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중진공업국을 향하여(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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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기계공업의 태동(자동차) - 20

 
   
  ^^^▲ 일생을 바쳐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하신 故 박정희 대통령
ⓒ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
 
 

자동차 디자인의 중요성

자동차에 있어 수송수단이라는 실용적인 면이 가장 중요하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승용차라는 것은 묘한 물건이라서 모양새가 멋이 있어야 유명해지고 잘 팔린다. 마치 의복과 같다. 의복은 몸을 감싸주거나 보온에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디자인이 좋아야 잘 팔리고 옷을 입는 사람에게 만족감도 준다. 자동차도 마찬가지다. 자동차의 디자인이라는 것은 이래서 아주 중요한 과제가 된다. 디자인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현대는 1973년 9월에 이탈리아의 이탈 디자인社와 당시로서는 큰 금액인 약 100만 달러에 계약을 했다.

자동차의 디자인은 1974년 2월에 완료되었고 2월말부터는 설계업무에 본격 착수했다. 3월 15일부터 토리노에 소재하는 콘베르소(Converso)社에서 "마스터 모델" 제작에 들어갔으며, 4월 5일부터는 프로토타입(prototype) 1호 제작을 시작했다.

이 1호는"쿠페" 프로토타입 1대와 함께, 그 해 10월말 개최된 토리노 모터쇼에 출품됐다. 1974년 10월 30일 개막된 제 55회 토리노 국제자동차 박람회에 우리나라 고유모델로 개발한 "포니"승용차와 스포츠카형 "포니쿠페" 등 2종의 시제품을 출품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16번째, 아시아에서는 일본 다음으로 고유모델을 갖는 나라가 됐다.

이 박람회에서 우리나라가 출품한 "포니""포니쿠페"는 각국 전문가들로부터 차체, 모양, 성능, 경제성 등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음으로써 고유모델 승용차 생산계획은 1차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토리노 박람회에서의 성공적 데뷔를 계기로 "포니"모델은 전세계 자동차공업계에서 단번에 유명해졌다.

고유모델 "포니"의 토리노 박람회 출품은, ① 한국이 세계 자동차공업계에 처음으로 고유모델 차를 선보임으로써, 국력을 과시하는 데 효과가 컸으며, ② "포니"가 세계시장에 적합한 차종으로서 관심을 끌게 됨으로써, 해외수출 가능성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해주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를 갖는다.

10월 29일부터 11월 30일까지 31일간 박람회가 열리는 동안, 현대는 영국, 네덜란드, 그리스, 프랑스, 잠비아 등 14개국의 외국 수입상들로부터 포니의 수출대행에 관한 상담을 접했다. 현대의 社史에 또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현대자동차사』, p.383 참조).

"고유모델 포니가 박람회를 통해 일차적인 성공을 거둠으로써, 현대에 기여한 점은 무엇보다도 관계자들에게 커다란 격려가 됐다는 사실이다. 이 성공은 회사 전체적으로도 큰 활력이 돼, 그때까지도 고유모델 프로젝트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사람들까지 이 계획에 동참하는 계기가 됐다. 이로부터 회사의 전사원은 종합자동차공장 건설에 합심협력해 일로 매진할 수 있게 됐다."

이때쯤 이 장 서두에서 말한 영국의 유명한 자동차기술자 턴불(Turnbull)씨가 기술 총책임자로 현대에 오게 된 것이다. 영국의 자동차기술을 턴불씨를 통해서 송두리째 이전시키겠다는 뜻이었다. 그 후에도 "유능한 기술자를 높은 보수를 주고 고용하는 경영방식"은 현대의 특기가 되었고 전통이 되었다. 그리고 현대의 기술발전에 큰 몫을 했다.

이런 계획을 빈틈없이 착수한 현대는 마침내 1975년 11월에 종합자동차공장을 완공하였으며, 이 공장에서 한국 최초의 고유모델인 "포니 1호"차를 생산하였다. 현대 社史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창립 8년 만에 고유모델 자동차와 종합자동차공장을 갖게 되었으며,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의 신기원을 이루게 되었다. 포니는 출고 개시년도인 1976년에 국내 승용차시장의 43%를 점하여, 국내시장을 석권, 승용차 대중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1976년 6월에는 중미 에콰도르에 최초로 포니 6대를 수출함으로써 세계시장을 향한 포니의 진출이 개시되었다."

우리나라의 고유모델 자동차 제작의 첫 번째 영예는 현대자동차가 차지했다. 현대자동차는 우리나라의 자동차공업을 국제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절대적 공헌을 한 것이다.

 
   
  ^^^^^^▲ 일생을 바쳐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하신 故 박정희 대통령
ⓒ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
 
 

폴크스바겐사의 합작제의 거절

국민들도 축제 분위기에 싸여있을 때 정세영 사장이 상의할 것이 있다며 찾아왔다.

그 내용을 들어보니 서독 "폴크스바겐"회사에서 합작이야기가 나왔다는 것이었다. "폴크스바겐"사는 당시 "딱정벌레" (비틀) 차의 수요가 줄기 시작해서 다른 모델로 바꾸었으나 아직 "딱정벌레"차의 수요도 꽤 있어 극동지구, 동남아지구에만 해도 약 8만대를 수출하고 있었으므로 "딱정벌레"차의 생산도 중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폴크스바겐"사는 현대와 합작해서 이 차를 한국에서 만들어 극동지구, 동남아지구에 팔자는 제안을 해왔다는 것이었다.

이 설명을 들으면서 필자는 기분이 몹시 언짢았다 그래서 정사장에게 말했다."정사장, 현대자동차는 대한민국의 자동차회사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자동차회사요. 그간 얼마나 고생하며 오늘날까지 왔소. 이제 와서 외국회사와 합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정 하고 싶다면 폴크스바겐만 만드는 새 회사를 따로 설립하시오." 그러자 정 사장은 "꼭 현대자동차와 합작해야 된대요"라고 말했다. 필자는 한마디만 했다. "다른 사람 의견은 모르오. 나는 NO요" 정 사장은 돌아갔다.

조금 후 전화가 왔다. 합작을 안 하기로 결정했다는 내용이었다. 자칫하면 망아지(Pony)가 "딱정벌레"에게 당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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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중후반 승용차 시장의 판도

<도표 9-22>는 1973년부터 1979년까지의 각 사의 승용차 생산대수이다.

기아는 1974년부터 "브리사"가 나오기 시작한 후, 생산대수가 급격히 증가하여 75년에는 국내 수요의 55.5%까지 차지하였다. 현대는 "포니"가 생산되기 시작하면서 국내 승용차업계에 군림하기 시작한다. 1976년에 55.5%를 점하고 그 후 77년에는 62.4%, 78년에는 65.7%까지 점하게 된다. 이에 반하여 GM·코리아(株) + 새한은 1973년에 52.5%나 차지하던 비율이 급속히 저하하여 75년에는 13.9%, 76년에는 14.2%가 되었다. 이렇게 되어 판도는 완전히 역전되어 버렸다.

포니는 물론 성능과 스타일이 좋았지만 그보다 역사상 처음 나온 우리나라 고유모델 차란 점에 대해서 온 국민이 찬사를 보내고, 애정을 느꼈기 때문에 다투어 포니를 구입했다. 물론 필자도 즉시 한 대 구입하여 타고 다녔다. 자랑스럽고 무한정 흐뭇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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