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탐방] 1958년 대한민국 역사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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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방] 1958년 대한민국 역사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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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 북한에서 열린 각종 대회의 결의문

진보당 사건-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1958년 새해에 접어든 1월 12일 돌연 경찰은 진보당 간사장 윤길중 등 5명의 당간부를 검거했다. 이어 15일에는 조직부장 김기철 등 4명의 간부를 추가구속하고 이들이 앞서 피검거되었던 간첩 박정호, 권정봉 등 14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발표했다.

경찰 발표에 의하면 전기한 간첩들이 진보당의 조직확대 지령을 받고 남하하여 진보당에 자금을 제공하고 다가오는 총선거에서 진보당원의 대량 당선을 꾀하고 박정호는 조봉암과 직접 만나 협의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경찰은 조봉암의 집에서 진보당 비밀당원명부 및 소련, 중공 북한에서 열린 각종 대회의 결의문, 선언서 등의 원문이 나왔다고 하였다.

그동안 수개월에 걸쳐 비밀수사를 펴오던 경찰은 1월20일 공식발표를 하여 진보당 비밀당원 명부에는 장건상, 김창숙, 등 혁신계의 정계 거물급 인사와 박정호, 정우갑 등이 끼여 있으며 진보당 창당 당시에 조봉암, 박기출, 김달호 등 주요 간부들이 적색 간첩의 배후 조종하에 평화 통일방안을 추진하고 남북 양대표로 구성하는 전국위원회를 조직,국제 감시하의 총선거를 실시 남북연립정부를 수립하는 데 국제 감시 위원회의 구성은 인도, 폴란드, 체코 등 한 때 적성감위의 나라들이라 하여 국민이 축출운동을 전개 하였던 중립 감시 위원단으로서 구성, 인도 대표를 의장으로 할 것을 진보당 중요간부간에 결의하였던 것이다.

진보당 죽산 조봉암

어마어마한 사건이 연일 신문의 3면을 장식하자 평소 조봉암의 거취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던 국민들의 놀라움은 컸다. 인천에서 출생한 그는 일본의 중앙대학을 중퇴하자 소련으로 들어가 모스크바 공산대학에서 2년간의 공산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공산대학을 졸업하자 국내로 들어와 8.15해방이 되기까지 공산주의 지하운동을 하다가 일경의 요시찰 인물의 검거로 체포되어 헌병사령부에 구속되어 있던 중 8.15 해방으로 석방되자 고향인 인천에서 입후보하여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에 앞서 해방후의 좌우익파쟁시에 박헌영과의 파벌싸움과 공산주의에 혐오를 느껴 “삼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책자를 발표하고 박헌영 등 공산당과 결별선언을 하였던 것이다. “나는 맨 처음 조선 공산당을 조직한 사람의 하나다. 그때의 당원은 108명이었다. 그러나 태반이 공산주의의 공자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들과 같이 공산당 활동을 계속한 것은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기 위하여는 그 전처럼 비조직적인 독립운동은 별로 효과가 없고 강력한 조지체를 가져야 하겠다는 것이 그 동기였다. 또한 당시의 사정은 소련이 일제 타도에 적극적이었고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원조를 받기가 용이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이같은 몇가지 동기에서 조선공산당을 조직 했었다. 당을 조직한 후 당원 180명의 성분을 직접 조사한 결과 8할이 양반 출신이었다. 이로 미루어 보아도 문자 그대로 공산당 운동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해방후 고향인 인천에서 민전의장을 지내면서 여러 좌익운동에 가담하여 일을 해오면서 여러 가지 모순을 발견하고 차차로 불만을 갖게 되었다.

민주적이고 자립적인 독립노선이 아니고 사사건건 소련의 지령을, 그것도 비판없이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한 예로 신탁통치문제만 하더라도 용납 할 수 없는 일이라고하여 반탁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하였던 것이 소련의 지시라하여 하룻밤사이에 반탁이 찬탁으로 돌변하고 말았다.

이때 공산당 내에서도 반대하는 의견이 나오고 투쟁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나는 손을 끊기로 하고 민족주의 독립전선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그의 말과는 달리 그가 공산당을 이탈하게 된 동기를 당시 그가 박헌영에게 보낸 서신에서 엿볼 수 있는데 이것은 박에게 전달되는 도중 모기관에 압수되었고 후에 민주의원으로 넘어갔으며 이것이 정략화되어 “박헌영 동무에게”라는 공개문으로 각신문사에 배포 되었다.

이 사신에 의하면 공산당내에서의 주도권 쟁탈과 개인적인 불만에 의했다는 것이다. 여하간 공산주의에서 손을 떼고 제헌 국회에 진출한 조씨는 당시의 국회의장이었던 이승만 박사에 의해 초대 농림부 장관에 발탁됨으로써 그 자신은 물론 식자들간에 의외의 일이라는 반항을 일으켰으나 한편 그의 명석한 두뇌와 정연한 이론으로 미루어 보아 당연한 일이라고 수긍이 가는 바가 없지도 않았다.

그후 농림부 장관에서 물러나 국회부의장 등을 역임하면서 제 2대 및 제 3대 대통령선거에 입후보 하였다. 그는 입후보에 대하여 “내가 대통령이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다. 다만 나의 입후보가 나라를 위하여 좋은가 나쁜가를 국민들의 판단에 맡겨 옳다고 생각될 때는 입후보할 것이다” 라고 역시 죽산 조봉암다운 아리송한 의견을 피력하였다. 두 번의 대통령선거에서 낙선 되었지만 그래도 진보당을 꾸준히 끌고 나갔던 것이다.

1958년 일본 동경에서 열린 제3회 아시아 경기대회 마라톤 경기에서 이창훈 선수가 우승을 차지했다. 36년의 압제를 벗어난 이후 일본인과 대등한 입장에서 그들의 수도에서 이창훈 선수의 우승은 큰 의미를 안겨준 쾌거였다.

1958년 5월 2일 제4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되어 자유당 126석, 민주당 79석, 무소속 27석 등 233명이 선출 되었다.

함석헌 필화사건

1958년 8월 8일 서울시경은 함석헌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긴급 구속하였다. ‘사상계’ 8월호에 기고된 논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의 글 중 ‘남한은 북한을 소련. 중공의 꼭두각시라 하고 북한은 남한을 미국의 꼭두각시라 하니 있는 것은 꼭두각시뿐이지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나라없는 백성이다’ 함옹이 서울지검에 송치되자 조인구 부장검사는 ‘남북을 동등한 위치에 두고 우리 주권을 부인한 구절은 방임할 수 없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기소했다.

2. 4 보안법 파동

1958년 1월 13일 진보당의 조봉암 위원장 등 간부 7명이 간첩혐의로 구속되고 군정법령 55호의 발동으로 진보당의 정당 등록이 취소되고 각 지구당의 폐쇄령이 내렸다. 8월에는 사상계의 “생각하는 사람이라야 산다”의 논문으로 함석헌 옹이 구속되고 영자지 코리아 타임즈의 “도박자의 정의”라는 논문으로 장수영이 구속되었으며 동아일보의 “두개 사단 해체준비”라는 기사로 취재기사 취원각 기자가 구속되는 등 언론계 인사 3명이 구속되어 정계와 언론계에 대해 노골적인 강경책이 취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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