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대규모 시위 : 브레이크 없는 ‘홍콩의 중국화’에 깊은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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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대규모 시위 : 브레이크 없는 ‘홍콩의 중국화’에 깊은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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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반환 이후 ‘중국의 홍콩화’냐 ‘홍콩의 중국화“냐 고민
- 시간이 갈수록 홍콩의 중국화 : 브레이크 없는 질주
- 50년 홍콩의 ‘고도의 자치’는 2047년까지 가지 못하며 계속 ‘변질 중’
- 반환 후 탄생 홍콩인들 , 홍콩의 중국화에 우려 갈수록 반중 시위 늘어날 듯
- 1989년 6월 4일 ; 톄안먼 사건 상기, 홍콩인들, 무자비한 탄압으로 민주주의 말살 기억
1989년 중국의 민주화 운동은 톈안먼 광장에서 100만 명 규모의 시위를 벌였으나, 결국 무자비한 중국 공산당에 무력 탄압되고 만지 2019년 현재 꼭 30년이 됐다. 2019년 6월 16일 200만 명이 시위에 참가한 일부 홍콩인들은 중국 공산당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민주화 운동을 말살시켜버린 역사적 사실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1989년 중국의 민주화 운동은 톈안먼 광장에서 100만 명 규모의 시위를 벌였으나, 결국 무자비한 중국 공산당에 무력 탄압되고 만지 2019년 현재 꼭 30년이 됐다. 2019년 6월 16일 200만 명이 시위에 참가한 일부 홍콩인들은 중국 공산당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민주화 운동을 말살시켜버린 역사적 사실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지난 16일 홍콩에서 범죄인 인도 법안이른바 중국으로의 송환법을 강력히 반발하면서 일어난 200만 명의 홍콩인들의 대규모 시위는 전체 인구의 약 25%가 시위에 참여한 것으로, 좀처럼 믿기지 않을 정도의 대단한 규모의 시위였다.

홍콩 시민이 100만 명 규모로 중국에 아니야(NO)'를 들이댄 것은 이번이 4번째이다.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이 같은 홍콩인들의 대규모 시위는 무슨 뜻일까?

홍콩에서 최초로 100만 명 규모의 시위가 일어난 것은 지난 1989521일 중국 베이징의 톄안먼(천안문) 광장을 무대로 한 중국의 민주화 운동지지 시위 때였다. 당시 528일에도 150만 명 규모의 비슷한 시위가 있었다.

중국 학생들을 지원하자는 것이 당시 홍콩인들의 시위 목적이었지만, 실제로는 중국 반환이 8년 후인 1997년이 가까워지면서 자신들의 장래를 걱정한 반중(反中)시위의 성격도 있었다. 우리는 중국인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의 홍콩인이라는 주체의식 아래 홍콩의 중국화를 우려한 것이었다.

그리고 20196월 중국 본토로의 범죄 혐의자 인도를 가능하게 한 법안(송환법) 개정 문제를 놓고 이달 9103만 명(주최측 발표), 16일에는 200만 명이 홍콩 정부와 그 배후인 중국 당국에 이의를 제기한 시위였다. 일부 홍콩신민들은 캐리 람 행정장관은 중국 공산당의 꼭두각시 정부(괴뢰정부)라며, 캐리 람 행정장관의 사퇴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역시 홍콩의 중국화를 우려하는 것이다.

원래 홍콩은 이민자들에 의해 형성된 도시국가이다. 아편 전쟁 이후 1842년 영국의 식민지가 된 이후, 홍콩은 임차의 장소, 임차의 시간이 있는 곳으로 불린 곳이다. 중국 본토는 공산주의 체제인 반면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이지만 자유민주주의 체제였던 관계로 홍콩인들을 중국과 홍콩 사이에 무슨 문제가 생기면 이민을 가겠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호주나 캐나다 등으로 이민을 생각한 사람들이 꽤 됐다.

고도의 자치가 보장된 홍콩의 일국양제는 홍콩의 중국으로의 반환으로 50년간, 2047년까지만 그 고도의 자치가 보장된다. 그 이후엔 공산당 일당 독재의 중국 손아귀에 완전히 쥐어지게 된다. 반환될 당시만 해도 홍콩 시민들에게 홍콩은 반환 후에도 역시 과거와 같은 상황이 머물러 있는 곳으로 생각했을 것으로 보인다.

변화가 생겨난 것은 물론 반환 직후부터이다. 반환 후에 태어난 홍콩인들이 늘어나면서 변화는 더욱 더 많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설령 반환되던 해인 1997년에 태어난 홍콩인의 나이는 기껏 22세이다. 이 같이 홍콩의 젊은이들은 중국의 과거의 행적을 잘 알지 못한다. 따라서 이들 청년들은 이민이라는 의식이 거의 없다. 홍콩은 자기들이 태어난 고향이요 모국이다. 중국과는 상관 없는, 단지 이웃국가와 긴밀하게 지내야 하는 나라라는 인식이 매우 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제는 중국 공산당 일당 독재의 중국이 1997년 반환이후 2047년까지 온전히 홍콩을 놓아두지 않고, 중국화를 위한 차근차근 변화를 시도해왔다는 것이다. 20147년부터 중국화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2047년이면 중국화를 완성시키겠다는 중국 공산당의 뜻이 홍콩에 스며들고 잇다는 점이다. 1997년 반환 때 태어난 홍콩인은 2047년이면 나이 50세가 된다. 요즘처럼 건강한 사회에서는 수명이 100세라고 말한다. 한창 때인 50세의 홍콩인들의 삶을 미리 내다보고 있을 것이다.

이번 시위의 특징 중의 하나는 10대들의 참여가 아주 많다는 점이다. 젊으면 젊을수록 자신들의 삶에 있어 매우 절실한 문제로 다가오는 것이다. 홍콩 반환 전후에 활발하게 행해진 논의가 있었다. 반환 후에 홍콩의 중국화인가, ‘중국의 홍콩화인가 하는 문제였다. 반환 이후 초기에는 중국의 홍콩화바람이 일었다. 그러나 몇 년 후인 2001년에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을 하게 되고, 중국의 경제발전이 비약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중국의 홍콩화홍콩의 중국화로 바뀌게 되었다,

최근의 홍콩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같은 대규모 시위의 배경에는 홍콩의 중국화가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2047년으로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젊은 홍콩인들의 대규모 시위는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에 중국 공산당은 어떻게 대처할지 세계는 관심 있게 지켜볼 것이다.

홍콩시민들은 이번에 대규모 시위를 통해 중국 당국과 홍콩정부로부터 양보를 얻어냈다. 시민의 힘(People's power)이 반영된 것이다. 일부 홍콩 시위대 중에는 19805.18 광주민주화혁명에 때 불려졌던 임을 위한 행진곡이 중국어 번역되고 연주되면서 시위의 의미를 보다 더 깊게 하기도 했다는 뉴스도 있다.

1989년 중국의 민주화 운동은 톈안먼 광장에서 100만 명 규모의 시위를 벌였으나, 결국 무자비한 중국 공산당에 무력 탄압되고 만지 2019년 현재 꼭 30년이 됐다. 2019616200만 명이 시위에 참가한 일부 홍콩인들은 중국 공산당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민주화 운동을 말살시켜버린 역사적 사실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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