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뼘소설] 첫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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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뼘소설] 첫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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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권 작

남편의 귀가시간은 언제나 정확했다. 집까지 오는데 30여 분의 노정이니까 남편은 일과 끝을 알리는 퇴근 차임벨이 울리기가 바쁘게 사무실을 뒤로 하고 있을 터였다.

"회사 직원들이 당신 뒷머리에다 눈 박고 킥킥거리겠어요."
"동물원 원숭이가 되어도 나는 좋아……."
"대부분의 잘 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30분 일찍 출근하고, 30분 늦게 퇴근하는 사람들이잖아요."
"무슨 얼어죽을 놈의 출세. 당신과 나 그리고 이번에 새로 태어날 아이면 됐지. 무슨……"

"……"
"또한 우리 사랑의 공동사업으로, 한 생명이 고고 소리를 내기 위해 발성연습을 하고 있는 판국에……아니, 이 세상의 빛을 보려는 엄숙한 순간인데, 회사가 어디에 있고 뜻을 같이하는 한마음 동료애가 무슨 소용이야……하하하 허튼 소리이지만."

남편은 걱실대며 큰 칼 옆에 찬 이순신 장군처럼 당당했다.
"딸이면 어떡하죠?"

팔순을 앞둔 시어머니의 손자 타령에 L부인의 얼굴에서는 잿빛구름이 떠날 날이 없었다. 뒤늦게 얻은 외동아들에게 모든 걸 바치다시피 하며 살아온 시어머니였다.

"왜 쿵쿵거려? 분명히 아들일 꺼야. 난 요즘 밤마다 빨간 고추 꿈을 꾸려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주렁주렁 매달린 고추밭만을 생각한다고."

밤길에 호랑이를 만나 죽을 힘을 다해 쏜 화살이 이튿날 찾아가 보니 바위에 꽂혀 있는 것을 보고 감격해 했다는 고사처럼 남편은 흔들림 없는 신념에 차 있었다. 더구나 남편은 양거지하면서까지 의기양양했었다고 덧붙였다.

"세상에 그런 철딱서니 없는 장난이 어디 있어요!"
"그 날 월급의 4분의 1이 강남으로 날아간 제비가 되었지만 미리 아들 턱으로 한 잔 산 거지 뭐."
"그래두요. 만약 딸이라면……."
그렇게 헤식어 가지곤 살림 거덜나기 알맞다는 듯이 L부인은 남편의 속마음을 떠보았다.
"……아들이라니까!"

남편은 두 팔을 벌려 사랑스런 아내를 감싸안으며 토닥거리더니 역정까지 내는 것이었다.

L부인은 출산을 위해 입원해 있으면서도 콩닥콩닥 마음이 불안하고 여간 초조하지 않았다. 해산 구완을 위해 뒤늦게 멀리에서 부리나케 달려온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도 납덩이였다.

남편은 뭐가 그리 좋고 살판나는 일이 생겼는지 벙글벙글이었다. 하기야 혼례 치른 지 10여 년 만에 늦게나마 아기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산다는 건 성취 욕망이 뒤따르는 것이거든. 그 푸릇푸릇 잘 자라는 욕망의 나무에서 사랑의 꽃이 피어나는 건 당연한 진리지."

잉태 사실을 알고 남편은 아내의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근엄한 철학자인양 말했었다.

그러고보면 남편은 모닥불처럼 타오르는 정열적인 데가 있었다. 그 정열은 L부인에게 싸리나무 울타리와도 같은 큰 힘을 주었고 또 믿음이 가는 우람한 느티나무가 되어주기도 했다.

마침내 L부인은 산통을 느끼기 시작한 지, 두 시간 여 만에 거룩한 일을 해냈다. 난산이었지만 산고야말로 여자로서의 거룩한 고통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그런데 흰소리는 싱겁게 끝난다더니, 정말 남편의 장언(壯言)은 과녁을 빗나간 화살이 되고 말았다.

'당신 고생 많았소!'
금방이라도 문을 밀치고 달려와 손을 힘껏 잡아줄 줄 알았는데 남편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시큰둥해 있는 친정어머니의 말을 들으니 분한 생각까지 들었다. 간호사가 '공주님' 이라고 알려주자마자 어깨를 한 번 추썩 하고는 어디론지 도망치듯 뛰쳐 나가더라는 것이었다.

울컥, 부아가 머리끝까지 뻗지러졌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시어머니 기대에 못 미치면 어쩌나 하고 태산 같은 걱정을 할 때에도 남편은 한 번도 '딸이면 어때'하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L부인은 밉살스러운 남편을 저주했다.

악마, 늑대, 거짓말쟁이, 도둑놈, 능구렁이, 철면피 등 온갖 악담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참으로 억울하고 분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지만 얼마 후, L부인은 방정맞은 오해와 짧은 생각에 자신의 입 방정을 나무랐고, 머리를 몇 번이나 쥐어 박았다.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문을 열고 나타난 남편의 모습을 본 L부인은 벌린 입을 다물을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꾀죄죄한 모습의 남편이 말끔한 차림으로 싱글벙글 웃으면서 나타났던 것이다.

"여보, 당신 고생했소!"
"......"
" 오늘은 그 어느 날 보다 기쁜 날이오. 신이 인간에게 내리는 최고의 선물로 첫 딸을 주셨으니, 오늘처럼 기쁜 날이 어디 있겠소!"
"……"
"이 세상에 태어난 딸과의 첫 대면인데 아빠로서 그냥 만날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사우나도 하고 머리도 다듬고 옷도 차려 입고 ……."
"......!"

기쁨이 가득한 남편의 얼굴은 옥수수처럼 옹골차고 보기도 좋았다. 목욕재계하고 나타나다니!
L부인은 너무너무 감격스러워 양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부인은 그러한 남편의 따스한 손을 꼬옥 잡으며 갈쌍거리는 눈으로 남편을 그윽이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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