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인천 상륙 작전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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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인천 상륙 작전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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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인천 월미도에 상륙 개시한 한미 해병대

^^^▲ 월미도 상륙한 해병대^^^
공세로 전환

전선이 1백20마일 낙동강전선에서 교착상태에 빠졌던 1950년 8월 19일 당시의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장군과 해군작전부장 셔어먼 제독은 멀리 워싱턴에서 동경의 맥아더 사령부를 방문하는 한편 동 22일 한국 전선을 시찰한 다음 현지 수뇌들과 일련의 군사 회의를 열었다.

수세에서 반격으로 한국 전선의 정세를 일변시키려는 중요한 전술과 전력문제가 논의된 듯 회의가 끝난 동 23일 콜린스 장군은 “한국에서 유엔군 교두보를 유지할 자신이 있다”고 말했고 셔어먼 제독은 “미 해병대의 지상 항공 증원대와 극동 해군부대를 한국 전선에 증원하겠다”고 언명했는데 이 회의에서 한국 전쟁사에 길이 남을 인천 상륙작전이 논의되었다.

또한 이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한국 해군에 의한 인천 상륙의 전초전이 벌어졌었다. 8월 16일부터 해군은 인천공략의 전략적 요점인 덕적도에 대해 공격을 시작, 동 20일 완전 탈환했고 23일에는 영흥도, 9월 10일에는 연평도를 완전히 점령했다.

상륙부대를 실은 대 수송선단은 9월 20일 부산항을 떠나 인천으로 향하였다. 이 수송선단의 행방과 목적지가 적들에게 알려지지 않기 위해 유엔함대와 비행기들은 동서 양 해안에 마구 폭격을 가했다.

전함 미주리호의 16인치 포는 동해안의 삼척을 때렸고 해군특공대들은 포항 서쪽인 군산 등지의 적을 건드려 보기도 하면서 적들의 신경을 흐리게 했다. 병력과 물자를 실은 유엔 함정이 고요한 인천 앞 바다를 뒤덮고 있었다. 12일에는 함재기가 서해안 일대를 맹공격했고, 13일부터는 유엔 함대 순양함과 구축함이 인천을 중심으로 함포 사격을 시작했다.

월미도 상륙

9월 15일 저녁 6시 한미 해병대는 비 내리는 인천 월미도에 상륙을 개시했다. 4백척의 상륙용 주정이 네 번에 걸쳐 파상적으로 상륙 교두보를 만들었다. 한국 함정 15척, 미군 함정 226척을 비롯해서 도합 7개국 함정 261척(영국 12, 캐나다 3, 호주 2, 뉴질랜드 2, 프랑스 1 포함)이 미 해군소장 도일 사령관 지휘와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 관전 하에 이 작전에 참가했다.

당시 유엔군 총사령관이 유엔에 제출한 보고에 의하면 작전은 인천을 크게 포위하려고 진행되었다 한다. 제 1단계는 월미도 점령이었는데 미 제 5해병사단 제 3대대는 공격 개시 후 두시간만에 이 섬을 완전 점령했었다.

제 2단계는 인천반도의 확보였었는데 상륙 주력부대인 국군해병 4개 대대와 미 제 7보병사단 그리고 미 제 1해병사단은 전격적인 공격을 감행, 인천을 순식간에 점령하여 괴뢰군 18사단과 수비대를 격파시키고 17일 오후 8시 김포 비행장을 완전 탈환했다.

또한 북진부대와 나누어져 동쪽으로 진격한 부대는 10마일 진격하여 수원을 확보함으로써 인천 반도는 완전히 아군수중에 들어와 버렸다. 제 3 단계는 서울 수복이었다. 2개 한국 해병대대와 미 제 1해병사단이 19일 네 지점에서 한강을 도하하여 서울 서 남방 2마일 지점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이 승전 뉴스가 전해지자 같은 날 부산 역전에서 수도 돌입 축하식과 인천 상륙 축하회가 벌어졌으며 20일에는 아군 주력이 한강을 도하 서울 공방전을 개시했다. 괴뢰군은 소위 민족 보위상 최용건을 방위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약 2만명의 병력으로 최후의 저항을 시도하는 한편 마지막까지 시가에 모래포대를 쌓고 발악을 했고 애국자, 부녀자를 납치 또는 학살했다.

20일 오후 유엔군의 수륙양용 전차대가 능곡에서 서울 - 평양간 도로를 차단하고 20일에는 국군 해병대가 서대문으로 시가지에 돌입, 23일에는 유엔해병대가 연회대학 뒤 고지를 탈환하였다.

25일에는 서울에서 개전이래 가장 심하게 저항하는 적을 물리치면서 미 제 1해병사단은 덕수궁에 진격했고 이날 아침 한강을 건넌 미 제 7보병사단은 남산을 탈환했으며, 26일 정오 한국해병대 제 2대대 6중대 용사들이 중앙청에 감격의 태극기를 높이 올렸다. 유엔군 반격작전 제 1단계는 이날 오후 10시 20분 완료되었고 맥아더 장군은 서울 탈환 특별 코뮤니케를 발표하였다.

작전 성공의 의의

28일 아침으로 잔적이 완전 소탕된 서울은 알미늄 합금제 교량을 비행기로 날라와 한강다리를 가설하고 29일 정부가 환도하였다. 이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을 동반 서울에 귀환했고 맥장군은 수복된 서울을 이대통령에게 반환하여 중앙청 앞 넓은 뜰에서 역사적인 서울 수복식이 거행되었다.

세기적인 인천 상륙 작전은 이와 같은 전투과정으로 수도 서울 수복이라는 뜻깊은 성과를 맺었다. 그러나 이 상륙전의 성과는 비단 여기에 그치는 것뿐이 아니었다. 불법 남침을 한 괴뢰군들의 뒤에서 전열의 허리를 끊고 그 병력과 장비를 섬멸하려는 유엔군의 목적이 훌륭하게 이루어질 터전을 닦았던 것이다.

즉 38선 이남에 잔류한 괴뢰들을 협공 소탕하려는 치밀한 유엔군 반격 작전에 결정적이고 효과적인 전과를 보장한 작전이었다. 그렇기에 상륙에 참전한 한미 해병대나 미 제 7보병사단 및 17연대 용사들은 온갖 전공 담이 한없이 깃들어 있는 용감한 전투를 했다.

<13회= 서울 수복 작전이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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