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아지와 주먹밥, 그리고 머리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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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지와 주먹밥, 그리고 머리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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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주먹밥과 보배처럼 키운 송아지가 전쟁음식이었다

^^^▲ 주먹밥 만들어 먹기 행사 모습
ⓒ 중앙일보 화면^^^
지난 22일에 전쟁기념관에서는 6.25를 맞이해 호국영령을 위로하고, 서해교전 순직장병의 위패를 모시는 등의 행사를 하였다. 그리고 참가자들은 점심으로 주먹밥을 먹었다고 한다.

6.25전쟁 하면 떠오르는 것이 세 가지다. 주먹밥, 머리띠, 송아지다. 주먹밥은 아버지를 보국대원으로 만들었고, 머리띠는 삼촌의 이마에 질끈 매어져 전쟁터로 나가게 했으며, 가보 같은 존재였던 송아지가 군인들의 식량이 되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다.

보리밥에 약간의 반찬을 넣어서 뭉친 것이 주먹밥이지만 그것이 없었으면 전쟁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첨단 무기로 전쟁을 한다고 해도 먹지 않고는 싸울 수 가 없다. 지금처럼 인스턴트 식품이 없었던 시절에 주먹밥은 유일한 전쟁이동식품이었다.

아버지는 주먹밥을 나르기 위해서 전쟁터로 갔다. 보국대원이라는 이름으로 참여해서, 주먹밥을 지게에 지고 산등성이마다 싸우고 있는 군인들을 찾아다녔다. 소위 병참요원 성격의 물자보급 병을 한 것이다. 허리가 휘도록 져 날라 국가에 적지 않은 일을 했지만 그 일로 늘 몸이 아프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

삼촌은 군에 입대하면서 이마에 하얀 머리띠를 둘렀다. 지금처럼 화려한 빨간색이 아니다. 만들 시간도 없어서 그냥 광목을 쭉 찢어서 만든 것이다. 질끈 동여맸지만 그 모습에는 애국심과 살아 돌아오겠다는 의지, 그리고 공포와 걱정이 함께 하고 있었다.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동네사람들은 꽹과리를 치면서 뒤를 따랐다. 삼촌의 울부짖는 소리와 북과 나팔소리가 어우러져 마을 뒷산으로 퍼졌다. 아낙네들은 눈물을 흘리며, 무엇이든지 들고나와 손에 쥐어주며 살아 돌아오라고 했다.

어머니는 그럴 줄 알았으면 빨리 장가를 보냈어야 했다는 말을, 몇 번씩이나 했지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소리였다. 약삭빠른 사람들은 징집 전날 장가를 보내고, 첫날밤을 치른 다음 날에 입대를 하게 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그것이 한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전쟁터로 간 삼촌은 머리에 총알파편을 맞고 군인병원에 입원했다. 아버지는 그 소식을 전해 듣고 살았다는 것에 안도를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일하던 옷조차 갈아입지 않고 허겁지겁 병원으로 달려갔다.

머리에 흰 붕대로 감고 있는 삼촌의 얼굴을 보면서, 우리 가족들은 안도의 숨을 쉬며 살아있다는 것이 고마웠다. 그 당시에 삼촌이 총알파편을 맞은 것은 불행중 대단한 행운이었다. 삼촌과 함께 군에 갔던 동네사람들은 다 죽었다.

포로가 되어 이북으로 간 사람을 빼고는 삼촌이 유일한 생존자였다. 아버지는 착하게 산 것이 삼촌을 도왔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면서 살았다. 그래서 아버지는 늘 공자의 말씀을 흉내내며 착하게 사는 것이 최선임을 자식들에게 강조했다.

동네 형들도 어린 나이의 학생들이었지만 학도병으로 전쟁에 참여했다. 총조차 쏠 줄 모르면서 전쟁터로 나가서 결국 죽었다. 집에 남아 있는 식구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 아버지와 삼촌, 아들을 기다렸지만 지금도 생사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전쟁통에 송아지가 미군 병사들의 전쟁음식이 된 것도 가슴아픈 이야기 중에 하나다. 송아지가 유일한 우리 가족의 재산이었다. 읍내에서 소문이 들어왔다. 미군들이 짐승들을 닥치는 데로 잡아먹는다고 조심하라는 말이 퍼졌다.

물자보급이 제대로 안되어서인지 먹을 것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어느 날 정자나무 밑에서 미군이 나뭇가지로 꼬꼬댁 소리를 내며 닭 모양을 그리며, 먹을 것이 없으니 잡아오라고 했다. 동네 사람들은 영어를 몰랐지만 재빠르게 가축을 뒷산으로 피신 시켰다.

하지만 우리 집 아버지는 순박하게 생각해서, 송아지를 피신시키지 않았다. 설마 작은 송아지까지 잡아먹으랴 하는 생각으로 그냥 외양간에 매어 놓았다. 집에 들어 닥친 미군들이 그것을 보자, 그 자리에서 머리에 총을 쐈다. 피가 떨어지는 송아지를 차에 싣고 가버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어서 우리 가족들은 멍하니 서있었다. 정신을 차린 어머니가 울음을 터트렸다. 가보처럼 애지중지 키워서 삼촌이 돌아오면 장가 밑천을 하겠다는 것이 우리 어머니와 가족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희망이 수포로 돌아갔다.

아버지는 삼촌이 살아서 돌아오자, 송아지가 삼촌을 대신해 죽었으며, 그 액땜으로 살았다는 엉뚱한 말을 하며,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소를 잃은 것에 대해 위안을 삼았다. 그래서 6.25하면 주먹밥과 머리띠, 그리고 송아지가 생각난다.

그러나 세월은 그러한 상흔을 지우고 요즘에 와서 '주먹'하면 주먹밥보다는 힘을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힘을 기진 패거리를 주먹 패라고 하고, 다른 말로 깡패라고 한다. 주먹의 앞에 접두사로 이름, 파, 지명, 정치, 경제 같은 말을 앞에 부치면 아주 무서운 말로 변한다.

연속극에서처럼 00파 두목이나 무슨 정치깡패 같은 말이 되어서 아주 무서운 집단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반대로 '밥'이라는 단어를 접미어를 쓰면 그 의미와 뜻이 아주 다르다. 특히 5080세대들에게 주먹밥은 미수가루와 함께 늘 전쟁이동음식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지금은 그것을 먹어보면서 6.25를 기억하자는 정도로 그 의미가 축소되었지만, 주먹밥이 없었으면 우리는 전쟁을 할 수가 없었다. 국가가 존재 할 수도 없었다고 할 만큼, 그 존재 의미가 컸던 우리의 식품이다.

하지만 지금의 세대들은 그러한 것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주먹밥은 맛이 없고, 먹기가 불편하며, 전쟁 당시에 그런 것이 있었다는 정도로 생각한다. 또한 요즘 젊은 세대들이 구태여 그것을 먹어야 할 이유도 없게 되었다.

하지만 사람이 사는 동안에 늘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비상사태나 준 전시사태 같은 일이 발생되면, 이동음식이 필요하게 된다. 전쟁으로 생산시설이 멈춘다면 더욱 그러하다. 그렇게 보면 이번 전쟁기념관에서 실시한 주먹밥 먹어보기 행사에 대한 의미가 크다고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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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놈아 2006-01-20 18:52:45
이세끼는 매일 남의 사이트에 도배 질이야 경찰 사이버수사대에 신고 해야겠다.
메인페이지가 로드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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