토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월성군·영일군 지표조사 보고서〉·〈경남지역 도요지 조사보고서〉·〈황성동 유적 발굴 조사보고서〉·〈민애왕릉 주변 정리보고서〉 등의 조사보고서를 출간했다. [브리테니카 백과 사전 참조]

상기 [브리테니카 백과 사전]과 같이 우리나라를 강탈한 일제가 거짓 가짜로 지정한 신라 천년의 왕도 경주(慶州)에 대해 한국의 모든 사람들이 신라 1,000년의 왕도(王都)로 인식하고 “아...! 황성 옛터의 신라의 달밤 ” 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어처구니 없는 경주시(慶州市)의 연혁

[1]. 신라시대(기원전 57~935년)는 왕도이다

경주는 진한(辰韓)의 중심지였고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慶州)는 6·25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아 우리나라 최대의 유물·유적이 보존된 거대한 야외 박물관이다. 많은 청동기 유물들이 경주시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어 신라의 전신이며 경주 6촌에서 성장한 사로국의 생활모습을 짐작케 한다. 기원전 57년 6부의 촌장들이 박혁거세를 거서간으로 추대하고 나라이름을 서야벌(徐耶伐)이라 칭했다. 65년(탈해왕 9)에는 국호를 계림(鷄林)으로 고치고, 307년(또는 503년이라고도 함)에 국호를 신라라 했다. 935년 경순왕이 왕건에게 항복하자 경주로 개칭하여 경순왕의 식읍으로 주었으며, 경순왕(927~935)을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았다.

[2]. 고려시대(918~1392)는 동경(東京)이다.

고려시대의 940년 대도독부로 승격했다가 987년 경주를 동경(東京)으로 이름을 바꾸고 유수(留守)를 두어 [경주]를 영동도(嶺東道)에 속하게 하여 1012년 경주방어사로 강등되었다. 1015년 [경주]를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개칭했다가 1031년 고려의 동경으로 환원했다. 이때 흥해(興海),장산(章山),수성(壽城),영주(永州) 등 속군과 안강(安康),신녕(新寧),인(慈仁),하양(河陽),청하(淸河),연일(延日),해안(解顔),신광(神光),기계(杞溪),장기(張鬐)등의 속현이 있었다. 1202년 경주야별초의 반란으로 지경주사(知慶州事)로 강등되었다가 1219년 [고려]의 동경으로 다시 환원되었다.

[3]. 조선시대(1392~1896년)의 경주

1415년(성조 14년) 경주에 병마절도사영을 두었다가 1417년 울산으로 이전했다. 1637년 속현인 자인현이 분리·독립했다. 경주의 별호는 금성(金城)·월성(月城)·낙랑(樂浪)·금오(金鰲)·문천(蚊川)이었다. 경주의 고읍으로는 대성군(大城郡)·약장현(約章縣)·상성군(商城郡)·임관군(臨關郡)·안강현(安康縣)·기계현(杞溪縣)·신광현(新光縣)·음즙현(音汁縣)·장진현(長鎭縣)이 있었다.
일제는 1895년 전국의 지명을 개편했다

경주는 [일제식민지시대의 1895년 지방관제 개편]으로 군으로 바뀌어 대구부 관할이 되었다가 1896년 경상북도에 속했다. 1931년 경주면이 읍으로 승격했고, 1955년 경주읍과 내동면 전역, 천북면과 내남면 일부가 통합되어 월성군으로 개칭되었다. 1989년에는 다시 월성군이 경주군으로 개칭되었다.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경주군과 통합되어 경주시라는 하나의 도농통합시를 이루었다. 끝. [백과사전 참조]

[4] 본래 한반도 속에 경주는 없었다

상기 경주의 연혁으로 [경주 지명 변천]을 살펴보면 일제식민지시대의 1895년 지방관제 개편에 의해 무려 2천여년의 지방 행정 중심 도시 경주는 1931년 면으로 바뀌고, 읍으로 승격했다. 라고 경주의 연혁을 기록하고 있으니 참으로 기막힌 연혁이 아니고 무엇인가?

1945년 8.15 해방 당시 경주는 작은 한 마을에 불과했다. 즉 현재 경상북도 신라의 왕도 경주(慶州)와 백제의 도읍지 경기도 한성(漢城)과 가야국의 수도 경남 김해(金海) 등의 지명은 본래 한반도 속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를 강탈한 일제가 1895년 전국의 지명 개편을 단행하여 비로소 경상북도 월성군에 경주가 만들어 진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5]. 1936년 경주의 인구는 19,748명이었다.

[아래의 글은 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차순철 자문위원의 글입니다.] 경주가 관광도시로서 개발된 것은 일제강점기이지만 지금 당시모습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지난 2004년 불국사 성보박물관 부지를 발굴조사한 경주대학교 박물관은 일제강점기인 1921년에 건립된 불국사 철도관광호텔터를 확인하였고 건물의 규모를 밝히고 각종 생활유물을 수습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호텔은 불국사 복원정비사업에 의해서 1973년에 철거되었지만 지난날 경주지역의 관광사업과 관련된 <근대유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경주지역을 회고하는 여러 글을 읽다보면 시바타 여관(柴田旅館), 다나카 사진관(田中寫眞館)과 같은 이름들이 종종 등장하지만, 현재의 경주시가지 안에서 [신라 천년의 왕도]이었던 경주의 그 옛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는 없다. 필자는 작년 우리 연구소를 방문한 일본의 사이토 타다시(齋藤忠) 선생을 안내하였다.

...당시 사이토 선생은 청년기에 근무했던 구 경주박물관 건물(현재 경주문화원)을 둘러보고 자신이 살았던 여관의 흔적을 찾으면서 당시 경주박물관 주변 풍경에 대해서 여러 가지 모습을 설명해주었다. ...그 내용을 들으면서 일제강점기 경주시가지 풍경에 대해서 다시금 돌이켜볼 필요성을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다시보는 경주와 박물관』(국립경주박물관, 1993)과 『경주의 옛 사진집』(경주문화원, 1994)이 있지만, 당시 경주읍의 전체적인 모습을 그리기에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던 중 한일문화유적답사연구소의 故박정호 선생이 소장한 <新羅の古都 慶州古蹟案內>라는 관광지도를 볼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 지도는 1936년 12월 1일 경주읍 서부리 124번지에 소재한 다나카 동양헌 사진관에서 발행한 관광지도로 당시 경주시가지의 옛 모습과 관광과 관련된 여러 가지 사실들을 알려주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소장자의 양해를 구한 후 본 지면을 빌려서 간단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당시 관광안내도인 <新羅の古都 慶州古蹟案內>는 두터운 표지 안쪽에 양쪽으로 인쇄된 지도를 삽입하여 붙인 형태로 전체크기는 가로 10.8㎝, 세로 23.4㎝이다. 지도의 크기는 가로 61.7㎝, 세로 46.0㎝이다. 지도에 수록된 내용을 살펴보면 앞면에는 주요 관광지를 그림과 설명문으로 나타낸 지도가 칼라로 인쇄되어있고, 뒷면에는 <경주읍 시가지 약도>가 단색(갈색)으로 인쇄되어 있는데, 시내 주요 건물들의 위치와 관광기념인을 날인할 수 있는 담뱃가게와 여러 가게들의 위치가 표시되어있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당시 경주읍의 여러 가지 현황들이 게재되어 있는 점이다. 먼저 경주읍의 전체 인구를 살펴보면 한국인(조선인)은 18,846명으로 남자 9,300명, 여자 9,545명에 호구 수는 3,827호이며, 일본인(내지인)은 1,008명으로 남자 513명, 여자 495명에 호구 수는 252호이다.외국인은 국적이 표시되지 않았지만 총 36명으로 남자 28명, 여자 8명에 11호였다. 따라서 당시 [일제식민지 때] 경주읍의 인구는 19,748명임을 알 수 있는데, 일본인이 차치하는 비율은 전체 가구 수의 6.58%이였다.

...이외에도 여러 기관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표시되어 있는데, 관공서는 경주군청, 경주세무서, 경주읍사무소,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청, 대구전매국 경주판매소, 경상북도 경주사방(砂防)사업소, 경주경찰서, 경주우체국, 경주역(機關區, 保線區), 곡물검사소 부산지소 경주출장소,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 등 모두 11곳이 있었다.

또한 단체는 제국재향군인회 경주분회, 국방의회, 경주 소방조, 경주 청년단, 경주(조선인) 부인회, 경주군 체육협회, 경주 번영회, 경주 상공회, 경주고적보존회, 적십자사 경주위원회, 애국부인회 경주분회, 경주 불교부인회 등 12곳이 있었다. 또 경주군 농회(農會), 경주학교조합, 경주금융조합, 경주동부금융조합, 경주산업조합, 보문수리조합 등 6개 조합이 있었다. 그리고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주주재소, 경상합동은행 경주지점, 경주전기주식회사, 경주양조주식회사, 경주국자(子-누룩)주식회사 등 5개 회사가 표시되어 있었다.

...경주시내에 소재한 가게들은 업종에 따라 구분되어 있는데, 토산물 가게로는 골동품 가게와 사진관, 과자가게가 등재되어있다. ...이를 살펴보면 다나카(田中) 동양헌(東洋軒)(유적 그림엽서, 관광품, 기념사진 등), 구리하라(栗原) 상점(각종 골동품), 부인상회·신라당(각종 관광 기념품 일체), 후지이(藤井) 상점(鈞鐘煎餠-종 모양의 과자, 기념품 과자류), 나카무라(中村) 상점(기념품, 일본·서양그릇 등)과 같은 상점이 6곳과 여관 7곳(시바타(柴田), 아사히(朝日), 마쓰야(松屋), 慶州, 安東, 京城, 月城여관), 일본인이 운영하던 잡화점 7곳(木下, 村上, 松嘉, 松瀨, 阪本, 中島, 藤戶상점), 과자가게 2곳(木浦상점, 東光상점), 철물점 3곳(小森, 竹內, 古村상점)과 가와히(川路)양조소, 가와히(川路)약국, 築城상회, 福助요리집, 미우라(三浦)양복점, 하시모토(橋本)정미소, 하시모토(橋本)약국, 文進堂인쇄소, 博文堂인쇄소, 龍野자동차, 彦陽자동차, 李反물점, 나가노(中野)공무소, 우에노(上野)재목점, 야마모토(山本)재목점 등이 등록되어 있다.

...이러한 현황으로 볼 때 당시 경주읍내에 거주한 일본인들은 전체 인구의 6.58%에 지나지 않지만, 경주읍 안에 소재한 여러 상점들을 대부분 일본인이 소유함으로써 경제적인 면에서 한국인보다 훨씬 좋은 여건 아래에서 생활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주주재소, 경상합동은행 경주지점과 같은 식민지지배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기업들의 존재로 볼 때, 일본인들은 경주읍에 거주하면서 조선총독부와 관련 기관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생활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관광 부분에 있어서 경주박물관 소장품 현황이 소개되어 있는데 석기시대 100점, 신라시대 400점, 고려시대 50점, 조선시대 30점, 석조물 100점 등 모두 680점의 유물이 소장된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자세한 내용이 들어있는 경주관광 안내도가 만들어진 목적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는 지도 앞에 적힌 글 내용처럼 경주의 고적을 빠른 시간 안에 둘러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관광유람차의 존재를 홍보할 목적과 함께 시내 여러 곳에 소재한 상점의 이용을 촉진시키기 위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경주읍내에 소재한 여러 고적들을 자동차로 관람할 수 있는 관광유람차는 적어도 1곳 이상의 업체에서 운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지도에는 중앙로에 위치했던 오카모토(岡本)유람자동차에 대한 내용만을 소개하고 있는데, 고시된 <고도유람 자동차 임금표>를 살펴보면 이용요금은 구간별 정액제로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관광지도에 게재된 관광구간을 살펴보면 먼저 시내구간과 서악동·동천동구간 그리고 불국사·괘릉구간으로 구분되어 있다. 자동차의 특성상 기본 탑승인원인 4명을 기준으로 요금이 책정되어 있는데, 인원이 늘어나면 추가분에 대한 요금이 증액되고 있다. 이 경우 별도의 차량이 운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 경주국립박물관
ⓒ 박병역
 
 

▼ 관광지 요금 특기사항

1. 분황사, 석빙고, 포석정, 오릉(황룡사, 첨성대, 안압지, 계림서행)개개 관람시간 약 5분 4명 - 金 2원50전 1명이 늘어나면 매 사람마다 25전이 증액됨. 소요시간 약 1시간 - 임대요금은 만원(滿員)의 요금임 - 4인 미만의 경우에는 4인 요금을 받음

2. 무열왕릉 및 사면석불 안내 4명 - 金 1원20전, 1명이 늘어나면 매 사람마다 20전이 증액됨 소요시간은 30분이다.

3. 경주~불국사간 편도 도로 직통안내 4명 - 金 2원50전 1명이 늘어나면 매 사람마다 50전이 증액됨 상기 코스에 포함된 괘릉순회 안내 4명 - 金 1원20전 1명이 늘어나면 매 사람마다 20전이 증액됨

4. 역에서 맞이하는 경우 1명 20전 1명이 늘어나면 매 사람마다 20전이 증액됨

...신라 천년의 고도유람 자동차로 읍내 여러 유적을 모두 둘러본다고 가정할 때 소요되는 비용은 4인 기준으로 7원40전이다. 이 금액을 당시 쌀 가격을 기준으로 현재 화폐가치로 환산해서 살펴보면, 1935년 쌀 80㎏의 가격은 17.8원(1936년 경성상공회의소의 소비자물가지수를 조사하였을 때 쌀 80㎏의 가격은 17.8원이었다)이므로 2006년도 정부추곡수매가인 118,460원(80㎏)과 비교하면, 당시 1원은 현재 화폐가치로 약 6,655원이 된다.

...따라서 경주읍내의 여러 유적들에 대한 관광을 자동차를 빌려서 할 경우 소요되는 전체 비용은 약49,247원이 된다. 그런데 이 당시 물가를 쌀 가격이 아닌 금(金)의 가격으로 비교하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게 된다.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이 연방 준비 은행의 금 매입가격으로 정한 1온스당 35$였던 금의 가격은 지금 현재 672.2$이므로 전체 물가는 19.21배가 올랐다.

그러므로 현재 화폐개혁을 통해서 평가절하된 화폐가치를 반영시킨 비용은 341,760원이 된다. 2007년 현재 경주에서 택시를 하루 임대해서 관광할 경우 소요되는 비용이 19만원(평일)인 점으로 본다면 당시 경주를 찾은 관광객들은 매우 비싼 가격을 지불하면서 유적관광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新羅の古都 慶州古蹟案內>에 게재된 시가지 약도를 살펴보면 현재 모습으로 정비된 경주시가지 이전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데, 가장 큰 특징은 현 대릉원 북쪽을 지나가는 부산-대구 철도선로의 존재와 경주읍성 안쪽에 위치한 여러 관공서 건물의 존재이다. 대부분 지금 시가지 안에 위치한 관공서의 위치와 동일한 풍경을 보여주고 있지만, 재판소는 경찰서 서쪽으로 이전하기 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지금은 없지만 대구로타리에서 동서방향으로 가설된 철도는 앞으로 이루어질 발굴조사를 통해서 그 흔적이 확인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에 대해서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상과 같이 1936년에 제작된 경주관광지도를 살펴본 결과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경주시가지의 옛 풍경을 조금이나마 되짚어 볼 수 있었고, 당시에 이루어진 관광사업의 일부를 살펴볼 수 있었다. ...올해 3월 1일 자료제공자였던 한일문화유적답사연구소의 박정호 선생님이 갑자기 타계하였다.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이 글을 마친다.
작성자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차순철 약..력

=> 현. 경북 경주 소재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전문위원,
- 위덕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실 전임연구원
- 영남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과 연구원 등
근무 연락처 054-777-8841..
csc@ocp.go.kr 홈=> http://cafe.daum.net/sillasa 에서 복사했습니다.

▶ 일제는 경주를 신라 천년왕도로 급조했다.

상기의 글을 탐독하신 독자님들은 우리나라를 강탈한 일제는 중국 대륙에서 건국된 신라를 한반도 속으로 얽어 맞춰 거짓 가짜 국사를 편찬해 놓고 유적물까지 조작한 사실을 확인 했을 것입니다. 즉 일제는 한국의 모든 사람들이 경주를 신라 천년의 고도로 의심 없이 확실히 믿을 수 있도록 경주고적안내(新羅の古都 慶州古蹟案內)의 관광안내도까지 만들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를 겁탈한 일제는 거짓 가짜 조선사(현행 국사)를 편찬한 후 그 얼마나 치밀한 계획으로 신라 천년의 고도로 급조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경주의 인구는 백만 명이 살았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의 경주는 서라벌(徐羅伐),사로(斯盧), 계림(鷄林),시림(始林)이라 불렀으며, 전성기의 경주 인구가 백만을 넘었고, 숯으로 밥을 지었으며 초가집이 없었다. 또한 경주에는 대형 국제시장을 3곳이나 두었고, 시장(市場)업무를 관리 감독하는 관청까지 두었던 신라 천년의 왕도(서울)이다.

통일신라는 성덕왕(702~737)때 극성기를 맞이하여 신라의 수도 경주는 17만 8,936호이고, 1,360방, 55리, 35金入宅(금입택) 4절 유택(四節游宅) 등이 있는 호화로운 도시로서 통일 후 약 100 여년 간 번영을 누렸다. 신라의 삼국통일 시대의 수도 “ 경주의 호수가 17만 8천호 x 5인=890,000명이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2. 2천년의 왕도 경주의 인구가 1936년 1만9천명이다

신라 초기의 영토는 “경상도, 강원도”지역이며, 특히 경상북도 경주는 BC 57년 박혁거세왕이 신라를 건국한 후부터 56대 경순왕(927~935)때까지 (1). 신라의 천년 왕도(王都)이며, (2), 고려시대의 동경(東京)이며, (3), 조선시대는 병마절도사를 두었던 경주는 무려 2천여 년 동안 지방행정의 중심 도시이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경주는 한반도 속의 그 어느 도시보다 인구가 많고, 발전되어 있어야 마땅 할 것이다. 지금의 경주시 인구보다 1천300년 전의 인구수가 더 많습니다. [4]. 일제식민지시대의 1930년 경주는 읍으로 승격되었다. [5]. 1936년 경주의 총 인구는 19,748명이었다.

무려 2천여년 간 지방행정 중심 도시이었던 경주의 인구가 1936년 19,748명으로 줄었다면, 도대체 경주에 지진이 일어났는가? 전염병으로 모두 다 전멸했는가? 일제식민지시대에 일제에 의해 신라의 왕도로 급조(急造)한 명확한 입증(立證)입니다.

3. 도대체 제 정신이 있는 민족인가?

우리나라의 현행 국사는 현대사를 제외하고, 우리국민의 손으로 만든 국사가 아니고, 나라를 빼앗겼던 일제식민지시대에 일왕의 칙명을 받고, 한국인을 일본사람으로 동화시켜 대한제국을 일찍 멸망시키기 위한 “조선사편수회의 식민사학자”들이 만든 망국적 국사입니다.

한국인을 일본사람으로 동화시켜 대한제국을 일찍 멸망시키기 위해 설치된 조선사편수회의 핵심위원이었던 [식민사학자 이병도]는 삼국사기의 중국 지명을 한반도 내의 지명으로 얽어 맞춰 신라, 고구려, 백제, 및 가락국의 4국 영토를 한반도 속으로 축소 변조했던 것이다.

즉 삼국사기 본문에는 조선 8도(八道)의 지명이 없었으나 일제는 삼국사기의 현재지명을 변조하고, 거짓 가짜로 편찬된 현행 국사를 영원히 은폐하기 위하여 1895년 전국의 지명 개편을 단행하고, [삼국사기의 지명 유례에 맞춰 가짜 유적물을 조성]했던 것입니다.

한국의 모든 사람들은 일제가 거짓 가짜로 만든 국사교육에 무려 61년 동안 세뇌되어 뇌리 깊숙이 각인된 거짓 지식으로 분별력을 상실하여 현행 국사가 “근본적 뒤틀린 실상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도 “고증에 의한 역사적 진실”도 쉽게 수용하지 못하고 부정하는 습성이 한국인의 가장 슬픈 고질적 병폐입니다.

대한민국 정부당국자는 거짓 가짜로 만든 국사교육에 세뇌되고, 왜독에 중독되어 천인공노할 일제의 만행을 깨닫지 못하고, 경주를 신라천년의 도읍지로 둔갑하여 세계인이 인정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포장하고, 7천만 대한민족은 참과 거짓의 역사를 분별하지 못하고 넋을 잃고 있으니 한국인의 고질적 병폐를 그 누가 치유할 수 있겠는가?

머리는 짤라 버리고 전신이 유린되어 오늘도 피를 흘리며 신음하고 있으나 이미 눈과 귀가 먹은 대한의 아들딸들은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고질병을 앓고 있으니 이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하느님에게 제사를 주제하는 장손국의 천손들이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아...! 통한의 한국역사여...! 하늘을 우러러 땅을 치며 통탄할 뿐이다.

제 정신이 살아있는 사람은 신라 천년의 고도(古都) 경주 유적물에 대한 기록을 거짓 가짜로 조작된 사실을 확인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모든 사람들은 일본인과 7천만 민족의 반역자이며 식민사학자 이병도에 의해 임의대로 지정한 경주를 신라 천년의 도읍지로 세뇌되어 참과 거짓의 역사를 분별하지 못하고, 우리나라의 국사가 근본적으로 뒤틀린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중일(韓,中,日) 사학자의 비평을 고대합니다.현행 국사에 대해 필자는 우리나라를 강탈한 침략자와 조국을 배신하고 일본왕에게 충성한 식민사학자 이병도가 조국을 일찍히 멸망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철저한 “식민지사관의 망국적 치욕의 역사”이며, “근본적으로 뒤틀린 거짓 가짜 국사”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현행 국사는 1945년 8.15 해방이후 단 한 번의 비평과 검증도 없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뉴스타운 넷의 본 연재는 인류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이 우리나라를 강탈한 침략자와 일본왕에게 충성한 식민사학자 이병도에 의해 편찬된 현행 국사가 정통적 국사인가? 거짓 가짜로 편찬된 망국적 국사인가?의 그 진위(眞僞)에 대해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중일(韓,中,日)의 사학자는 물론 애독자 여러분은 혹독히 비평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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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2007-10-09 00:45:04
살다보니 별 희한한 읽을거리를다보겟네,

박병역 2007-10-09 13:47:52
7천만 한국인아...!

중국대륙에 건국된 신라 대국을

마치 한반도 속에 건국되었던 것 처럼

신라의 도읍지를 경북 경주로 얽어 맞춰 놓고



모든 한국인들이 경주를

신라의 천년 도읍지로 확실히 믿게 하기 위해

우리 역사왜곡의 주역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경주에 정착했다.



[자료] 1906년에 경주지역을 조사한 이마니시 류(今西龍)의 행적

제18호 (1906년 12월 1일 발행)한남통신(韓南通信) (41쪽)

▲ 경주(慶州) 동지(同地)는 대구에서 우리 이정(里程, 즉 일본식 거리를 말함)으로 약 10리여(조선식으로는 약 100여리)의 곳으로 17면(面)이 있는 대군(大郡)으로 예전에는 신라시대의 구도(舊都)인데 과반(過般)도 역사상의 조사를 위해 제국대학(帝國大學)에서 출장을 나온 이마니사 문학사(今西 文學士)는 동지 일어 계림학교(鷄林學校)의 교사와 더불어 동지에 관한 각종의 재료참고품을 수집하였으며, 목하 방인(邦人, 즉 일본인을 말함)은 31명이 주거하고 있으나 대부분은 관리이고... (하략)





한국역사 왜곡의 핵심 주역 이마니시 류(今西龍)

1903년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사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조선사, 신라·백제 등 한국고대사를 연구했다.

1906년 한국에 건너와 신라의 고도(古都) 경주를 답사했다. 1914년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조교수를 거쳐 교수가 되었다. 그후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에 임명되어, 재직 중에 단군설화(檀君說話)· 백제국도한산고 百濟國都漢山考〉 등 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특히 평안남도 용강군에 있는 점제현신사비를 발견하고 그에 관한 논문인 〈열·대·패 삼수고 洌帶浿三水考〉를 발표했다. 한편 한국 사서(史書)를 연구·조사하여 안정복(安鼎福)이 주석을 단 중종본(中宗本) 〈삼국사기〉를 발굴하기도 했다. 1922년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그후 2년간 중국에 유학, 베이징대학[北京大學]에서 조선사를 강의했다. 1925년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1926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가 설립되자 조선사 교수가 되었다. 저서로는 〈신라사연구〉·〈백제사연구〉·〈조선고사의 연구 朝鮮古史の硏究〉·〈조선사의 간 朝鮮史の栞〉 등이 있다.



1903년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사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조선사, 신라·백제 등 한국고대사를 연구했다. 1906년 한국에 건너와 신라의 고도(古都) 경주를 답사했다. 1914년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조교수를 거쳐 교수가 되었다.



그후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에 임명되어, 재직 중에 단군설화(檀君說話)· 백제국도한산고 百濟國都漢山考〉 등 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특히 평안남도 용강군에 있는 점제현신사비를 발견하고 그에 관한 논문인 〈열·대·패 삼수고 洌帶浿三水考〉를 발표했다.



한편 한국 사서(史書)를 연구·조사하여 안정복(安鼎福)이 주석을 단 중종본(中宗本) 〈삼국사기〉를 발굴하기도 했다. 1922년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그후 2년간 중국에 유학, 베이징대학[北京大學]에서 조선사를 강의했다.



1925년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1926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가 설립되자 조선사 교수가 되었다. 저서로는 〈신라사연구〉·〈백제사연구〉·〈조선고사의 연구 朝鮮古史の硏究〉·〈조선사의 간 朝鮮史の栞〉 등이 있다.

. 2007-10-09 18:28:44
정신병자가 꽤나 많은나라로세,

. 2007-10-10 04:40:10
경주는 6.25 때 점령지가아니라서 폭격이없다보니 문화재가많다? 그럼 부산은 피난민들이많아서 문화재를 다 도벌해가서 문화재가없냐?
이 정신병자야?

박병역 2007-10-10 09:21:12
ㅎㅎㅎ....
경주는 6.25 때 점령지가아니라서 폭격이없다보니 문화재가많다?
고 댓글 쓴 그대의 글은 필자의 글이 아니고

어처구니 없는 [경주시(慶州市)의 연혁]이
기록된 백과사전의 글을 참조한 글이오 넋잃은 사람아....

왜독에 중독돼 얼빠진 사람아...

경주는
1. 신라의 천년 왕도(王都)이며,
2, 고려시대의 동경(東京)이며,
3, 조선시대는 병마절도사를 두었다.

경주는 무려 2천여 년 동안 지방행정의 중심 도시이었다.

신라 천년의 왕도 경주는
통일신라 성덕왕(702~737)때 경주의 인구가 백만 명이 살았다면.
2백년이 지난 고려시대(918~1392)의 동경(東京)은 천만 명이 넘는다.
또 천년이 지난 일제식민지 시대(1905년) 라면 줄어서 약 2천만명이라 하자

그런데
일제식민지 때 1936년 경주의 총 인구는 19,748명이었다.

필명도 없이 무례한 그대는
두 번도 생각하지 못하는 단세포적 인간인가?
그대가 정신병자인가? 누가 정신병자인가? 대답해 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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