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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꾼 그날의 함성..6월 민중항쟁 16주년

16년 전 6월의 그날, 한여름처럼 양광이 눈부시게 쏟아지던 광화문 세종로 종로 일대를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치며 노도와 같이 휩쓸던 젊은 함성들. "군사독재와 폭력정권에 항거하여 압제의 사슬을 끊고 분노의 불길을 터뜨린" 민주의 횃불 6월항쟁.

^^^▲ 87년 6월 18일 오후 서울 신세계백화점 부근 일대에서 시위대가 전경 80여명을 포위하고 있다
ⓒ 우상호홈페이지^^^


6월 민중항쟁이 그 정점을 향해 가파르게 치닫고 있던 87년 6월 18일 오후 1시. 점심도 거른 채 1주일째 집무실에 대기하고 있던 권복경 치안본부장의 무전기에는 시위현장으로부터 타전되는 다급한 목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서울시내가 온통 화염에 휩싸인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폭풍이 몰아치고 화산이 폭발하는 듯한 국민적 분노와 저항이 성난 파도처럼 몰아쳤다. 경찰은 곳곳에서 시위대에 포위된 채 밀리고 있었고, 무장해제 당했다. 시위진압 장비들은 불태워졌으며, 점점 위기상황이 다가오고 있었다.

6월항쟁에 불을 지핀 도화선은 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발생한 경찰의 서울대생 박종철씨 고문치사 사건이었다. 여기에 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탄생한 전두환 군사정권은 4·13호헌조치로 민주화 열기에 기름을 부었다.

전국의 대학가는 시위와 데모로 하루도 영일이 없었으며, 교수들도 연일 시국선언을 발표하면서 이 거대한 물결에 합류했다. 정치연금에서 풀려난 김영삼·김대중이 이끄는 민주화추진협의회가 84년 5월 결성되면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 야권 역시 85년 2·12총선에서 신민당이 신생돌풍을 일으키며 숨가쁘게 움직였다.

6월 10일 오전 잠실체육관. '민정당 제4차 전당대회 및 대통령후보 지명대회'에서 전두환은 같은 육사 11기 동기인 노태우의 손을 치켜올렸다. 그리고 민정당의 권력승계 작업이 마무리되었음을 선언했다.

^^^▲ 너희들도 우리 자식87년 6월항쟁 기간 중 경찰의 무차별적인 최루탄 발사로 부상자가 속출하자 어머니들이 나서 전경의 가슴에 장미꽃을 달아주며 최루탄을 쏘지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 우상호홈페이지^^^


같은 시간 전국 22개 도시에서는 수십만명의 국민이 참가한 가운데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 쟁취 범국민대회'가 열렸다. 무차별적으로 뿜어대는 다탄두 최루탄과 자욱한 가스연기 속에서 학생과 시민은 어깨에 어깨를 겯고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10대 소녀에서 60대 할머니들까지 대열에 뛰어들어 눈물을 흘렸다. 장구한 역사 앞에 모두가 하나된 기쁨, 억눌리고 억눌리다 비소로 떨쳐 일어선 감격과 회한의 눈물이었다. 너도 나도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를 다짐했다.

이날의 성난 파도는 뜨겁고도 장렬했다. 그것은 살아남은 자의 수치와 분노가 독재자에게 던지는 마지막 항거였다. 박종철과 이한열 그리고 가슴 속 깊이 묻어둔 80년 광주의 민주영령들에 대한 산자들의 속죄였다.

이날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는 국민합의를 배신한 4·13 호헌조치는 무효임을 전 국민의 이름으로 선언했다.

"세계의 양심과 이성이 우리를 격려하고 민주제단에 피뿌린 민주영령들이 우리를 향도하며, 민주화 의지로 사기충천한 온 국민의 민주화 결의가 큰 강줄기를 형성하니 무엇이 두려운가. 자! 이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찬연한 민주새벽의 그날을 앞당기자."

^^^▲ 87년 6월 10일 오후 덕수궁 앞의 군중들이 차량의 경적 신호에 박수를 보내고 있다
ⓒ 우상호홈페이지^^^


이날 오후 6시 경찰의 원천봉쇄로 겹겹이 둘러싸인 서울 성공회대성당에서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선포하는 애국가와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광화문과 시청 앞을 지나는 수백대의 차량이 일제히 경적을 울렸으며, 시민들은 박수와 만세를 부르며 화답했다.

30년 가까이 독재의 총칼 앞에 몸을 굽혔던 민중들이 원한에 사무쳐 일제히 떨쳐 일어선 것이다. 독재와 불의에 감연히 맞서 민주주의를 쟁취하고자 한 우리 국민들의 숭고한 용기와 열정이 만방에 빛나고 있었다. 굴곡 많은 우리 현대사에서 실로 가장 찬연한 순간이었다.

전국적으로 연인원 500만명 이상이 참가해 20여일 동안 전개된 6월항쟁에 대해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는 "우리 사회 구석구석의 잠재력을 동력화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국민의 사회의식을 폭넓게 일깨웠다"고 회고했다.

87년 6월의 대함성. 그날의 항쟁으로 우리는 단번에 절망의 질곡에서 희망의 기슭으로 올라섰다. 연령, 직업, 계층, 종교를 뛰어 넘는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통해 우리는 민족대통합의 감격을 맛보고 무너져내리는 군사독재를 장송했다.

그러나 6월의 불꽃은 다 타지 못하고 꺼졌다. 국민의 저항에 밀린 군사정권은 6·29로 위장항복하고 6·10을 무장해제했다. 선거를 앞두고 민주세력은 양김씨로 갈라져 분열하고 선거혁명은 끝내 실패했다.

^^^▲ 명동을 가득 메운 사복 전경들
ⓒ 우상호홈페이지^^^


6월항쟁의 주역이었던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집권 내내 3당합당 및 자민련과의 공조로 대통령에 오른 원죄의 굴레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참여정부를 표방하고 취임한 노무현 대통령 또한 잇따른 사대·굴욕외교 등으로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6월항쟁에 대한 추억만으로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의 과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지역주의세력과 수구세력을 극복할 수도 없다. 정대화 상지대 교수는 "6월항쟁을 기억하되 기억하는 것으로만 끝나지 말고 21세기적 관점에서 6월항쟁을 극복하는 제2의 6월항쟁을 통해 6월항쟁의 내재적 한계를 극복하면서 한 걸음 앞으로 전진하는 역사적 진보의 발상이 필요하다"고 충고했다.

6월. 전 국민이 군사독재에 맞서 떨쳐 일어나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치며 새역사를 창조하고자 했던 그날의 함성에 담긴 알맹이를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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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6-10 14:47:05
뉴스타운은 6월항쟁의 법통을 이어가는 언론이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이뉴스타운엔 아직도 혼랍스러운 뉴스들이 많네요. 쩝

-전 이땅의 민주와 자유는 "조선일보 잡기"라는 믿음과 깨달음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30대 직장인입니다.

석희열 기자 홧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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