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자주국방으로의 길(2)
스크롤 이동 상태바
[특집] 자주국방으로의 길(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2장. 병기개발과 선의의 경쟁

 
   
  ^^^▲ 일생을 받쳐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하신 故 박정희 대통령
ⓒ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
 
 

朴 대통령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즈음 한일각료회의(7월 21일∼23일)가 서울에서 개최됐는데, 朴 대통령은 청와대를 예방한 일본측 각료에게 "미군이 영구히 주둔해 달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군의 현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현 상태에서 이러한 문제가 나온다는 것은 시기상 적절치 않다"라며 그 고충을 털어놓았다.

"북한이 단독으로 남한을 침공할 때, 이에 맞서 격퇴하려면 무엇보다도 국군의 현대화가 시급한데, 현재로서는 만족할 만한 상태가 아니다. 이런 능력을 갖기 위해서는 앞으로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 朴 대통령의 솔직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朴 대통령은 1970년 8월 15일, 25주년 광복절 기념사에서 두 가지 평화적인 제안을 했다.

첫째, "북한이 무장공비 남파 등의 모든 전쟁도발 행위를 즉각 중지하고 소위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이나 폭력혁명에 의한 대한민국의 전복을 기도해 온 종전의 태도를 완전히 포기하겠다」라는 점을 명백하게 내외에 선언하고 이를 행동으로 실증할 때 …… 남북한에 가로놓인 인위적 장벽을 단계적으로 제거해 나갈 수 있는 획기적이고 보다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할 용의가 있다 ……

또한 북한이 한국의 민주, 통일, 독립과 평화를 위한 UN의 노력을 인정하고 UN의 권위와 권능을 수락한다면 UN에서의 한국문제 토의에 북한이 참석하는 것도 굳이 반대하지 않겠다?"라는 제안이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한반도에서는 「대한민국만이 합법적인 정부라고 UN이 인정」하던 시절이다. 그런데 북한이 UN에 들어와도 좋다는 뜻이니, 가히 획기적인 제안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다음과 같은 「선의(善意)의 경제 경쟁」에 대한 제안이다. 朴 대통령이 이러한 경제 경쟁 제안을 하게 된 것은 경제건설에 있어서는 북한을 능히 앞지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국군의 현대화에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시간을 벌자는 뜻이 깔려 있었다.

어떤 체제가 좋은지 선의의 경쟁을 하자

남한은 공업화의 출발이 북한보다 10년 가까이 늦었는데도 1960년대에 들어오면서 제1차 및 제2차 5개년계획을 성공적으로 초과 달성했고 앞으로의 전망도 밝았으니 70년대가 되면 북한의 공업(크게는 경제)을 모든 면에서 앞지르리라는 것은 명백해졌다. 남한의 60년대는 북한 경제를 추월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한 귀중한 10년이었다.

이러한 입장은 마침내 「어떤 체제가 좋은지 선의의 경쟁을 하자」는 朴 대통령의 제안으로 표출되었다. 1970년 8월 15일, 제25주년 광복절 기념사에서 朴 대통령은 "더 이상 무고한 북한 동포들의 민생을 희생시키면서 전쟁준비에 광분하는 죄악을 범하지 말고, 보다 선의의 경쟁, 말하자면 민주주의와 공산독재의 그 어느 체제가 국민을 더 잘 살게 할 수 있으며, 더 잘 살 수 있는 여건을 가진 사회인가를 입증하는 개발, 건설, 창조의 경쟁에 나설 용의는 없는가?"라고 김일성에게 제안을 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세계의 빈곤한 나라들은 북한이 남한보다 경제적으로 월등히 앞서 있다고 알고 있었고, 그 이유로는 북한은 공산사회주의 방식의 경제개발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을 때이다. 자유민주주의는 돈 많은 나라에서나 적용되는 체제일 뿐, 경제적 후진국은 공산사회주의식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인식하고 있는 나라가 많았다.

그렇다면 朴 대통령의 제안은 실로 엄청난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공산사회주의라는 기본이념은 인민을 잘 살게 하기 위한 경제이론에서 도출된 것이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공산사회주의 방식보다 우월하다고 입증이 된다면 공산사회주의는 근본부터 무너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註: 현재 공산사회주의가 일시에 몰락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당시 朴 대통령의 제안은 공산사회주의의 근본이념에 대한 도전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더욱이 이러한 제안이 선진국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후진국 대열에 속해 있는 한국에서 나왔고 그것도 북한보다 경제적으로 뒤떨어졌다고 느끼고 있던 남한으로부터 나온 도전이었다. 더욱이 김일성으로서는 북한 주민들에게 「남한 주민들은 굶주리고 헐벗고 전기불도 없는 비참한 삶을 살고 있으니, 하루 속히 통일을 해서 남한 주민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선전해 왔으니, 朴 대통령의 이러한 도전은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중대사였다. 김일성의 절대권위에 손상이 가며 통치하는 데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김일성은 朴 대통령의 도전에 대해 즉각적으로 "철두철미 허위와 기만에 찬 모략전"이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이렇게 되면서 남북한은 치열한 경제전으로 돌입하게 된다.

1970년 수출 10억 달러 돌파

朴 대통령의 수출에 대한 집념과 온 국민의 노력으로 우리나라는 1964년에 1억 달러 수출을 기념해서 「수출의 날」을 제정한지 만 6년 만에 10억 달러 수출목표를 달성했다.

우리나라가 10억 달러를 수출했다는 사실은 당시로서는 실로 엄청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정부의 경제개발 제2차 5개년계획을 보더라도 목표 년도인 1971년의 수출계획이 5억 5천만 달러였는데, 이 목표의 182%에 해당하는 10억 달러를 71년이 되기도 전인 70년에 수출한 것이다. 이 때부터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이 실감 있게 유행되기 시작했다. 이런 이유로 70년 11월 30일에 열린 제7회 수출의 날 기념식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朴 대통령은 이 기념식에서 치사를 통해 "(우리나라는 금년도에) 수출 증대의 판가름이 될 10억 달러 수출의 고비를 달성함으로써,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끝나는 70년대 중반(1976년)에는 30억 달러의 수출을 이룩해야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상공부는 수출 장기계획(10개년계획)을 마련했는데, 71년의 수출 목표를 13억 달러, 76년에 35억 달러, 80년에 53억 달러라는 목표를 제시했다.

朴 대통령은 김일성에게 제안한「선의의 경제 경쟁을 수량적으로 표시한 것」이 수출액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50억 달러만 수출하게 되면 우리나라의 국력은 북한을 완전히 압도할 수 있다고 믿었다는 뜻이 된다.

이렇게 70년의 세모(歲暮)는 수출 10억 달러 달성으로 축하 분위기 속에 마감이 됐다.

그런데 71년 초하루가 되자, 朴 대통령은 신년사를 통해 국가안보의 위기를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나섰다. 원래 신년사라는 것은 새해를 맞이하는 국민들에게 국가원수가 축복을 기원하는 담화문 형식이다. 그런데 71년의 신년사는 살벌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계속]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메인페이지가 로드 됐습니다.
가장많이본 기사
뉴타TV 포토뉴스
연재코너  
오피니언  
지역뉴스
공지사항
동영상뉴스
손상윤의 나사랑과 정의를···
  • 서울특별시 노원구 동일로174길 7, 101호(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617-18 천호빌딩 101호)
  • 대표전화 : 02-978-4001
  • 팩스 : 02-978-830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종민
  • 법인명 : 주식회사 뉴스타운
  • 제호 : 뉴스타운
  • 정기간행물 · 등록번호 : 서울 아 00010 호
  • 등록일 : 2005-08-08(창간일:2000-01-10)
  • 발행일 : 2000-01-10
  • 발행인/편집인 : 손윤희
  • 뉴스타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뉴스타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ewstowncop@gmail.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