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자주국방으로의 길(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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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자주국방으로의 길(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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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병기개발과 미국의 개입

 
   
  ^^^▲ 일생을 받쳐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하신 故 박정희 대통령
ⓒ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
 
 

미국, 한반도 현상유지 목표하에 자동개입 보장 꺼려

그렇다면 주한미군의 성격은 어떠한가. 1968년 1월 21일 북한 게릴라 부대는 청와대를 습격, 朴 대통령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다. 정규부대가 한 나라의 국가원수를 암살하고자 했다는 것은 전쟁 선포나 다름이 없는 행동이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취할 수 있었던 최대한의 군사행동은 남한 내에서의 게릴라 소탕작전이 전부였다. 북한에 대한 최소한의 보복작전도 우리나라로서는 불가능했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는 미국측이 극구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朴 대통령으로서는 불만이 컸다(註: 1950년 7월 15일 「대전협정」 및 54년 11월 17일 「한국에 대한 군사 및 경제원조에 관한 대한민국과 미합중국간의 합의 의사록」참조). 그런데 이 때 공교롭게도 또 한 가지 사건이 발생했다. 1·21 사태 2일 후에 북한에 의해 나포된 미 「프에블로」함의 승무원 석방교섭에서 미국 정부는 (1) 우리나라와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어깨 너머로, (2) 합법정부도 아닌 북한 정부를 맞상대함으로써 합법정부로 취급하는 식의 교섭을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UN 총회 결의(1948년 12월 12일)에 의해 한반도에서는 대한민국만이「합법정부」라고 보증받고 있던 우리나라로서는 이러한 미국의 배신이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자 국민들의 데모가 연일 계속됐으며, 드디어 판문점 입구에 있는 자유의 다리에서는 한국 학생과 미군간에 충돌이 발생했고 미군의 발포로 다수의 학생들이 부상을 당했다. 이렇게 돼서 한미간의 관계가 악화되자 존슨 대통령은 번스 전 국방차관을 특사로 파견, 무마공작에 나섰다.

한국측은 「작전지휘권의 주요 부분을 한국군에 넘겨줄 것」「북으로부터의 침략 등 긴급사태 발생시는 자동적으로 UN군 지휘권이 발동되도록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개정할 것」 등을 강력히 요구했다. 즉 북한과 같이 자동개입 조약을 체결하자는 것이었다. 이 회담은 난항을 거듭해서 번스 특사의 체한 일자가 예정보다 2일이나 연기될 정도였다.

그러나 미국측은 끝끝내 「북한으로부터의 침략에 대해 즉각 보복」하는 데는 동의하지 않았다. 즉 주한미군의 성격은 한반도에서의 전쟁 억제가 그 임무라는 것이었다. 풀어서 설명하면, 「북한이 남한을 공격할 때에는 방어전이 일어나겠지만, 전투지역은 남한 내로 한정된다. 이 때 미군은 협의 후 행동하겠다. 남한의 북한에 대한 공격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저지하겠다」는 뜻이다. 미국의 속셈은 남한이건 북한이건 전쟁은 하지말고 현상유지를 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6·25와 같은 제2의 한국전쟁이 일어나도 개입은 자제하겠다는 태도가 분명했다.

닉슨 행정부는 71년 3월에 자동개입에 대한 보장도 없이 주한미군 제7사단을 철수시켰다. 그리고 앞으로 5∼6년 후에 주한미군은 완전 철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렇게 되면 6·25 직전과 똑같은 상황이 된다. 김일성으로서는 6·25 때와 똑같이 또 다시 오판할 소지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국가안보를 책임지고 있는 朴 대통령으로서는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71년 1월 5일자 동아일보 사설을 통해 당시 우리의 절박한 입장을 엿볼 수 있다. 「우리가 요망하고 싶은 것은 미국이 … 한국이라는 자유의 교두보를 절대로 포기할 수 없으며, 어떠한 대가를 치러서라도 꼭 수호할 것이라는 명백한 의사를 소련이나 중공이나 그리고 북한에게 어떠한 형식이나 경로를 통해서라도 꼭 전달해 주었으면 하는 일이다.」 6·25 직전 주한미군이 철군할 때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 애원하던 말과 똑같다.

소련, 북한군 현대화에 전폭적 지원

6·25 한국전쟁 때 한국군은 미국이 제공해 준 병기와 장비를 가지고 싸웠고 북한군은 주로 소련으로부터 공급을 받았다.

휴전 후 단시일 내에 소련은 북한군에게 각종 군장비를 소련군 현역 수준으로 확보해 주었고, 특히 공군은 최신 전투기를 포함, 대폭적으로 확장해 주었다. 또한 전쟁복구의 기본방향을 북한경제의 자립에 두고 중화학공업을 위주로 지원해 주었다. 이와 동시에 군수산업도 본격적으로 지원, 북한군이 필요로 하는 각종 병기, 탄약, 장비를 자체 생산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었다.

그 결과 1970년 11월 2일에 개최된 제5차 전당대회에서 김일성은 "당의 4대 군사방침이 훌륭히 관철된 결과 인민군대는 강력한 공격수단과 방위수단을 다 갖춘 불패의 혁명무력으로 되었다. 전체 인민이 다 총을 쏠 줄 알며, 총을 메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북한의 모든 지역에 방위시설이 구축되었고 주요 시설이 요새화 되었으며, 소총은 물론 다른 여러 가지 현대적 무기와 전투기술기재들까지 만들 수 있는 자립적 군수공업기지가 건설되었다"고 호언했다.

이에 반해 미국의 한반도 정책의 기조는 현상유지였다. 북한의 침공도 방지해야겠지만 남한의 군사력이 북한을 자극하는 수준으로 강해지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더욱이 휴전협정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휴전 반대, 북진통일」정책에는 골머리를 앓은 경험이 있다. 그래서 미국은 「한국군이 공격능력을 갖게 된다는 것은 바로 아시아의 긴장을 배가시키게 된다」라는 판단을 갖게 됐으며, 따라서 한국군의 현대화에는 아주 소극적이었다.

그 결과 시간이 흐를수록 남북한간에는 군사력의 격차가 생겨나게 됐으며, 이로 말미암아 朴 대통령은 「국군 장비의 현대화」를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판단하고 조치를 취해 나갔다.

미국,「브라운 각서」를 통해 국군 현대화 약속

미국에서 한국군의 파월 요청이 있자 朴 대통령은 1965년 5월 존슨 美 대통령과 워싱턴에서 회담을 가졌는데, 이 때 「한국군 현대화」에 대한 원칙이 합의됐다.

그 구체적인 사항은 서울에서 개최되었던 한미 정부 간 회담에서 합의됐는데(1965년 7월), 당시 주한 美 대사였던 브라운이 서명했다고 해서 「브라운 각서」라고 칭하게 됐다. 그 내용은 5개항으로 구성돼 있었다.

(1) 한·미 두 나라는 양 정부간에 사전협의 없이 주한미군이나 한국군을 감축시키지 않는다<(註: 한국군을 월남에 파병해서 미국을 돕겠으니 주한미군을 철군하지 말라는 것).

(2) 1966년 회계연도 미국의 한국 군사지원 계획에, 한국의 1개 예비사단을 기성 전투사단으로 강화하기 위한 장비구입비 700만 달러를 추가한다(註: 당시 맹호사단을 월남에 파견키로 약속했다. 그러니 맹호사단 대신 1개 예비사단을 현역사단 수준으로 강화하기 위해 장비구입비 700만 달러를 원조한다).

(3) 66년 회계연도 중에는 군원이관계획을 중지하며, 군원이관에 포함된 물자를 한국에서 사들인다(註: 군원이관계획이란 한국군 창설이래 한국군에 대한 모든 비용이 미국의 무상 군사원조로 이루어져 왔는데, 이를 66년도부터는 한국측에서 부담키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한국군 월남파병의 대가로 66년 회계연도의 한국군 유지비만큼은 미국측에서 무상으로 원조키로 했다. 그 대신 장비와 물자만큼은 한국에서 돈을 주고 사기로 했다. 이 때부터 장비와 물자지원은 군사차관으로 이관된다).

(4) 한국군의 화력, 통신 및 기동성을 현대화한다(註: 당시 한국군이 사용하던 소총이나 기관총은 2차대전 때 쓰던 것이다. 미국에서는 이런 구식 총기류는 이미 폐기했으므로 탄환생산도 중지하고 있었다. 통신장비나 군용차량도 사정은 같았다).

(5)항은 주월 한국군에 관한 사항이기 때문에 생략한다.

이상이 소위 「브라운 각서」인데 이 중 제4항이 바로 한국군의 현대화 계획이다. 「브라운 각서에 의한 한국군 현대화계획」이라고 칭한다.

지지부진한 '브라운각서' 이행

그러나 「브라운 각서에 의한 한국군 현대화계획」이 전혀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는 것은 각서 작성 후 약 5년이 지난 1970년 2월 24일부터 열렸던 「사이밍톤」 청문회에서 입증이 됐다.

이 청문회에서 미국의 화일러 통합참모본부장은 한국군의 장비가 얼마나 형편없는가를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한국 지상군의 장비는 한국전쟁 당시의 것이며, 제2차 대전 당시의 것까지 섞인 고물들이다. 공군 역시 장비개선이 필요하다."

 
   
  ^^^^^^▲ 일생을 받쳐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하신 故 박정희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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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국군이 2개 사단 이상의 병력을 월남에 파병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이렇게 됐으니 朴 대통령의 대미 불신은 클 수밖에 없었다. 朴 대통령의 북한에 대한 위기의식과 미국에 대한 불만이 어떠했을까는 <도표 10-1>을 보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도표는 영국 전략연구소 보고(1970년 9월 14일)에 의한 남북한 군사력 비교이다. 몇 가지 항목을 들어 설명하고자 한다. 전차(戰車)를 보면 한국군의 주력 탱크는 M-4인데, 이 전차는 2차대전 때 쓰던 구식 병기로서 장착한 포는 76㎜이다.

이에 반해 북한군은 T-54, T-55, T-59 등을 보유하고 있는데 100㎜ 포를 장착하고 있으니 한국군의 탱크로는 대적할 수 없다. 전차 대수도 무려 900대나 된다. 화포(火砲)에 있어서도 북한은 대공포 1,500문, 화포 6천 문으로 한국군을 압도하고 있다. 전투기에서는 남한이 200기를 보유한 데 비해, 북한에는 최신예기인 MIG21 90기를 포함, 총 580기를 보유하고 있다.

세계적인 전략 평론가는 북한군과 남한군의 군사력 비교(Military Balance)를 3 : 1 이라고 했다. 이러한 사정은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과 꼭 같다. 한국전쟁 때 남한은 탱크 한 대, 전투기 한 대 없는 상태에서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당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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