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중진공업국을 향하여(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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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중진공업국을 향하여(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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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기계공업의 태동(자동차) - 16

 
   
  ^^^▲ 일생을 받쳐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하신 故 박정희 대통령
ⓒ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
 
 

자동차 회사들의 합작사업 계획

이상과 같은 기자회견을 하고 상공부는 그 날짜로 각 자동차회사에 공문을 발송했다. 다시 말하면 각 자동차회사들이 뛰지 않으면 안되게 만든 것이다. 이렇게 되어 자동차 3社는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그런데 마감일인 3월 15일에 엔진주물공장의 건설계획서를 제출한 기업은 신진자동차-도요타자동차의 합작투자 1건뿐이었다.

신진과 도요타는 한국시장에서의 확고한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50억원을 투자해서, 국내에 연산 20만대 규모의 엔진공장을 건설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현대자동차와 포드 팀은 3개월 간의 연기신청을 해왔다. 2월 6일에 기자회견을 하고 3월 15일에 사업계획서를 어떻게 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자동차회사는 그때까지 자동차 엔진 국산화에 대해서는 꿈도 꾸지 않고 있었다는 결론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또 한가지 문제는 신진-도요타 측의 사업계획 내용이 상공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었다. 합작투자조건이 상공부는 50대 50이었으나 신진과 도요타는 20대 80으로 너무 차이가 났다. 생산 개시일도 상공부가 제시한 71년보다 늦은 72년 3월이어서 상공부로서는 승인할 수가 없었다.

상공부에서는 합작투자조건을 바꾸고, 생산개시일도 71년 말로 앞당기도록 지시했는데, 수정되어 온 것은 신진의 비율이 20%에서 30%로 높아진 30대 70으로 변경됐을 뿐이었다.

이에 따라 상공부도 실수요업체 선정을 결정하지 못한 채 뒤로 늦추고 있던 차에, 현대측이 포드와의 합작을 통한 사업계획을 상공부에 통고해 왔다. 이렇게 되어 엔진주물공장의 실수요업체 선정은 열풍지대에 휩싸이게 되었다. 다만 아세아자동차는 이 경쟁에서 포기하고 경쟁대열에서 빠져버렸다.

 
   
  ^^^^^^▲ 일생을 받쳐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하신 故 박정희 대통령
ⓒ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
 
 

<도표 9-18>이 당시 각 사가 내놓은 공장건설 계획일람표이다. 소요자금은 외자가 8,357만 달러, 내자가 87억원이다. 이 일람표에는 엔진주물공장이 2개 포함되어 있어 흥미롭다. 비고의 (1)에 신진에서는 도요타와 합작으로 1,323만 달러를 들여서 건설하겠다는 것이고 비고 (2)에 현대에서는 1,050만 달러를 들여 엔진주물공장 및 엔진가공공장을 짓겠다고 나왔다.

신진 - 도요타 합작사업 계획의 철회

그런데 이때 뜻하지 않은 사건이 생겼다. 사업계획서까지 제출했던 일본 도요타가 일을 질질 끌기 시작한 것이다.

9월 15일까지 외자도입 수속을 끝내라고 재촉하는데도 "시장전망이 좋지 않다. 시간여유를 달라"고 난색을 표명하더니 하루(1970. 12. 7)는 중대한 일을 통고하겠다며, 일본 도요타의 가토(加藤) 부사장 일행이 이낙선 장관을 찾아왔다. 필자도 함께 참석했다.

통고내용은 "도요타는 중국에 진출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었다. 이 말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는 말이다. 당시 중국에는 주사원칙(周四原則)이라는 것이 있었다. "주사원칙"은 1970년 4월 일본·중국 무역회담에서 당시 중국 주은래 수상이 천명한 4개의 원칙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한국과 대만을 돕는 자나 상사(商社)와는 교역치 않는다.

② 한국과 대만에 투자한 자나 상사와는 교역치 않는다.

③ 월남, 라오스, 캄보디아에서의 미국전쟁을 돕거나 무기를 팔고 있는 자와는 교역치 않는다.

④ 미국회사의 자회사(子會社)와는 교역치 않는다.

이것은 곧 한국 등 반공국가와는 교역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 등 반공국가와 교역을 하고 있는 회사도 교역상대로 취급치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다시 말하면 한국과 교역을 하고 있는 일본 회사는 상대를 하지 않겠다는 정책이다.

중국과 교역하고 싶으면 한국과는 손을 끊으라는 협박이니 내정간섭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런 것을 패권주의라고 하는데, 중국은 걸핏하면 미국에 대해 "패권주의"라고 공격하면서 자기들은 멋대로 힘없는 나라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과거 우리나라 조상들은 몇 천년 동안 중국으로부터 갖은 고초를 겪어왔다. 수시로 침공하여 인명을 살상하고 재물을 뺏고 볼모로 끌어가며 우리나라를 속국으로 삼았다. 조정에서는 조공을 바쳐야 했고 백성은 종살이를 해야 했다.

중국은 제3세계의 맹주로 자처하며, 세계의 노동자 농민은 단결하라고 떠들면서도 과거의 속성은 못 버리고 있었다. 주사원칙이 발표되자 우리나라 국민의 분노도 대단했다. 힘없는 약소국의 비애를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그런데 불난 집에 부채질하듯 도요타는 중공에 꼬리를 치며 한국과는 절교를 하겠다는 통고를 해왔던 것이다. 신진뿐만 아니라 한국의 어떤 회사, 어떤 기관과도 단교하겠다는 뜻이었다. 일개 회사가 국가를 상대로 단교선언을 한 것이다.

필자는 도요타의 가또(加藤) 부사장으로부터 심한 모멸감과 분노를 느꼈다. 그 날의 그 수모는 일생 잊지 못할 것이다. "도요타"라는 간판이 또다시 우리나라에 등장한다면 지금도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여러분도 이때를 상상하고 잊지 말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도요타는 결국 한국을 떠나 중국으로 갔다.이때 도요타가 한국에서 손을 뗐다는 보고를 들은 중공 관리가 "도요타는 비천한 회사이로군"했다는 뒷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도요타는 신의도 의리도 없다는 뜻이었다.

앞으로 도요타가 한국에 오고 싶을 때에는 정중한 공개적 사과가 있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은 필자만의 견해가 아닐 것이다. 신진은 홀아비 신세가 되었다. 다시 파트너를 찾아야 했다.

 
   
  ^^^^^^^^^▲ 일생을 받쳐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하신 故 박정희 대통령
ⓒ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
 
 

현대의 종합 자동차공장 모색

한편 현대쪽도 대동소이한 상태였다. 현대는 1968년 2월 "포드"와 제휴를 했다.

"코티나"車와 "포드 20M" 및 트럭, 버스 등 각종 차량을 SKD 상태로 수입해서 생산하기 시작했다. 신진쪽과 대항하기 위해서, 1970년 11월 30일 포드는 당시 국내 자동차업계의 사활이 걸린 엔진주물공장 일원화 방침을 계기로 현대와 합작투자를 합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판매자금 등 재정문제, 수출문제, 회사영업문제 등에서 상호간에 첨예한 견해차를 보임으로써 결국 사업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더욱이 경쟁회사인 신진쪽에서 도요타와 이별했으니 현대쪽도 서두를 필요가 없게 되었다.

장삿속만 생각하면 SKD로 수입해야 수지가 맞기 때문이기도 했다. 다만 이 일을 계기로 현대는 본격적인 종합 자동차공장 건설에 대한 연구를 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신진은 국내시장을 70%나 점하고 있는 주도세력이었는데, 현대가 그 자리를 뺏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루는 현대의 정세영(鄭世永: 현대그룹 회장 역임, 현 현대자동차 명예회장) 사장이 찾아왔다. 자동차공장을 본격적으로 지어 보려고 하는데 자문을 구한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첫째, 자력으로 커져 나갈 것, 절대 외국 자동차회사와는 합작하지 말 것을 권했다. 자동차회사의 특징은 대량생산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꼭 남아 돌아가는 자동차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 회사는 남아도는 차를 소화시키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하게 되는데, 그 회사와 합작을 하게 되면 이러한 남아도는 자동차의 뒤치다꺼리만 맡게 된다. 어떤 회사이건 마찬가지이다.

세계 어느 자동차회사에서 후진국의 자동차공업을 진정 육성해 주겠는가? 이들 회사를 믿고 자동차공업을 하겠다는 것은 마치 "호랑이 굴에 가서 어미 호랑이의 양해를 구해서 새끼 호랑이를 갖다 키우는 것과 같은 이치"인데 절대로 불가능하다.

일본의 자동차공장은 독자적으로 키워 나갔기 때문에 발전할 수 있었다. 일본도 전후(戰後) 합작회사 문제가 많이 나왔는데, 이런 점에서 반대를 했다.

지금 일본은 알다시피 세계 최강의 자동차 강국의 하나다. 1969년 10대 자동차 회사 중에 일본 회사가 두개나 끼어 있다. 모두 2차 세계대전 후에 급신장 했던 것이다.

둘째, 자동차공업은 일본의 예를 따르면 성공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1인당 GNP가 1,000달러만 되면, 자동차 수요가 급신장 할 것이다. 수출도 가능하다고 본다. 문제는 기술과 대량생산을 위한 설비투자이다.

셋째, 대량생산을 하려면 표준차(標準車)를 만들어서 모델 변경을 안 하는 것이 좋다. 독일의 폴크스바겐(Volkswagen)은 히틀러가 집권했을 때 국민차 개념을 도입해서 표준화한 것이다.

그 후 몇십년간 생산되고 있으며, 현재도 인기가 유지되고 있지 않은가? 우리나라도 폴크스바겐 같은 표준차를 설계해서 제작하는 것이 좋겠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정세영 사장이 고맙다고 하며 다시 찾아오겠다고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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