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대통령님께 드리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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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대통령님께 드리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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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와 소외됨에 관하여

"그러지 마요. 아저씨들이 저한테 자꾸 그러시면 우리 아저씨가 저더러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고 야단친단 말이에요."

삼십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에 긴 장화를 신고 고무장갑을 끼고 시멘트와 범벅이 된 땀이 얼굴에서 목으로 줄줄 흐르는데도 아랑곳없이 미안하고 죄송한 표정으로 배시시 웃다가 이내 불안한 얼굴로 좌우를 둘러보며 속삭이듯이 간청하는 여자가 있습니다. 아무런 조건도 이유도 없이 그저 선녀처럼만 보이는 그녀는 남의 것을 훔치거나 욕망하지 못하는 성품 탓으로 오십 년을 하루같이 가난하고 외롭게 떠돌아다닌 한 남자의 아내 자격으로 지금 이곳에 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곳은 현장입니다. 현장 중에서도 복지문제가 가장 열악하다고 하는 건설현장입니다. 황석영의 소설 <삼포가는 길>에 나오는 영달이를 기억하시는지요. 그런 젊은 떠돌이는 구제금용이야 받았을망정 <선진국>의 문턱에까지 진입한 나라답게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내준 까닭으로 지금은 그리 많지 않지만 영달이가 그대로 나이를 먹은 듯한 사람들은 건설현장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본의 지독한 속성인 것일까요, 아니면 어찌할 수 없는 아이러니인 것일까요. 투자 대비 수익률이 가장 높은 사업은 예나 지금이나 건설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건설사업에 육체를 바치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지독한 피로와 권태와 가난에 찌들어 그 어떤 진지한 것에도 관심을 두지 못하는 냉소적인 삶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보수귀족정당의 최대 기반이 빈민층이라는 말도 있듯이 일편단심 '공산당은 뿔달린 괴물'이라는 식의 맹목적인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지요. 이를테면 자기모순에 빠져버린 사람들이라고 볼 수도 있는 이런 끔찍한 이데올로기를 누가 무엇을 목적으로 주입시켰건 그들은 마치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운명인 것처럼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과거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일은 없어졌다는 정도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과거에는 하루 일당으로 쌀 한 봉지에 연탄 두 장 그리고 하루분의 담배와 막걸리를 사면 끝났버렸지만 지금은 사나흘 정도는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단순계산으로만 보자면 임금이 그만큼 올랐다는 반증일 수도 있겠지만 그게 또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습니다. 과거에는 쌀을 비롯해서 농산물 가격이 공산품에 비해 높았거나 최소한 대등한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가장 싼 것이 쌀값이고 보면 결국은 농민들의 희생이 있었던 셈이지요.

어쨌든 <삼포가는 길>의 영달이가 그대로 나이를 먹은 듯한 남자가 여기 있습니다. 일이 있는 곳이라면 거기가 어디가 되었건 바위틈으로 흐르는 물처럼 스며들어가서 그때그때 짧은 사랑으로 임금을 죄다 날리는 경험이나 줄기차게 반복했을 뿐 결혼도 일정한 거처도 없이 살아온 사람이지요. 딱히 무슨 희망이 없으니 절망도 또한 없이 그저 그렇게 겨우 존재해온 남자, 그런 그가 이제 나이 오십이 되어 전세방 하나를 얻더니 곧 이어 한 여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오십을 바라보는데도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의 아들을 둘이나 두고 있는 여자도 아마 그리 평화로운 삶을 건너온 것 같지는 않습니다. 과거의 남편이 무엇하는 누구였는지, 어디서 어떻게 살아 왔는지 일체 함구하는 여자의 과거를 굳이 물을 필요는 없겠지요. 그렇게 두 사람은 한집 살림을 살게 되었는데 뭐랄까요, 사무치는 듯한 간절함이 그녀에게는 있습니다.

이를테면 새로 살림을 살게 된 남자의 곁을 잠시도 떨어져 있지를 않으려 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건설일이란 예나 지금이나 일하는 사람이 주체적으로 현장을 선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한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도 없습니다. 언제든지 <오야지>가 다른 도시로 가자 하면 가야만 합니다. 그래서 그녀, 모처럼만에 찾은 '행복'을 잠시라도 놓고 싶지가 않은 그녀도 함께 현장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방을 얻어놓고 빨래하며 밥이나 지어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아예 같이 현장일을 하겠다는 결심을 하고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아마 평화로운 삶은 아니었다 해도 삽질이라든가 시멘트 같은 무거운 것들을 들어나르는 일은 거의 경험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어린아이처럼 서툴고 위태위태하고 능률은 없으면서도 땀은 곱절이나 흘려야만 합니다. 보기에도 안타깝기 짝이없는 이런 상황을 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오히려 이상한 것이겠지요.

"아줌마, 그건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하는 거예요."
"에유, 어쩌나, 세상에 원 저 땀 좀봐."
"그러게 여자는 남자를 잘 만나야한다니까. 어쩌다가 그런 날건달 같은 빈털털이를 만나가지고 저 고생이람."

그러면 그녀, 미안하고 죄송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하다가 정색을 하고 눈을 깜빡깜빡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마요. 제발 그러지들 마요. 우리 아저씨가 들으면 큰일난단 말이에요. 그리고 누구는 뭐 뱃속에서부터 배워가지고 나오나요. 저도 이제 곧 잘하게 될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제발 저를 좀 그냥, 보고도 못본 체 그냥 놔둬주세요, 예?"

옆에서 다른 사람들이 일을 못한다느니 고생한다느니 하는 말을 하면 할수록 남편은 자신의 아내가 일을 못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으로 해석한다고, 그래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 한다고, 그러니까 아무 말 말고 제발 그냥 내버려둬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더욱더 열성적으로 땀을 뻘뻘 흘려가며 순서도 방법도 모르는 일을 아무 것이나 닥치는 대로 해내겠다고 덤벼들곤 합니다.

사람들은 차츰 그녀를 가리켜 '악질'이라느니 '맛이 갔다'느니 심지어는 '무뇌아'라는 식으로까지 귓속말을 하며 손가락질을 하게 되었습니다. 드물게는 '희한한 여자'라고 말해주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조차도 부정적인 함의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마침내 '돌배'라는 별명으로 통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무슨 뜻으로 돌배라고 부르기 시작했는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좋은 의미를 내포한 호칭이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주위 사람들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일관되게 자신의 길을 갑니다. 자신의 의지를 굳이 드러내어 강력하게 주장하지 않아도 그것을 관철시키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그녀는 남편 대하기를 물가에 나간 어린아이 바라보듯 합니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자신의 남자 곁에 있고자 하는 진정한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지요.

"막걸리 한 병 줘."

속칭 <함바>라고 하는 현장식당에서 그녀의 남자가 소리를 지릅니다. 정말이지 그것은 말을 한다기보다 명령조로 시비를 건다는 표현이 딱 맞을 정도입니다. 식당에서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말입니다. 말하자면 특별한 감정도 이유도 없이 반말로 자신의 무엇인가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니까 일종의 위악인 것이지요.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세상에 대해 딱히 어떤 희망도 절망도 없이 그저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 특유의 문법이라고나 할까요, 남자는 자기가 여태까지 살아온 방식대로 하는 것이겠지만, 어쨌든 옆에서 지켜보던 남자의 여자가 즉각 나서서 한 마디 조용하게 건네는 것입니다.

"요, 요, 줘가 뭐야 줘가, 주세요, 하던가 아니면 줘요, 그래야지."

눈을 홀기는 것도 아니고 소리를 지르는 것도 아닙니다. 꾸짖는다거나 비난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녀는 마치 책을 읽듯이, 중얼거리듯이 조용한 목소리로 다만 그렇게 한 마디를 하고 입을 다물어버립니다. 입을 굳게 다문 채로 자신의 남자를 빤이 쳐다보기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녀의 남자 할 말을 못 찾고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어대며 좌우를 둘러보는 등 한참을 버버거리다가 끝내는 식당 아주머니에게 사과를 하는 겁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앞으로는 안 그럴게......하고 말꼬리를 감추며 얼굴을 붉히는, 그럴 수밖에 없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하는 어떤 진실이, 혹은 진리가 그녀의 온 몸에서 아침햇살처럼 뿜어져 나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햇살은 물론 아무에게나 보이는 것은 아니겠지요. 오직 그녀의 남자에게만 보이는 것이겠지요.

남자는 그렇게 조금씩 보이지 않게 성격이 개조되어 갔습니다. 밥을 먹을 때면 항상 식판에 가득 퍼다가 남겨서 버리는 습관도 사라졌고, 술이 취하면 아무에게나 막말을 해대며 죽일 테면 죽여봐라, 서푼어치도 안 되는 이까짓 목숨 아까울 거 하나도 없다는 식의 터무니없는 배짱도 더 이상은 부리지 않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그토록 즐겨하던 담배조차도 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새로운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남자의 여자를 <비정상>으로 보고 '돌배'라는 별명을 붙여 부르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녀의 남자마저도 비정상으로 간주하고 '똘배'라는 별명을 붙여놓고 자기들끼리 우스개의 대상으로 삼아버린 것입니다. 이를테면 '제까짓 것이 새삼스럽게 무슨', 하고 비아냥거리며 이지매를 놓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십 평생을 발뿌리에 채이는 돌맹이처럼 외롭게, 거칠게 살아온 남자는 이제 여자를 만나 고독을 면했다 싶은 순간 동료들로부터의 소외라는 새로운 고독을 당해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아아, 돌아보면 지금 우리 사회는 그 얼마나 인간의 순정한 마음과 진실한 행동에 대해 낯설어져 있는가요. 그 얼마나 오랜 기간 동안 진실과 양심의 소리가 승리하지 못하는 세상을 살아 왔는가요.

지금 우리 사회는 인간 본성의 선함을 믿고 선하게 살고자 하는 이들의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것은 자연현상이라기보다 인간에 의해 저질러진 범죄나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직위를 이용해서 막대한 치부를 하지 못하면 곧장 바보로 몰리는 사회, 잘못을 하고서도 큰소리를 쳐서 이기면 박수를 받는 사회, 도둑질을 해도 크게 하면 영웅으로 받들여지는 그런 사회를 건너온 사람들에게 순정이나 진실 그리고 양심 같은 단어들은 어쩌면 패가망신의 다른 표현으로 인식되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본성부터가 거칠고 막돼먹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의 국민들은, 아니 우리의 국민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은 기본적으로 착한 심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백 년도 채 못 사는 인간이, 백년도 채 못살고 죽는다는 것을 아는 인간이, 그것을 알면서도 살아야만 하는 인간이 착하지 않고서야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아갈 것입니까. 다만 한 개인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사회의 어떤 상황이 착함을 착함으로 인정하지 못하거나 그것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이겠지요.

바로 그것을, 착함을 착함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자꾸 딴죽을 걸어 냉소적인 극한으로 몰아가는 바로 그 <어떤> 상황을 주목하고 살펴서 뺄 것은 빼고 더할 것은 더해나가는 것이야말로 대통령님이 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이런 외람된 편지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사회, 그런 사회가 가장 바람직한 행복의 형태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말은 곧 국민들이 무엇을 요구하기 전에 대통령을 비롯한 정권 담당자들이 미리 살펴서 마치 어머니가 물가에 나가고 싶어하는 아이를 위해 안전장치를 마련하듯이 하는 그런 정치를 뜻하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요컨대 국민이 무엇을 요구하기 전에 정부가 국민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외람된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다수결을 그 원칙으로 체택하고 있는 민주주의는 진실에 대해 너무 무능하고 허술한 눈을 가졌다고 여겨집니다. 선전과 선동술이 첨단지능화되고 과학화된 현대에 있어서 민주주의는 구조적으로 조직화될 수 없거나 혹은 조직을 거부하는 개개인을 바보로 만들고 더 나아가서는 아예 파탄시켜 버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금 대통령님께서는 혹시 드러나보이는 힘의 목소리에 지나친 관심과 애정을 갖고 계시는 것이나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듭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잘못을 하고서도 조직적으로 큰소리만 치면 도덕성을 입증받는 그런 사회의 재탕이 아닐는지요. 지금 우리 사회는 조직을 기반으로 펼치는 힘의 논리가 거의 절대화되어 있습니다. 이러다가 어쩌면 <전국 도둑인 연합회>라든가 <사기꾼 연맹>같은 조직이 나오는 것 아니냐는 농담이 다만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는 까닭은 아마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그야말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식의 이런 극단적인 풍토는 우리의 역대 정권이 말없는 다수의 개인들에 대해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아 왔다는 반증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의 정권 역시 개혁을 첫째 화두로 내놓기는 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개혁이냐 하는 확고한 철학이 없거나 적어도 불명확한 채로 실제 정책에 있어서는 조직화된 거대집단의 드러나는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는 <정치상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도둑이 도둑맞은 자를 앞에 꿇려 앉혀놓고 왜 도둑을 맞았느냐고 엄하게 문책하고 충고하고 그 댓가로 훈장을 받는 지경으로까지 우리 사회의 타락이 일상화되어 버리기 전에 대통령님께서 먼저 보이지 않는 낮은 목소리도 발견할 줄 아는 혜안을 가져주십시오.

다음 기회에 <착취와 착취됨의 심리>에 관한 편지를 드리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줄이겠습니다. 부디 건강하시고 건강한 개혁을 이뤄내십시오.

2003년 6월 20일 김수복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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