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북한 인권운동가 박지현 씨(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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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북한 인권운동가 박지현 씨(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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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탄하지 않았던 탈북과정... 동생은 강제북송 현재 생사 여부 몰라
영국 BBC, ITV, Channel 4 등 다양한 방송 출연해 북한 문제 세계에 알려

북한 인권 운동가 박지현 씨는 과거 두 번의 시도 끝에 2008년 탈북에 성공했으며, 그 과정에서 성매매와 강제노동 등을 경험했다. 어려움을 겪은 후 그녀는 탈북민의 인권을 돕기 위해 인권운동가로 활동했으며, 2017년부터 탈북 여성과 북한 아동의 인권 보호를 위해 대북인권단체 ‘징검다리’ 공동대표를 맡았다.

그녀는 탈북이후 현재까지 탈북민의 영국 정착 및 북한 인권 보호를 돕고 있으며, 올해 2월 20일 국제엠네스티(Amnesty Brave Awards) 영국지부가 수여하는 인권상을 받았다.

뉴스타운에서는 9월 박지현 북한 인권운동가와 인터뷰를 통해 탈북민의 인권 보호와 그 배경에 대한 이야기를 진행할 예정이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를 감안해 박지현 북한 인권운동가와 비대면 인터뷰 방식으로 이뤄졌다.

다음은 박지현 북한 인권운동가와 이메일 인터뷰 내용이다.

Q. 탈북과정이 순탄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처음 탈북할 때 경위와 과정은?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당원이셨고 어머니는 부양가족으로 집에서 살림을 맡으셨다. 아버지는 군 복무를 하며 간첩을 잡는 일도 하셨다. 1980년대 북한에는 소련에서 넘어온 빨간 굴삭기 3대가 있었으며, 아버지는 굴삭기 운전사 중 한 명이었다. 김일성을 위한 특강건설에도 많이 동원됐으며, 무산광산과 경성 관모봉에 김일성 특강을 짓기 위해 일도 하셨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북한인들 모두가 타격을 받았고, 큰 아버지가 굶어서 죽었다. 이 사건으로 아버지는 큰 충격을 받아 쓰러졌고 돈이 없어 약 한 첩도 구할 수 없었다. 1997년 경비대에서 군 복무하던 동생이 휴가를 나왔으나 군인들이 집으로 찾아와 동생에 대한 감금 명령을 내렸다.

몸이 불편해 앓아누운 아버지는 저에게 동생을 꼭 살려야 한다는 말을 남긴 채 사경을 헤매셨다. 1998년 2월 16일 감시하던 군인들이 명절을 보내고 다시 오겠다고 하던 순간 나는 북한을 탈출했다. 아버지를 찬방에 혼자 두고 쌀 한 공기와 씻어놓은 내복 한 벌을 옆에 두고 집을 떠났다. 강을 건너 탈출했지만 인신매매로 팔려가게 됐고 군인들의 끈질긴 추적에 의해 동생과 갈라지게 됐다. 끝내 동생은 강제북송 됐고 현재 생사 여부를 알지 못한다.

감옥에서의 다리
감옥에서 폭행 당했던 다리

그 후 중국에서 인신매매가 되어 노예의 삶을 살다가 결국 다시 강제북송 됐다. 강제수용소에서 짐승같이 일을 하다 다리가 다치자 나를 풀어주었다. 국가 감시 구역인 아이들 임시보호 구역에서 잠시 지냈지만, 북한에서는 매주 나의 건강을 확인하기 위해 사람을 보냈다. 아마 내가 건강을 회복하면 다시 수용소로 데려갈 모양이었다. 그때 당시 나는 5살 된 아들이 홀로 중국에 있었기 때문에 아들과 다시 만나야 된다는 희망 하나로 버텼다. 조금 걸을 수 있게 되자 다시 도망쳤고, 중국에 또다시 인신매매로 팔려갔다. 중국에서 간신히 아들을 찾아 2008년 영국으로 왔다.

Q. 현재 활동하고 있는 단체에 대해 소개하면?

현재는 영국에 기반을 둔 ‘커넥트 북한’이라는 단체에서 영국에 거주하는 탈북민을 돕고 있다. 탈북민에게 언어, 의료, 병원, 난민 비자 등 영국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들에 대해 조언을 주면서 영국 정착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2017년부터 활동해온 징검다리는 국제단체로 현재 탈북민들로 구성된 단체이며, 북한여성들과 아동들, 종교의 박해를 알리고 있는 역할을 한다.

또한 영국 국제사면기구 지부들과 매해 북한 인권 알리기 행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탈북자들의 강제북송 중지를 위한 캠페인 활동을 한다. 그들을 위해 영국에 있는 중국대사관에 탈북자들 강제북송 중지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영국의 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강의를 한다. 몇 년 전부터 영국 중·고등학교에서는 정치, 경제, 문화, 인권 분야에서 각 한 사람씩 초대해 학생들에게 미래와 사회생활에 도움을 주기 위한 초대 강사 프로그램이 생겨났다. 나는 인권 부분에 선정돼 영국의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강의를 하고 있다. 윈스턴 처칠 수상의 모교인 Harrow school과 chatham school, st paus school 등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또한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과 유럽 전역에 있는 대학교들을 다니면서 강의를 하고 있다.

윈스턴 처칠 수상 모교인 Harrow schooh에서 강연하는 박지현 인권운동가

북한 인권에 대한 칼럼들을 신문에 기고하는 일도 한다. 영국 BBC, ITV, Channel 4, 런던 티비, BBC World radio, National Geographic 등 다양한 방송에 출연해 북한 문제에 대해 알렸다. 2018년에는 헤이그 국제 형사재판소에서 북한 여성들에 대한 강제인신매매와 성노예, 북한 북송 당시 그들의 잔인한 인권유린에 대해 증언도 했다.

2018년 헤이그 국제 형사 재판소
2018년 헤이그 국제 형사 재판소

Q.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외국인들에게 국군 포로분들을 알리는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라는데.

준비했던 프로젝트는 국군포로 자녀분들의 수기들을 모아 책으로 편집하여 알리는 것이었다.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 ‘버려진 영웅들 43호’도 함께 홍보하면서 국군포로들의 실상을 알리려고 준비했다. 이 프로젝트를 위해 전 세계 많은 자원 봉사자분들이 수기 번역에 도움을 주셨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가 일어나면서 프로젝트가 중단됐다.

국군포로 행사를 기획했던 가장 큰 이유는 한국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그 전쟁의 주범인 김일성에 대해 아는 외국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살면서 많은 외국인들을 만났다. 그러나 그들은 한국전쟁을 한국이 일으킨 전쟁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또, 한국전쟁으로 인해 북한 사람이 많이 죽었다고만 인식하고 있었으며, 김일성이 누구인지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았다. 외국에 한국인 학자는 많았지만, 이들도 제대로 된 역사를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처음 북한인권 단체에 왔을 때였다. 누군가 4.3 제주 사건을 아냐고 물었다. 나는 한국의 역사에 대해 잘 몰랐으며, 그 질문에 답변을 할 수 없었던 내가 부끄러웠다. 그 후로 나는 한국 역사를 계속 배우고 있으며, 특히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 대해 자세히 공부했다. 6.25전쟁 당시 북진통일을 이뤄 공산당에 억눌려 사는 북한인 노예해방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많이 공부했다.

또 1950년 10월 평양에서 태극기를 든 시민들 앞에서 자유를 위해 싸워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살아야 한다고 말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연설을 들으며, 대한민국 역사를 배우기 시작했다. 공부를 계속 하던 중 탈북민과 외국인들이 한국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 직접 국군 포로들의 프로젝트를 진행해 올바른 역사를 알려야겠다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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