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중진공업국을 향하여(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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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기계공업의 태동(자동차) - ⑨

 
   
  ^^^▲ 일생을 받쳐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하신 故 박정희 대통령
ⓒ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새나라 차 - 지방세는 감면, 관세는 면제

새나라자동차 회사는 자동차공업 보호법에 의해서 각종 특혜를 받았다.

자동차의 제조 및 조립에 필요한 시설재 및 부분품에 대해서 면제를 받게 된다. 그리고 이 회사에서 판매하는 자동차는 지방세(즉 자동차세와 취득세)를 감면 받는다.

즉 공장건설에 필요한 시설재는 관세를 물지않고 들여오고, 관세를 물지않은 부분품을 SKD 상태로 도입한 후 수공구로 자동차를 조립해서 판매하면, 매수자는 취득세를 물지않고 인수받아 운행하면서 자동차세를 감면받게 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특혜는 지나치다 못해 너무했다. 그래서 국내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관세를 면제하면 국내 부품공업은 살아남을 수가 없고, 새로운 부품을 개발할 길도 막혀버린다. 국내에서, 그것도 소량 만들어서 어떻게 관세까지 물지 않은 수입품과 대적할 수 있겠는가! 원래 관세란 국내공업을 보호하자는 뜻에서 부과되는 세금이다.

따라서 관세를 면제한다는 말은 국산품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이 조항 때문에 우리나라 자동차 부품공업이 설 땅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새나라자동차에서는 국산부품은 사지 않았다. 나중에 새나라자동차를 인수한 신진자동차에서도 이런 경향은 똑 같았다.

신진자동차에서도 일본에서 수입하는 부품 값이 싸게 먹히는데, 굳이 비싼 국산부품을 사용함으로써 손해를 보려고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익만 추구하는 민간기업에게 이러한 애국심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우리나라의 자동차 국산화는 이 법(자동차공업보호법)이 없어지게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 자동차공업보호법은 한시법(限時法)으로 1967년 12월 31일에 폐지되었다. 그동안 우리나라 자동차공업은 그야말로 불모지대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이 법에 면세조항을 삽입하고 난 후 새나라자동차는 1962년에 1,710대를 조립했다. 다음 해인 1963년에는 1,063대를 조립하여 모두 2,773대가 판매되었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이익이 발생했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1963년 말에는 우리나라 외화가 바닥이 나버려, 자동차 부품을 수입할 외화가 없었고 또한 들끓는 세론으로 새나라자동차는 문을 닫게 되었다. 이때 박노정 회장이 모든 도장(이사직)을 갖고 일본으로 떠나버려 새나라자동차는 마비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1963년 7월의 일이었다. 그리고 소위 「4대 의혹사건」의 하나로 발전해 나갔다.

1964년 6월 김정렴(金正濂) (당시) 상공차관은 홍재한(洪在漢) 차량담당계장에게 자동차공업 종합 육성계획을 수립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자동차 조립업자들의 소동이 한참일 때였으므로 홍재한씨는 상공부로 출근하지 않고 지방의 한 여관으로 내려가서 약 1개월간 작업을 했다고 한다. "좁은 국내시장을 생각해서 ① 자동차공업은 일원화해야 한다는 기본방침을 수립하고, ② 국산화율을 높이기 위해 연도마다 국산화율을 지정해서 발표하고, ③ 자동차 조립업자는 이 국산화 목표를 달성해야 하며, ④ 이를 위해서 국내자동차 부품공업을 육성한다. 우선 부품업체 75개를 지정해서 금융지원 등 적극 지원하겠다"는 안이었다(註: 홍재한씨의 자동차공업 일원화계획안). 이 안, 즉 자동차공업 육성계획은 1964년 8월에 공표됐다.

새나라 자동차(주), 신진자동차(주)에서 인수

새나라자동차의 주거래은행은 한일은행이었다. 한일은행으로서는 새나라자동차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했으므로 공개입찰에 붙여 불하하기로 결정하였다. 입찰자격자는 상공부에서 허가받은 자동차 조립업자에 한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드디어 개찰이 되었는데 예상대로 신진에 낙찰되었다. 그런데 이때 묘한 일이 벌어졌다. 다음날 발표된 공고를 보니 낙찰자로 선정된 업체는 신진이 아니고 삼미사(三美社)였던 것이다. 이러니 문제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우선 삼미사는 입찰자격이 없었다. 자동차 조립업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감사원에서 신진쪽의 손을 들었다. 그 결과 신진공업사는 1965년 11월 새나라자동차(주)를 인수하고 신진자동차(주)로 이름도 바꾸었다. 닛산자동차와는 손을 끊고 1966년 1월 일본 도요타자동차와 기술 및 자재도입 계약을 체결하고, "코로나" 승용차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1966년이라면 우리나라도 "수출제일주의" 정책이 주효하여 외환사정도 좀 좋아졌을 때이다. 신진자동차로서는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1966년에는 3,117대를 생산해서 큰 재미를 보면서 신진자동차는 커져나갔다.

 
   
  ^^^^^^▲ 일생을 받쳐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하신 故 박정희 대통령
ⓒ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그러나 우리나라 자동차업계에는 아무런 혜택도 주지 못하였다. 새나라자동차 방식, 즉 SKD상태로 자동차 뭉치를 수입해다 간단히 조립만 해서 파는 데만 정신을 쏟았기 때문이다.

숫자로 표시하면, 1966년 당시 국산화율, 즉 국산부품을 쓰는 비율은 고작 21%였다. 타이어, 배터리, 그리고 소소한 부품만 국산품을 썼다. 상공부로서는 이대로 방치할 수가 없었다.

 

 
   
  ^^^^^^^^^▲ 일생을 받쳐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하신 故 박정희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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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1967년에는 최소 32%만이라도 국산화하라고 지시를 내렸으나, 신진자동차(주)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겨우 23.6%만 국산화했다.

참고로 얘기하자면 이때 버스 조립공장의 국산화율은 64%나 되었다. 망치로 두드려 만드는 수공업적 조립공장에서조차 64%를 국산화하고 있는데, 단일 모델인 "코로나" 승용차를 만들면서 겨우 23.6%를 국산화했던 것이다.

1966년에 21%의 국산화를 해서 1년 사이에 겨우 2.6%의 국산화 진전이 있었으니 결국 국산화는 외면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1967년에는 4,983대나 생산해서 판매했다.

<도표 9-8>을 보면 신진자동차의 국산화 비율과 판매대수가 나오는데, 국산화에 아예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돈벌기에만 열중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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