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항복할 때까지 싸워야, 미국은 가해자 우리는 피해자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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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항복할 때까지 싸워야, 미국은 가해자 우리는 피해자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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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중생범대위 '광화문 할아버지' 이관복 고문을 병상에서 만나다

[편집자 주] 여중생장갑차사건 1주기가 다가오고 있다. 1주기를 기념하여 여중생범대위에서는 대규모 추모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이 행사를 준비하기 위한 일환으로 시민대상 ‘613 1주기 추모대회 준비위원’을 모집하고 있다. 행사 1주일 여를 앞둔 현재, 준비위원 수가 8만에 이른다.

1년이 지난 지금, 8만 여명의 사람들이 준비위원이 되어 1주기를 기리게 되기까지는, 여중생 장갑차 사건 촛불집회를 시작한 이후 근래까지 거르지 않고 광화문 집회현장을 지켰던 70세의 한 노인이 있어 가능한 결과였다. 이 때문에 주변으로부터 ‘광화문 할아버지’로 불리는 이관복 씨. 그를 통해 여중생장갑차 사건 이후를 돌아보고, 그 의미를 짚어보았다.

^^^▲ 투병중인 여중생범대위의 '광화문 할아버지' 이관복 고문을 병상에서 만났다.
ⓒ 김성곤 기자^^^


현충일을 하루 앞둔 6월5일 오후, 국가유공자들을 위한 운영되는 보훈병원이 바빠졌다. 노무현 대통령이 현충일을 기념하여 보훈병원에 입원중인 독립운동 유공자(전 광복회 회장)를 찾아 방문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노무현 대통령이 방문한 보훈병원 본관 8층의 다른 방 8116호에는 민주유공자로서 여중생범대위 이관복 고문이 입원해 있었다.

투병중인 광화문 할아버지 ‘이관복 고문’

이관복 고문은 ‘광화문할아버지’로 불린다. 여중생장갑차사건 이후 광화문에서 진행되었던 촛불집회의 붙박이 진행자였던 그에게 주변 사람들이 붙여준 이름이다. 그러나 그는 180차 촛불집회를 끝으로 광화문 집회자리를 함께 할 수 없었다.

그의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70세 고령의 나이에도 하루 4시간 씩 쉴 사이 없이 마이크를 붙잡고 연설을 하던 활동이 무리였는지 모른다. 정확한 병명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의 부인에 따르면, 그는 지난 2일 죽음을 넘나드는 수술을 했고, 수술은 성공리에 이뤄졌다고 했다.

병원 의사들이 수술을 권했던 날자는 6월5일이었다. 그러나 이관복 고문은 그 날이 아닌 6월2일에 수술하길 원했다. 이유는 6월13일 광화문에서 열리게 될 여중생장갑차사건 1주기 추모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이다.

오후 4시만 되면 “오만한 나라, 깡패나라 미국”이라는 소리 들려와

^^^▲ “우리가 그 동안 광화문에서 주장했던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것이었어요..그런데 지금까지 아무 반응이 없어요.”
ⓒ 김성곤 기자^^^
추모대회는 현재 대대적으로 준비되고 있다. 여중생범대위에서 이 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시작한 추모대회 준비위원 모집에 8만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응했다. 1년 전 광화문과 시청을 메우던 촛불 든 행렬이 오는 13일 다시 연출 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이에 김 고문은 가슴 벅차지만은 않다.

“사람들이 늘 알려줘요. 준비위원이 6만이 됐다. 7만이 됐다. 그런데 6월13일을 앞두고 분한 마음이 앞서요. 우리가 그 동안 광화문에서 주장했던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것이었어요. 불평등한 소파 개정하라, 미국과 한국의 관계를 주종이 아닌 평등한 관계로 만들자, 노무현 대통령도 함께 하자, 그런데 지금까지 아무 반응이 없어요, 미국은 말할 것도 없이 노무현도 외면하고 있지요.”

촛불집회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1년이 다 되도록 진행되어 1주기를 맞기까지 그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그는 지난 해 11월 29일을 시작으로 올 5월까지 180여 차례에 걸쳐 진행된 촛불집회를 함께 했다. 비가와도 눈이 와도 오후 4시만 되면 광화문 교보문고 옆 벤치에서는 “오만한 나라 미국, 깡패나라 미국”이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는 미국이 물러가야할 이유에 대해서 설명했다.

“효순이 미선이 사건을 기준으로 57년간 미군이 일으킨 사건이 11만 건, 매일매일 6건 이상의 사건을 저지른 셈이에요. 이렇게 되면 한국과 미국과의 관계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문제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이지요. 이제는 가라. 물러가라. 가지 않으면 좋지 못하다. 이 문제는 간다하다. 사상이나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우방이라면 우방국민으로 평등하게 대우해 줘라. 대우해주지 않으려면 가라 라고 얘기를 했죠.”

^^^▲ “고령자들에게 많이 당했어요. 나보고 빨갱이라고 합니다”한국전쟁을 겪은 고령자들을 만날 때면, 고령자인 그도 매우 당황스럽단다.
ⓒ 김성곤 기자^^^


오랜 시간 동안 집회를 지켜온 터라 집회장소에서는 이런저런 일들도 많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한국전쟁을 겪은 고령자들을 만날 때면, 고령자인 그도 매우 당황스럽다.

“고령자들에게 많이 당했어요. 나보고 빨갱이라고 합니다. 오늘 미국이 가면 내일 김정일이 내려온다고 해요. 솔직히 말이 통하지 않죠. 그래도 맞대응 했어요. 한번은 비가 오는 날 진관스님이 함께 하시겠다고 해서 함께 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땡중이라며 우산으로 진관스님의 머리를 향해 내리쳐 순간 놀란 진관스님이 목탁으로 방어를 했는데 그게 그 사람 이마를 쳐 머리에 피가 났어요, 그래서 50만원에 합의를 봤죠. 나쁜 사람들이에요.”

“613 추모대회에 사람이 모이지 않으면 미국이 우릴 무시해”

이런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에게는 그 자리를 지켜야할 이유가 있었다. 여중생장갑차사건이 가져다준 사회적 충격과 분노와 성과를 딛고 그는 민족의 자주를 쟁취하고자 했다.

^^^▲ “613 추모대회에 사람이 모이지 않으면 미국이 우릴 무시할 것”
ⓒ 김성곤 기자^^^
“전에는 미군이 수많은 사건을 일으켜도 이를 국민적으로 수용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미선이 효순이 사건을 계기로 달라졌어요. 그래서 광화문에서 매일같이 집회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에요. 이 기회에 미국의 정체를 알려서 자주하는 민족이 되게 하겠다는 생각이에요.”

그는 이번 1주기 추모대회를 걱정 반 기대 반으로 기다리고 있다. 그 절반의 기대는 사람이 많이 모여 미국이 무시하지 않는 나라가 되는 것이고, 절반의 걱정은 사람이 모이지 않아 미국이 우릴 깔보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번 추모대회를 계기로 미국의 사죄를 꼭 받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집회만 하면 사람들이 많이 모여야 할텐데 하면서 피가 말라요.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 않으면 미국이 우릴 무시해요. 미국이 사죄할 때까지 우린 어떤 형식으로든지 계속해서 싸워야 해요. 이번 추모대회가 잘 돼야해요.”

이 고문은 이 추모대회를 기점으로 민족자주의 외침이 높아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처음엔 집회를 자제해달라고 하던 노무현 대통령이 국민들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외교분쟁이 안 생기게 해달라며 그 수위를 낮췄다”며 “옛부터 적이 쳐들어 왔을 때, 적들과 싸운 사람들은 상민과 부녀자들이었고 왕과 관료들은 피난 가기에 바빴다”고 말했다.

“탄압을 받을수록 더욱 뭉쳐야 하는데...”

50년 전 그는 평범한 국어교사였다. 그가 국어교사가 된 것은 문맹률 70%가 넘는 교육상황에서 국어교육의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60년 그가 맞이했던 역사의 소용돌이는 그를 평범한 국어교사에 있게 하지 않았다.

^^^▲ 50년 전 그는 평범한 국어교사였다.
ⓒ 김성곤 기자^^^


그는 유신독재 시절을 거치는 과정에서 실형을 살았고, 1980년 광주민중항쟁 당시에도 ‘517쿠데타 518 광주탄압 포고령 위반으로 형을 살았다. 그래서 지난해에는 광주 민주유공자로 확정되기도 했다. 또한, 1989년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이하 범민련) 준비위부터 활동한 창립멤버이기도 한 이관복 고문은 범민련 1기 출범의 해인 1990년 국가보안법 위반, 형을 살았다. 그가 걸어온 통일운동의 길에서 범민련 4년 간의 활동에 대한 기억이 그에게는 강하게 남아 있었다.

“범민련은 정치가, 경제가 하지 못하는 것을 남, 북, 해외의 동포들이 독일에서 만나 조국의 통일을 선구적으로 고민한 단체였다는 데에 의미가 있어요. 거기서 나는 재정위원장과 사무처장을 했는데 어려움이 많았어요, 회비가 잘 걷히지 않아 재정적 어려움이 컸고, 탄압을 받을수록 더 뭉쳐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떨어져 나갔죠. 1993년 2월3일 오후6시 범민련을 그만 뒀습니다. 그때의 심정은 말로 표현하자면, 갓난아이가 옷고름을 잡고 있어 가위로 옷고름을 끈고 가는 어미의 마음이었죠.”


^^^▲ 50년 전 그는 평범한 국어교사였다.
ⓒ 김성곤 기자^^^
“민족은 혈연관계다. 혈연은 끊을 수 없다”
“이미 아버지가 됐고 아들이 되었다. 민족주의가 아니다”

이관복 고문은 50년 동안 하루를 일기를 써왔다. 수술을 받고 기력을 찾은 지난 4일에도 2일부터 쓰지 못한 일기 3일치를 다 써내야 속이 풀리는 정도다. 그는 “자신의 강한 신념은 내적 질서가 확립되어야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의 강직한 면은 사회운동하는 후배들의 질타로 이어졌다. 그는 “소위 사회운동한다는 사람들이 거리에 담배꽁초를 버리고 가래침을 뱉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그는 민족의 자주와 단결을 외치는 통일운동가다. 그가 광화문 촛불집회에서 외치는 대부분의 내용은 통일을 염두에 둔 말들이다. 그는 이 시대에 민족의 자주와 통일이 왜 필요한 지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민족은 혈연관계에요. 혈연관계는 끈을 수 없지요. 이미 아버지가 됐고 아들이 된 것이에요. 이건 민족주의가 아니지요. 이 세계화 시대에도 가정은 튼튼해야 하는 것처럼요.”

기자가 인터뷰를 마칠 무렵 이관복 고문은 기자에게 “이것만큼은 꼭 전해주세요”라며 손을 잡았다.

“우리는 미국이 항복할 때까지 싸워야 한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미국은 가해자 우리는 피해자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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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2003-06-06 20:40:40
진짜 가해자는 북한이지..

왜 그런 말은 안하니..

과실한번 한 것으로 좀 지나치지 않았냐..

결국 그것 때문에 우리나라가 자주국방한다고, 돈 수조 버리게 생겼는데..

그 돈이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의료보험이 해결될 수 있을까... 상상하기도 싫다..


우국충정 2003-06-08 07:24:48
당신은 나이든 사람으로서 존경받을 자격이 없는 노인이군요.
한쪽의 편견에 가득차 세상을 삐뚤게 보고, 그래서 순진한 나이어린 사람들을 그릇되게 인도하는 한심한 노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을 그만큼 살았으면 세상을 균형적 시각으로 볼 줄 알아야지.
그리고 왜 당신같은 분이 보훈병원에 입원해 있는지 이해할 수 없군요.
보훈병원은 국가를 위해 피흘리고 싸우던 분들이 입원할 곳이 아닌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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