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섬이야기, 섬이 맞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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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섬이야기, 섬이 맞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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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향, 뚝섬

해외에서 살다가 한국에 온 신입사원이 인사를 하러 왔다.

"어디 사시나요?"
"네, 뚝섬에 살아요."
"뚝섬? 섬인가요?"
"하하하 !! 네 맞아요. 섬이에요."
"저희 집은 배 타고 20분 정도 들어가야 해요."

 

 
   
  ▲뚝섬의 역사
ⓒ 성동구청
 
 

그냥 농담 삼아 말했는데,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어떻게 다니냐고 묻는다. 서울에 섬이 하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면서... 그런데 문득 내가 태어나 살고 있는 내 고향 뚝섬에 대해 잘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이후 나는 뚝섬에 대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어떤 역사를 지니고 있는지를 알아본다는 것은 앞으로 우리 지역을 알리는데 좋은 기회가 될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과거 뚝섬은 정말 섬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자료는 법정스님이 쓰신 무소유란 책에 자세히 나와 있다.

행정구역상 서울특별시 성동구 무슨무슨 동임에는 틀림없는데, 거기는 전기도 전화도 수도시설도 없는 태고의 성역이다. 교통 수단이라고는 오로지 나룻배가 있을 뿐.
그런데 그 나룻배라는 게 참 재미있다. 그 배는 지극히 서민적이어서 편식을 하지 않고 닥치는대로 마구 먹는다. 승용차 뿐 아니라 소가 끄는 수레며 분뇨를 실은 트럭이며 그 바퀴 아래 신사와 숙녀들도 함께 태워 준다. 그리고 그 나룻배는 도무지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다. 아침 여섯 시에서 밤 열한 시까진가 하는 사이에 적재량이 차야 움직인다. 아무리 바빠서 발을 동동 구른댔자 시간 부재不在의 배는 떠나지 않는다. - 너무 일찍 나왔군/무소유

현재 뚝섬은 흔히 서울 성동구 성수동과 뚝섬유원지 일대를 가리킨다. 조선시대 뚝섬은 지역이 넓고 평탄하여 목장, 왕의 사냥터 등으로 유명했다. 뚝섬은 초원과 한강이 아우러져 경치가 좋고, 말이 뛰노는 아름다운 곳이었던 것이다.

왜 뚝섬이라고 불려졌을까?

조선 태조때 큰 독기(깃발)가 강류를 따라 지금의 뚝섬 부근으로 떠내려오자 나라에서 그 후 이곳에 독재소를 설치하고 봄·가을로 제사를 드렸다 하며, 원래 깃발의 이름이 뚝이었기 때문에 '뚝도', 또는 '뚝섬'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호조에서는 이 곳에 수세소(收稅所)를 설치하여 상류로부터 용산 마포항으로 내려가는 목재 등을 실은 공사 선박의 세금을 받았기 때문에 운수선(運輸船)의 기항지가 되어 숙박업이 성황을 이루기도 하였다고 한다.

성수(聖水), 왕이 마신 물

서울 성동구 성수동은 옛날 경기도 양주군 고양주면의 둑섬이었는데, 갑오경장 뒤에 한성부 두모방(豆毛坊:두물내)의 전관계(箭串契:살곶이벌)가 되었다가 1914년 3월 1일, 일제가 부군(府郡) 폐합에 따라 고양군 둑도면에 편입됐다.

1946년 10월 1일 동명변경에 따라 성덕정(聖德亭)과 둑섬에 처음으로 상수도 수원지가 건설되면서 성덕정과 수원지의 머리 글자를 따 오늘의 땅이름인 '성수동(聖水洞)'이 됐다.

둑섬 정수장 정문 왼쪽 귀퉁이에 자그마한 성당과 흡사한 근대식 건물이 하나 있다. 바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72호로 지정돼 있는 우리나라 첫 수돗물 공급처였던 '경성수도 양수공장'이다.

1908년 9월 1일, 이 공장의 송수펌프가 힘차게 돌아가면서 구내에서 처음으로 수돗물이 나왔다. 임금님의 밥을 짓던 수라간에도 수도꼭지가 달리게 되었다. 임금과 함께 4대문안과 문밖 용산 일대 주민 등 16만 5000여 명이 처음으로 혜택을 보게 됐다. -<한국땅이름학회 자료참고>

1949년 서울로 편입되기 이전에는 한강의 하항(河港)과 근교농업지로 유명했다. 뚝섬은 당시 서울의 근교농업지역으로 서울에 소채와 화초류의 공급지였다고 한다. 서울 시내의 인분은 뚝섬으로라는 말이 나돌았다고 한다.

뚝섬이 서울 근교농업의 적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서울에 인근한 한강유역의 범람원(汎濫原)이다. 뚝섬은 이 범람원의 자연제방(自然堤防)이며, 장안평은 그 배후습지(背後濕地)이다.-<중학교 과학책 자연제방:뚝섬>

그러므로 뚝섬유원지는 범람원의 자연제방인 뚝섬의 아름다운 강변자락이었다. 아쉽게도 나는 뚝섬의 아름다움을 많이 기억하지 못한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은 아주 큰 나무들과 친구들과 물놀이를 하던 추억이다.

1980년대 급변한 사회와 더불어 뚝섬도 변해갔다. 자연제방이 인공제방으로 바뀌었고, 친구들이 수영을 하던 한강은 오염되었고, 시멘트로 깔린 고수부지는 내가 좋아하던 큰 나무를 죽였다.

내가 생생히 기억하는 것 중 하나가 엄마와 함께 유원지에 놀러갔던 것이다. 그곳에 어마어마하게 큰 나무에 그네를 매달아 놓았는데, 너무나 길어 보이는 그네를 탈 엄두가 나지 않아 멍하니 그 큰 나무를 바라다 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말썽꾸러기였던 나는 친구들과 전투놀이를 한다고 동네 아이들을 이끌고 지금의 청담동쪽으로 걸어갔는데 다리 옆에 아주 예쁜 들꽃들이 많았다. 채소밭을 지나 과수원에서 과일을 훔쳐 먹고, 콩을 불에 구워먹었던 기억이 난다.

얼굴은 껌둥이가 되고, 뭐가 그리 맛있었는지 친구들과 다음 전투를 모의하곤 했다. 겨울엔 지금의 건대 야구장 뒷편 산에 올라 쌀포장지를 타고 놀았다. 그때 당시 우리는 그 산을 배꼽산이라 불렀는데, 멀리서 보면 꼭 아빠의 배꼽 같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의 어린 시절 추억의 전부이다. 이후 건대 뒤쪽엔 큰 도로가 생겨 그 배꼽산은 사라졌고, 청담동은 뚝섬보다 먼저 빌딩 숲으로 변했다. 그래도 난 정말 행운아였단 생각을 한다. 뚝섬이 다른 지역보다 개발이 더딘 덕분에 나에게 이런 추억이 존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경마장이 있던 자리는 체육공원으로 주민의 안식처가 되고 있다. 대부분의 공장들은 이주하고 있고,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서고 있다. 세월의 흐름과 동시에 뚝섬도 변해가겠지만, 뚝섬개발계획에 시민의 녹지공간 마련을 위해 주민들은 노력하고 있다. 예전 만큼의 아름다운 뚝섬을 기대할순 없지만 개발과 자연보전이 조화된 개발을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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