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중진공업국을 향하여(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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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기계공업의 태동(자동차) - 21

 
   
  ^^^▲ 일생을 바쳐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하신 故 박정희 대통령
ⓒ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
 
 

부품공업의 급신장

각 자동차 조립공장의 성쇠가 대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을 때, 정부가 할 일은 부품공업의 국제화라는 어려운 과제를 풀어나가는 것이었다.

1974년도의 장기 자동차공업 진흥계획(이하 74 장기진흥계획으로 명칭)의 진짜 알맹이는 오히려 부품공업의 진흥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자동차공업의 정착은 건전한 부품공업의 기반 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부품공업 없는 조립공장이란 문자 그대로 사상누각이다.

1974년 장기진흥계획에 의하면, 원칙적으로 부품 한 종류에 한 업체를 육성하기로 했다. 최신 대량생산시설을 갖추기로 했다. 적극적으로 외국 유명메이커와 합작 또는 기술제휴토록 했다. 정부에서는 적극 지원하되 될수록 昌原 공업기지에 입주토록 했다.

그런데 당시 우리나라의 부품공업은 아직 미약한 단계이니 정부에서 이끌어 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공업의 단계별 육성정책에서 부품공업은 유치원 단계로서 정부가 어머니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부품공업을 육성도 해주어야 하고, 대기업체인 모기업의 횡포로부터 보호도 해주어야 했다. 이 일을 정부에서 맡게되니 상공부로서는 힘겨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부품공업을 소형선박에 비유한다면, 상공부는 항구의 방파제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1975년 1월 상공부는 자동차부품에 대한 수입허가 검토권한을 자동차공업협동조합에 이양해 버렸다.

구자영(具滋英) (당시) 상공부 차량과장의 회고담을 들어본다.

구 과장은 우리나라 조선공업 육성에 공이 크다. 서울공대 조선과 출신인데, 기계공업 전반에 대해 기술적인 면에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굽힐 줄 모르는 소신파였다. 조선공업 육성에서 수완을 발휘하자 상공부에서는 인정받는 행정가로 평을 받게 되었고 그래서 "핀치히터격"으로 자동차공업 육성을 책임지게 되었다. 당시 상공부로서는 자동차공업 육성이 가장 중요한 과제일 때이다.

구 과장이 차량과장으로 부임한 것은 1974년 8월 10일이었다. 부임하고 보니, 차량과 직원은 자동차 부품수입 업무에만 매달려 있더라고 한다. 자동차 조립업자가 찾아와서, 책상머리에 앉아서 졸라대고 상공부직원은 국산품을 쓰라고 권하고 꼭 "도떼기시장"에서 물건 흥정하는 식이었다고 한다. 한 회사가 아니고, 모든 자동차 조립회사가 매일같이 상공부 차량과에 출근을 하는 형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자동차 조립업자는 상공부에서 수입거절을 당하면 압력단체를 동원하기도 했다.

구 과장은 이래가지고는 진정한 자동차공업 육성이란 불가능하다고 느꼈다. 도대체 자리에 앉아서 사무를 볼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고 회상한다. 그래서 구 과장은 일대 용단을 내렸다. 자동차부품 수입 심사권한을 자동차공업협동조합에 위임해 버렸던 것이다. 이러한 조치에 대해 자동차 조립회사는 극심한 반대를 했다. 심지어 부하직원들까지 "협동조합에는 그런 일을 맡길 수 없다"라며 반대를 했지만 강행했다고 한다. 이 조치는 결과가 좋았고 구자영 (당시) 과장의 큰 업적으로 지금까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다음에는 자동차공업협동조합의 윤준모(尹準模) (당시) 이사장의 증언.

"과거에는 상공부가 압력에 견디다 못해, 국산화가 되고 있는 부품도 수입을 허가한 경우가 있었다고봅니다. 그러나 협동조합쪽 입장으로서는 국산화되고 있는 부품이란, 바로 조합회원이 생산하고 있는 제품이기 때문에 수입을 해줄 까닭이 없습니다. 이 조치는 우리나라 자동차 부품공업 육성에 크게 이바지한 정책입니다. 결국 자동차 조립업자는 국산품을 쓸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조치가 실시된 후에는 자동차 조립회사가 상공부를 귀찮게 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상공부도 편해졌다고 봅니다. 협동조합은 과거 미군에 납품한 경험도 많아서, 검사시설을 완비하고 철저한 검사를 실시했습니다. 그리고 수수료를 약간씩 받았는데, '티끌모아 태산'이라고 이 수수료가 모여서 조합회관까지 건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상이 윤 이사장의 증언인데 자동차 부품공업도 육성되었고, 상공부 실무자도 편해졌고, 협동조합 건물도 생겨났으니 一石三鳥라는 뜻이 된다. 자동차조립업체는 국산부품을 사용하지 않고는 자동차생산을 못하게 된 것이다. 이 조치는 부품제조업체와 자동차 조립회사간의 의무와 권리가 완전히 동등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1975년 12월에는 부품제조업체를 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하여 중소기업 계열화 촉진법을 제정했다.

이런 식으로 정부가 유도해 나가니 부품공업도 급신장하여 대규모 부품공장들이 창원에 속속 건설되기 시작했다. 창업하는 회사도 많았다. 새로 건설되는 공장은 모두 국제경쟁을 목표로 해서 지어나갔다. 외국의 유명회사와 합작 내지는 기술제휴를 했는데 구미(歐美) 쪽이 많았다. 앞으로 일본과 수출경쟁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도표 9-23>은 그 추세를 말해준다. 한국자동차공업협동조합의 회원수가 1975년을 기점으로 급상승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자동차부품의 수출도 늘어갔다. <도표 9-24>는 연도별 자동차 수출액수인데, 완성자동차 수출과 비례해서 부품수출도 급신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1981년에 가서 완성차 수출, 부품 수출 모두 1억 달러를 돌파해 합계 2.3억 달러를 수출했다. 74년 장기진흥계획의 목표인 1.5억 달러 수출을 달성한 것이다.

 
   
  ^^^^^^▲ 일생을 바쳐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하신 故 박정희 대통령
ⓒ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
 
 
 
   
  ^^^^^^^^^▲ 일생을 바쳐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하신 故 박정희 대통령
ⓒ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
 
 

1960~1970년대의 자동차공업 발전사 요약

5.16후 10여년간 묘한 압력에 눌리고, 수공업적 버스 조립공장의 수적 데모에 밀리고, 장삿속만 챙기는 업자 욕심에 눌려, 제대로 발을 붙이지 못했던 우리나라 자동차공업이 이제야 비로소 공고한 기반을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잃어버린 10여년을 되찾기 위해 뜀박질해서 급신장하게 된다. 필자는 지금 우리나라 자동차공업의 초창기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짓고, 정리할 시점에 와 있다. 그래서 다음 도표를 작성해 보았다.

다음 글은 이 도표의 설명이다. 우리나라 자동차공업의 발전사이고, 자동차회사의 변천사이다.

5.16 이전을 수공업적 자동차생산시대로 본다. 자동차공업정책도 없을 때이다. 승용차로는 시발車가 나왔고, 버스조립을 하는 여러 군소업체가 있었다. 자동차공업 제1기이다.

5.16후 1969년 12월 29일까지를 우리나라 자동차공업 제2기로 본다. 주된 정책은 자동차공업 일원화방안이었다. 작업량을 모아주려고 했으나, 자동차 조립회사는 국산품 사용을 한사코 기피했다. 자동차공업의 공백기이다. 1962년에 새나라자동차가 생겨나, SKD로 부품을 도입, 단순조립만 해서 판매했다. 똑같은 시기에 기아에서는 삼륜차를 CKD로 수입해서 조립했다. 시발자동차나 하동환자동차 등 정부지정 군소조립업체에서는 수공업적 방법으로 버스조립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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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기는 1969년 12월 29일 "자동차공업육성 기본계획"이 발표된 후부터 시작된다. 자동차공업을 국산화하려는 정책을 펴나갈 때이다. 신진자동차의 코로나車 독점시대는 지나고, 현대의 "코티나", 아세아의 "피아트"의 3파전이 시작된다. 기아도 4륜화물차 생산이 허가되어 자동차 제조업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이들 자동차 회사에서 버스나 트럭이 생산되기 시작하자, 하동환자동차 등 군소조립업자에게 생산중지 조치가 취해졌다. 1972년 1월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자동차 업계는 4원화시대를 맞게 된다.

정부에서는 자동차 완전국산화 정책을 강력히 밀고 나갔다. 그 골자는 전문 엔진공장과 프레스공장의 건설이었다. 국내 수요가 적으니 이 두 공장은 한 공장씩만 건설키로 했다. 이 결정에 따라 신진쪽에서는 일본의 도요타자동차와 합작해서 공장을 건설하려고 했으나 도요타의 철수로, 미국의 GM과 합작하게 된다. 현대측도 미국의 포드와 합작, 공장을 설립키로 계약까지 마쳤으나, 일은 제대로 추진되지 못했다. 아세아자동차는 설립 당시부터 경영상태가 부진하더니, 부실기업 정리대상이 되었다. 물론 자동차는 한 대도 생산 못했다. 1969년 12월 동국제강에서 인수해서 1970년에 비로소 Fiat 124를 생산했으나, 정부의 국산화 정책에 따라가지 못했다.

일반 자동차 부품공업만은 정부의 강력한 지원책으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외국회사와 자본이나 기술제휴를 해서, 부품 한 가지에 대해 한 개 공장만 건설하라!"는 부품공장의 일원화 정책이 취해졌다. 최신공장을 건설해서 국제경쟁력이 있는 부품공업을 육성해서 수출까지 하자는 案이었다.

자동차공업 제4기는 1973년 9월 6일 대통령의 자동차공업 육성에 대한 특별 지시각서 하달로부터 시작된다. 그 내용은 다음 페이지와 같다.

그리고 이 지시에 의해 "장기자동차공업 진흥계획"이 확정되어, 우리나라 자동차공업 진흥의 기본골격이 되었다. 이 계획은 73년부터 시작한 중화학공업 육성책 안에 포함되어, 국가사업으로 강력히 추진되어 나갔다. 이때부터가 우리나라 자동차공업이 획기적으로 발전하는 결정적 시기가 된다.

박 대통령이 총지휘를 하였다. 박 대통령을 정점으로 해서 김정렴 비서실장, 담당 수석비서관(필자) 그리고 상공부의 이낙선 장관, 김재관 차관보, 한재열 국장, 윤승식 과장 등, 자동차 국산화에 정렬을 쏟은 사람들이 자동차공업을 직접 담당하는 자리를 차지했다. 방해를 받지 않고, 일로 매진할 수 있었던 절호의 시기였다.

드디어 1974년에 국산엔진이 생산되고, 국산엔진을 탑재한 차 "브리사"가 나오게 되며, 1975년에는 한국 최초의 고유모델차 "포니"가 선을 보이게 되었다. 그리고 자동차공장도 종합자동차 공장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우리나라 자동차공업의 기본정책은 자동차의 완전 국산화에 있었고, 이를 위해서는 부품의 완전 국산화가 필수조건이었는데, 드디어 부품공업도 완성을 보았다.

그러나 이런 대변혁에 적응 못하는 자동차회사도 생겨났다. 아세아자동차는 탈락을 해서 1976년 8월에 기아산업이 인수하게 된다. GM코리아 회사도 부실화되어, 대주주인 신진자동차가 손을 떼게 되고, 은행관리로 들어가게 된다. 상호도 새한자동차로 변경했다가, 1978년 7월에 대우에서 인수하게 된다. 신진자동차는 GM코리아의 경영이 부실화되자, GM코리아와 별도로 지프車 생산을 시작했다.

하동환자동차는 "군소 버스조립업자 폐쇄조치"로 인해서 자동차 생산의 길이 막혀 버렸으나, 1977년 2월에 상호를 동아자동차로 변경하고, 특수車 조립에 들어갔다. 이로 인해서 우리나라 자동차 업계는 기아와 현대와 대우의 삼원화 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수출산업으로 힘차게 발전해 나갔다.

自動車工業 育成에 대한 大統領閣下 指示

大 統 領 秘 書 室

대비경(이) 310.5-19

1973. 9. 6.

수 신 : 수신처 참조

제 목 : 자동차공업육성에 대한 지시

자동차공업은 기계, 철강 및 화학공업 등 관련산업에의 파급효과가 큰 종합공업으로서, 우리가 목적하는 중화학공업화의 선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공업입니다.

따라서 자동차공업의 육성으로 앞으로의 중화학공업화에 따른 수송수단의 원활한 공급은 물론, 광범위한 관련산업의 육성을 유발하여, 80년대의 고도성장의 주역을 담당토록 해야할 것입니다.

자동차공업은 광범위한 시설투자와 전문적 생산기술을 필요로 하므로, 제한된 자원에 대한 시설의 중복을 피하며 관련산업의 유기적 참여로 전근대적 생산형태를 탈피하여 개개공장의 근대화를 기하며, 경제적 양산체제를 확립하여 국제경쟁력 있는 자동차공업으로의 육성을 기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 자동차공업은 과거 10년간, 국산화 및 생산기술면에서 많은 진전을 가져왔으나, 아직도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에 자동차공업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자동차공업 육성을 위한 다음 사항을 지시하니, 이의 시행에 만전을 기하기 바랍니다.

1. 자동차공업은 1975년말까지 완전 국산화한다는 목표하에, 이를 위한 구체적 육성계획을 작성하여 추진할 것.

2. 차종 및 차형은 경제개발목적에 부합되도록 조정 단순화할 것. 자동차의 매년 증가되는 유류소비의 절약을 기하고, 비생산적 차종수요를 억제하며, 제도상의 육성체제를 정비하고, 빈번한 모델변경이 없는 경제적 차량을 양산토록 할 것.

3. 자동차공업은 부품생산과 조립생산부분으로 분리해서 육성하되, 조립공장은 더 이상 외자합작이나 신설함이 없이 기존공장을 중심으로 육성하고, 생산체제의 합리적 재편성방안을 강구할 것.

4. 부품공장은 조립공장별로 난립건설하지 말 것이며, 공급규격의 부품을 전문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국제규격의 공장을 합병, 공동투자 또는 외국과의 합작으로 건설하여, 수출할 수 있는 우수부품을 생산토록 할 것. 공장입지는 가급적 昌原기계공업기지 내에 건설토록 할 것.

대통령 지시에 의하여

大 統 領 秘 書 室 長

수 신 처 : 국무총리, 경제기획원장관, 재무부장관, 상공부장관

사본배부처 : 경제제1수석비서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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