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화려한 휴가' 90% 이상 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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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화려한 휴가' 90% 이상 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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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 진압 공수부대 지휘관들 기자회견에서 밝혀

^^^▲ 영화 '화려한 휴가'^^^
광주사태 당시 전남도청 책임자였던 11여단 61대대장 안부웅, 62대대장 조창구 예비역 대령 등 공수부대 출신 장교들은 군을 반군으로 왜곡 조작한 영화 ‘화려한 휴가’는 대선을 앞두고 80년 광주사태 당시 공수부대의 자위적 진압작전을 시민들에 대한 '집단학살'로 왜곡한데 대해 당시 작전을 직접 지휘했던 예비역 장교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특전사령관 출신의 민병돈 예비역 중장을 비롯한 공수부대 출신 장교들은 21일 전쟁기념관 무궁화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영화'화려한 휴가'가 전남도청 앞에서 있었던 공수부대의 '자위적 사격'을 애국가를 부르는 평화적 시위대에 대한 집단적 발포로 왜곡한 제작자의 사실왜곡과 이를 방관한 국방부에 항의하고 시정을 촉구했다.

이들은 이날 성명에서 '영화 '화려한 휴가'는 공수부대의 광주사태 진압과정을 편파적'악의적'정치적으로 왜곡'조작했다'면서 국방부는 이와 관련 장병 특별 정훈교육을 실시 할 것 등을 요구하며 '오는 30일까지 영화 제작사가 공수부대원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민.형사상의 자구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어 '광주시민들의 양심에 호소한다. 1980년 5월 21일 대낮에 전남도청 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광주시민들이 먼저 '화려한 휴가'의 왜곡을 지적해 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광주사태 당시 진압작전을 지휘했던 안부웅 대령은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공수부대가 누군가로부터 사격명령을 받아 소총에 실탄을 장전한 뒤, 무릎 쏴 자세를 취한 다음 애국가를 부르는 시민들을 향해 아무런 경고도 없이 일제히 사격하는 장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전남도청 앞에서는 그런 사격도, 그런 사격 명령을 내린 장교도 없었던 점을 강조했다.

이날 광주사태 당시 진압과정에서 오른쪽 팔을 잃은 조창구 예비역 대령은 '어제 그제 두 번 연속으로 영화를 봤지만, 영화의 90%이상은 조작됐다'고 지적한 뒤, 군 조직체계상 민간인에게 어떻게 집단 발포하는 작전을 할 수 있겠는가. 여태껏 진술한 모든 진실은 외면됐다. 그 결과 '화려한 휴가'라는 날조까지 나오게 된 것'이라며 울분을 토했다.

지난 95년 서울지검 국방부 검찰부의 광주사태 조사보고서에는 당시 공수부대의 발포는 시위대가 탈취한 장갑차를 몰고 군인들을 향해 돌진, 공수부대원을 깔아 사망하게 한 사건을 계기로 자위적 조건반사적 대응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안 대령은 '오늘까지 진실을 반복해 얘기해왔지만, 일부 사람들만 증언을 사실로 받아들였을 뿐'이라며 '영화를 보니 너무 황당하고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검찰, 청문회, 대법원 판결까지 확실히 규명된 것을 왜곡하는 의도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민병돈(전 육군사관학교 교장) 예비역 장군은 광주사태 당시 '민간인이 무기고를 습격하고 소총 기관총 장갑차로 중무장 한 뒤, 헬기를 향해 사격하고 교도소를 습격했다,면서 '167명의 민간인과 함께 4명의 경찰관 23명의 군인이 전사했다. 그렇다면 광주시민과 공수부대도 다 같은 역사의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민 장군은 이어 '지난 27년간 광주사태에 대한 여러 차례, 여러 측면의 조사를 통해 진실이 다 드러났는데도, 이런 반군날조를 한 제작사측은 '이 영화는 사실을 근거로 극화했다'는 취지의 말을 자막에 넣어 사실인 것처럼 꾸몄다'면서 '공수부대를 살인집단으로 믿고 있을 이 영화를 본 많은 국민들에게 이제는 국군이 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국민행동본부(본부장 서정갑) 주최로 열린 이날 기자회견에는 장경순(자유수호국민운동 명예의장) 전 국회부의장, 이대용(자유수호국민운동 공동의장) 전 주(駐) 월남 공사, 김홍렬 재향군인회 해군부회장, 김병관 서울시재향군인회장 등의 인사들이 참석했다.

안부웅 씨의 증언 중 일부 요지 <5.18 수사자료 중에서>

"군중들이 "와와" 소리를 지르며 호응한 뒤, 칼과 도끼 등을 든 사람들이 시위대의 전면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 병력 바로 앞에까지 와서 도끼로 병사들의 철모를 툭툭 치면서 "이 새끼를 이걸로 골을 빠개 버려?", 그리고 가위, 칼 등을 눈앞에 대고 "이걸로 눈을 쑤셔버려?" 등의 위협을 해 우리 병사들은 완전히 겁에 질려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병력들은 꿈쩍도 않고 있었습니다."

"차량 싸이렌을 울리며 가보니 어느 은행 앞에 저희 1개 팀 8명이 2백여 명의 시위대에게 포위 당해 그야말로 돌과 화염병으로 타작을 당하는 것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며 도망다니고 있었습니다. 제가 싸이렌을 울리고 가니까 시위대들이 후속부대가 오는 줄 알고 사방으로 도망갔습니다. 시위대가 해산하고 난 뒤에 보니 최상규 하사는 다리가 부러지고 김영상 중위는 얼굴을 돌로 난타 당해 피를 흘리고 있었으며, 6-7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공수대원들은 경계만 하며 시위대에게 해산을 종용하고 있는데 시위대가 먼저 돌을 던지고 화염병을 던지니까 병사들이 흥분하여 때린 격입니다. 공수대원들도 시위대들이 던져대는 돌과 화염병에 무수히 많은 부상을 입었습니다."

"날이 어두워지자 약 2백 미터 정도 되는 지점에서 차량에 불이 나는 것이 목격되어 1개 지역대 병력을 제가 데리고 가보니 "경남" 번호판을 단 타이탄 트럭 1대가 불타고 있었으며, 운전사로 보이는 사람이 구타당해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 운전수는 경찰에 인계하여 후송시키고 다시 로터리로 복귀했습니다."

"5월 19일이면 진압초기로서 초기부터 착검하고 진압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또한 군에서 사용하는 대검은 날이 서 있지 않고 무딘 상태입니다. 대검으로 물건을 자를 수는 없습니다. 광주사태 유언비어 중에 공수대원들이 대검으로 여자 유방을 잘랐다고 하는데, 물리적으로 군의 대검으로 사람 살을 자른 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16시경 대치 중인 계엄군(61대대) 배치선 1미터 전방까지 40대 남자가 접근하여 협박'(내용 : 네놈들이 있던 강원도 오음리 지역의 군인가족을 몰살키 위해 시민을 현지로 보냈다) 한 후 군중 속으로 뛰어 들며 선동, 시위대 전진 투석, 주동자 체포하려다 계엄군 3명 부상"

"당시 노동청 앞 쪽에서 경찰병력이 돌진하는 시위대 차량에 의해 4명이 압사했다는 보고를 받은 상태였습니다."

"21시 경이 지나자 시위대가 앰프를 단 차량으로 도로상을 돌아다니며 최초로 시위대의 선무방송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떤 여자가 애끓는 듯한 소리로 시민들을 자극하는 방송을 했습니다. 목소리와 억양이 마치 이북에서 대남 방송하는 여자들의 억양과 똑같아 계엄군 입장에서 보면 전율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시민들이 들으면 분노를 느끼게 하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지금 기억나는 내용은 "지금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들 씨를 말리려고 왔다. 우리가 이대로 있어서야 되겠느냐, 금남로로 전부 모여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방송이 있은 다음부터 시위양상이 격해졌습니다."

"그 당시 시위대들은 몽둥이, 쇠파이프, 쇠갈고리, 도끼 등 흉기가 될만한 것은 전부 다 들고 있었으며 시위상태도 이전과 약간 달라졌습니다"

"장갑차 1대만 빠른 속력으로 도망가는 계엄군을 향해 돌진하여 계엄군 1명이 깔려 죽었습니다. 그 장갑차는 분수대를 돌아 충장로 쪽으로 갔습니다. 시위대 장갑차가 돌진해 들어옴과 동시에 시위대 쪽에서 총소리가 연발로 났습니다."

이 때 사격명령을 내린 적은 절대 없습니다. 순전히 급박한 상황에서 부대원들이 조건반사적인 사격, 그러니까 돌진하는 시위대의 차량에 압사 당할지도 모른다는 심한 공포감으로 인해 실탄을 삽입하여 발사한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합니다.

실탄을 가진 병사들을 사격통제하지 못한 점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저의 대대뿐만 아니라 다른 대대도 전부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저는 우선 광주사태가 과격해진 중요한 원인이었던 호남인맥의 구조적 문제점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호남은 김대중정권 이전에는 중앙권력에 진출하는 비율이 낮았기 때문에 영남에 비해서 인물이 희소했습니다. 거기에 비극이 있었지요. 영남인들은 인구도 많고 수십년간 집권하는 동안 양성된 인재의 풀이 풍성했습니다.

인맥의 깊이도 있고 폭도 넓었습니다. 그러므로 뭉치더라도 수평으로 뭉쳤습니다. 정치인은 정치인끼리, 기업인은 기업인끼리, 관료는 관료끼리, 검사면 검사끼리, 판사면 판사끼리 뭉칩니다. 그러면 최소한 아니꼽더라도 수긍은 하게 됩니다.

그런데 호남인맥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뭉칠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수직으로 뭉칠 수밖에 없습니다. 예컨대 어떤 郡(군)에서 검사 한 명이 배출됐다고 하면 그 동네 출신 관료, 언론인, 기업인은 물론이고, 농사꾼, 장사꾼, 심지어 여운환이 같은 조직폭력배까지 뭉치는 식입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누구네 동생, 누구네 조카 하면 다 아는 처지니까, 안 봐주다가는 "썩을 놈"으로 왕따를 당합니다. 김대중 정권 들어와서 왕따를 당했지만, 한 때 동교동계의 2인자 역할까지 하던 마당발 정치인 김상현씨의 호칭은 호남에서 "상현성님"으로 통했습니다. 운동권 학생, 신참 정치 지망생은 물론, "동네깡패"들까지 김상현씨를 그렇게 부릅니다.

1980년 5월의 "광주사태"도 그러한 "형님, 동생"하는 지역 분위기를 이해하지 못한 군부의 진압 때문에 사태가 심각하게 커졌을 것입니다. 서울의 학생데모 때나 부마사태 때 강경 진압책을 써서 성공했던 군인들은 광주에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진압을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그같은 진압을 바라본 광주 사람들은 서울, 부산에서와는 달리, 너도나도 달려들어 격렬하게 대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진압 당하는 이들이 매일 얼굴을 마주보며 "성님, 동생" 하던 사이였기 때문입니다. 그 항의에 대해 군인들은 또 강경책을 썼고, 또 다른 항의를 불러왔습니다.....이러한 독특한 정서가 결국은 김대중이 정권을 잡은 후, 집권세력이 부패의 온상이 되게 하는 데에 커다란 작용을 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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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잡기 2007-09-22 16:43:56
진압군이란 반역자 누명 28년 째

연전 대선 당시 대구에서 "6-70대 노인들은 투표할 가치도 없다"는 패륜의 망언을 서슴없이 주절대던 방송 앵커 출신의 정동영이 오늘 밤도 세치 혀를 제멋대로 주절거린다. 엊그제까지 집권 여당의 당의장에서 통일부장관까지 권세를 누리던 자가 자신이 주군으로 섬겼던 노대통령을 향해 반기를 들다 친노파(이광재의원)의 발끈한 공세에 놀라 신당 창당만이 5.18 정신을 계승하고 잔존한 5.16 세력을 척결해야 한다 고? 잠꼬대 같은 5.16 타령은 왜 하는가?

필자는 푸른 5월의 창공에 휘날리는 현수막과 광주와 나주, 멀리 해남군청 앞 정문에 설치된 5.18민중항쟁 분향소,그리고 5.18민중항쟁 28주년기념행사"를 알리는 선전탑을 지켜보며 잔인했던 치욕의 5.18 광주사태를 회고 한다.

28년전, 광주사태로 생존권이 달린 직장을 잃었으며 사태 주범들이 유신 언론 타도라는 이유로 방송국을 불태우고 신문사들을 타도 했기에 군부대로 피난을 했고 경찰서가 점거되고 치안 부재 속에 피신한 곳이 예비군 대대였고 부대를 내 놓으라는 무장 폭도들의 아우성 속에서 살아 남기 위해 서른 일곱살의 나이에 대대장과 함께 총을 쥐고 무장 시위대 진압에 나선바 있다.

부대에서 고립되어 4박 5일 동안 여섯끼를 굶어도 보았고 뜬눈으로 3일 밤을 보냈었다. 80년 5월 27일 전남 도청이 회복되고 계엄당국이 김대중씨를 내란 음모 혐의로 수감 될 즈음 사필귀정 이지만 그에게 연민의 정으로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80년 11월 국보위의 언론사 통. 폐합 조치로 1도. 1사 원칙에 따라 광주에 있는 전남일보 와 우리 신문사가 통합 결정이 났다고 하였다. 아무튼 정부 의 시책으로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신문용지 절감과 사이비기자 척결로 밝은 사회 만들겠다는 정부의 언론 정책에 불평 한마디 못한 체 국보위의 조치를 기다리고 있었다.

통합 결정, 5일만에 하늘이 무너지는 비보가 들려왔다. 사주 의 재력 탓에 통합이 아닌 흡수 폐합으로 돌변, 입 한번 벙긋 못 한체 밥줄이 끊겼다. 필자는 당시 이광표 문공부 장관의 발표를 굳게 믿었다

"존경하는 언론사 종사자 여러분 정부는 통, 폐합 과정에서 한 사람의 이직자가 발생치 않도록없도책임 을 다 할것"의 문공부장관의 발표 이후 필자는 28년 동안 무직 상태다.. .이게 생치가 아니던가, 아직 인치가 또 남아있다.

광주사태 수습 이후 줄줄히 잡혀간 민주화 영웅들에게 쫒겨 살기 위해 걸머진 칼빈 소총 때문에 그들에게 죄인 인양 죽었노라 살아 왔는데 5공 청문회 스타들이 등장하고부터 그들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더니 국민의 정부 들어서기가 무섭게 머리띠 둘러매고 민주화 운동이요, 민중 항쟁의 기수를 자처 하니 이 또한 인치가 아니든가?

졸지에 직장 잃은지 28년 째, 당시는 경찰서를 기습하고 총기를 탈취했던 그들을 폭도로 알고 피난처인 예비군 대대에서 총을 들었던 계엄군과 향토 예비군인 필자는 정동영이 외친 5.16 잔존세력인 유신 언론인으로 남아 5.18 민주화 유공자들과 당시의 폭도들에게 진압군이란 반역자 누명을 안고 28년을 맞이한다

익명 2007-09-22 22:21:38
저 자식들 당장 잡아 들여서 총살시켜야 한다

펜타곤 2007-09-23 20:52:21
지나간 역사를 되돌아 보니 대한민국을 바로잡을 강력한 힘이 나와야 좌빨들의 횡포를 바로 잡습니다.

익명 2008-02-25 12:46:32
너 미친새끼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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