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국가모독죄로 산 나경원을 친 신판 권위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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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국가모독죄로 산 나경원을 친 신판 권위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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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혁명가들은 국가지상주의자가 되게 돼있다” 알베르 카뮈가 한 말이다. 압제의 피해자(victim)이던 혁명가가 권력을 잡으면 처형자(executioner)가 된다는 뜻이었디. 일찍이 프랑스 공산당에 몸을 두었다가 출당처분을 받았을 정도로 비공산주의적이었던 그는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 시킨다”는 혁명지상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의 이런 천성은 훗날 스탈린주의를 지지한 장 폴 사르트르와 벌인 치열한 논쟁을 통해 더욱 선명하게 표출되었다.

한국의 운동권도 과거엔 권위주의에 대항해 ‘민주화’를 외치다가 투옥된 피해자들이었다. 그들은 교도소에 수감되고서도 단식투쟁도 하고 “어둡고 괴로워라/밤이 깊더니/삼천리 이 강산에 /먼동이 튼다”라며, 소리높이 투쟁가를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그렇던 그들이 지금은 어떤가? 지금의 그들은 피해자 아닌 오만한 처형자로 군림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돌아볼 일이다. 나경원 야당 원내대표는 외신을 인용해 “대통령이 김정은 수석대변인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게 해달라”고 연설했다. 그러자 집권 여당의원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야유를 하고 소리를 지르고 몸싸움을 하며 나경원 대표의 연설에 훼방을 놓았다.

꼭 그 옛날 김영삼 김대중 야당 지도자들이 유신정부를 비난했을 때 임명직 국회의원들인 유신정우회 사람들이 보이던 반응 그대로였다. 오늘의 여당 의원들이나 실권자들 중에는 그 때 그 광경을 지켜보며 분노와 함께 혀를 깨물고 치를 떨던 이들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해찬 여당대표처럼. 그런 그들이 이제는 처형자의 입장에서 “나경원 원내대표의 연설은 국가원수모독죄야!”라며 눈알을 굴리고 있다니, 참으로 별 희한한 구경을 다하게 되었다.

국가모독죄는 1975년 3월에 유신국회에서 억지춘향으로 날치기 통과시킨 형법상의 신설조항이었다. 여용 법학자들이 TV에 나와 말도 안 되는 궤변으로 국가모독죄 홍보를 하던 모습을 왕년의 정치범이던 운동권도 봤을 것이다. 물론 그 때의 운동권은 1980년대 아닌 1970년대 운동권이었다. 이들은 민청학련사건으로 10개월 동인 모진 고생을 한 끝에 국내외 여론 덕분에 ‘구속집행 정치’ 조치로 1975년 2월에 석방돼 있었다.

국가모독죄는 “내국인이 국내에서 외국인이나 외국 단체 등을 이용하거나 국외에서 대한민국 또는 헌법기관을 모욕·비방하거나 사실 왜곡·허위 사실 유포 등을 하면 7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왜 이런 법조항이 신설됐나? 당시 유신정부는 국내 언론은 모조리 재갈을 물려 자신들에게 불리한 언동을 봉쇄할 수 있었다. ‘유언비어 유포 금지’를 규정한 긴급조치 9호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유신정부는 외신이나 외국 매체에는 이를 강제할 수 없었다. 이래서 김영삼 김대중 기타 인사들이 외국 매체와 접촉하고 인터뷰하고 취재에 응해 주는 것만은 속절없이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단지 타임이나 뉴스위크에 유신정부에 불리한 기사가 나면 이를 먹물로 까맣게 지우고 배포하게 했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런 소극적 미봉책에만 의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유신정부는 새로운 묘책(?)이랍시고 국가모독죄라는 조항을 형법에 끼워 넣기로 했던 것이다.

이 법은 7년 뒤인 1982년 7월 한국기독청년회 김철기 총무가 내외신 기자 10명을 모아놓고 정부를 비판하는 유인물을 배포했을 때 처음 적용되었다. 1심은 김 총무에게 1년6월 실형을 선고했다. 2심은 무죄, 대법원은 유죄추장 파기환송, 결론은 집행유예였다. 김덕룡 한광옥 이철 등 당시 야당 정치인이 이 법 때문에 시달림을 받았다.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된 1988년에야 이 조항은 폐기되었다.

운동권은 바로 이런 말도 안 되는 법 아닌 폭력을 조자룡 헌 칼 쓰듯 하며 국민과 언론과 정치인을 옥죄던 권위주의에 반대해 싸운 경력을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워 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뭐? 나경원 야당대표의 연설을 국가원수 모독죄라고? 지나가던 소 뿐 아니라 요즘 잘 나타난다는 멧돼지와 너구리도 배꼽을 잡고 폭소를 할 노릇이다. 죽은 국가모독죄로 산 야당 원내대표를 잡겠다고?

더불어민주당은 이런 작태로 미루어 볼 때 이젠 자유민주주의 정당으로서 갖춰야 할 이성을 내팽개치고 그 어떤 광분(狂奔) 분위기에 휩싸인 운동권 판(版) 유신정우회처럼 되고 있지 않나 하는 불길한 느낌이 든다. 민주당 의원들은 퇴장했다가 다시 의석으로 돌아와서는 일제히 “사과하라, 사과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야당 원내대표의 연설을 한사코 사보타지 했다. 이게 대체 무슨 행패인가?

왕년에 광장집회를 할 때 하던 행티를 그대로 되살린 것이었다면 한국의 의회민주주의는 얼마 안 가 쇠망할 것 같아 으스스해진다. 2020년에 만약 민중민주주의 개헌을 하면 세상이 그렇게 군중 직접정치로 바뀔 것이다. 괴물스러운, 너무나 괴물스러운 전조증상이다.

양식 있는 국민들은 이번에 뭔가 느낀 게 있었을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재판을 했다고 현직판사를 기소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연설을 했다고 제1 야당 원내대표를 윽박지르고, 마음에 들지 않는 메시지를 전할 경우 해당 사이트를 아예 없애버릴 심산이라면 이건 운동권이 겉에 내세웠던 ‘민주화’ 세상이 아니라, 혹시 그들이 마음속 깊이 감춰왔을지도 모를 그 어떤 종류인가의 ‘선출된 독재’를 예감하게 한다. 오직 깨어있는 자유시민만이 이 음험한 추세를 간파하고 저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거꾸로 자유시민들이 신판 권위주의에 대항해 “동포여 자리차고 일어나거라/산 넘고 바다 건너 태평양까지/아~아~ 자유의/자유 의/종이 울린다”라고 투쟁가를 불러야 할 판인가? 역사는 왜 진전하지 않고 되풀이한다는 것인지 답답할 뿐이다.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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