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중진공업국을 향하여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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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중진공업국을 향하여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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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기계공업의 태동(자동차) - ⑦

 
   
  ^^^▲ 일생을 받쳐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하신 故 박정희 대통령
ⓒ 뉴스타운,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자동차 공장 정리

다음단계로는 국내에 산재해 있는 자동차 조립공장을 어떻게 정리하느냐 하는 난문제가 남았다.

당시 정래혁 장관은 전국의 자동차조립공장을 5∼6개 정도로 줄이되, 정리작업을 엄정하게 실시해서 잡음이 나지 않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최석무(崔錫武) 계장은 우선 실태조사를 실시키로 했다. 공정을 기하기 위해서 서울공대의 김희철(金熙喆) 교수와 한양공대의 강명순(姜明順) 교수를 팀장으로 모셨다.

서울, 경기, 부산을 합동으로 조사하고 타지역은 2개 팀으로 나누었다. 중부(忠淸), 전라, 제주지방은 김희철 교수팀이 맡았고, 강원, 경상지방은 강명순 교수팀이 담당하였다. 모두 비장한 각오를 했다고 한다. 이 조사에서 탈락된 공장은 자동차조립을 못하게 되니 지금까지 해오던 생업이 없어지는 판이다. 최 계장은 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 모기관에 불려갔다고 한다.

그때 그 기관의 높은 사람이 "최 계장! 당신 이력서를 보니 중학교 선생을 했더구만, 그러니 자동차 업체 선정도 학생을 가르치던 선생님의 심정으로 정직하게 소신껏 일하시오"하고 훈시 아닌 압력을 가하더라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를 김 교수와 강 교수 및 일행에 전하니, 모두 비장한 각오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김희철 교수가 "죽어도 자동차공업 육성 때문에 죽는 것이니 기록에 남을 것 아니오"하며 떠났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 것도 몰랐으니(즉 순진해서) 그렇게 용감하였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고 한다. 각 팀은 공명정대하자고 하니 우선 서로 의심받지 않아야 했으므로 숙식까지 함께 했다고 한다. 3개월이 소요되었다.

일을 끝내고 서울에 도착하니, 집 앞에 검은 지프차가 한대 대기하고 있었다. 그 차에서 검은 안경을 쓴 건장한 사람이 내리더니 무작정 그 차에 타라고 하기에 정보부 계통의 사람인줄 알고 불안한 마음으로 차에 타니 그 사람은 한 업체명을 대며 그 업체를 잘 보아 달라고만 이야기하고 떠났다고 한다. 기분이 몹시 나빴고 불안하기도 했는데 그 업체는 구제대상이 못되었다.

장관의 지시는 전국의 자동차 조립공장을 5∼6개로 줄이라는 것이니 웬만한 공장은 대상에서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제1차로 5개 공장이 1962년 9월 5일에 허가되었다. 정래혁 장관 후임으로 온 유창순(劉彰順) 장관 때이다. 그 후 박충훈 장관 때 2개 공장이 추가되어 최종적으로 선정된 자동차 조립공장은 7개가 되었다. 선정된 업체는 <도표 9-6>과 같다.

 
   
     
 

이렇게 되니 7개 공장에서 빠지게 된 100여개의 조립공장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최석무씨의 증언에 의하면 거의 매일 진정서가 날아 들어오는데, 하루에 최고 20건이 넘는 날도 있었다고 한다. 각 계통을 통하여 압력이 들어오고 모략도 심했지만 이규동 과장과 최석무 계장은 그대로 버텼다고 한다.

두 사람 모두 고지식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이었으므로 그 고비를 이겨낼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다만 제주도만은 명분이 있어 추가했다고 한다. 제주도는 섬이니 육지에서 버스를 수송해야 하는 특수성을 감안해 1개의 공장을 추가했는데, 그 기업이 三洋기업사이다.

1963년 8월 26일, 김훈(金勳) 장관 때이다. 이렇게 돼서 8개의 조립공장이 되었으나 모략이 심해지고 상부에 대한 압력까지도 서슴지 않는 상태로 발전해 나갔다고 한다. 김훈 장관은 부득이 실무자인 이규동 과장과 최석무 계장의 자리를 옮기게 하고 그 후임으로 유석기 과장과 홍재한(洪在漢) 계장이 자동차공업 행정을 맡게 하였다.

기계과와 금속과가 서로 자리를 맞바꾸게 된 것이다. 1963년 12월 20일이었다. 장관도 동년 12월 27일에 이병호(李丙虎) 장관으로 바뀌었다. 김훈 장관은 8월 10일에 부임했으니 4개월 반의 단기 상공장관을 지낸 셈이 된다. 이번에는 유석기 (당시) 과장과 홍재한 (당시) 계장의 회고를 들어본다.

유석기 (당시) 과장과 홍재한 (당시) 계장은 선정에서 빠진 버스조립업자로부터 모진 곤욕을 당해야 했다.

이때쯤 되니 진정서를 내는 정도가 아니라, 업자가 기계과에 직접 나타나 책상을 치며 대들고 심지어는 "너 죽고 나 죽자"고 협박하는가 하면 조립업자가 모여 "데모"를 하겠다고 윽박지르기까지 했다. 유 과장과 홍 계장은 사무실에 앉아서 업무를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국장실로 피신하기도 하고 여관에서 일을 보기도 했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니 김규민(金圭敏) (당시) 차관이 유석기 과장을 불러 "유 과장! 좀 양보해서 일을 수습해 보아"라고 하므로 두 사람은 상의 끝에 일부 풀어주기로 했다. 상공부는 "각 시도에 자동차 조립공장 하나씩을 정할테니 추천하라. 다만 이미 조립공장이 지정된 市道는 제외함."이라는 공문을 발송했다.

이 조치로 버스 조립업자들은 한 뭉치가 되어 단체행동을 하던 양상에서 지방별로 분산되었다. 그리고는 제각기 자기 공장 소재지인 도청에 가서 싸우게 되었다. 그 결과 상공부 기계과는 조용해졌으나 조립공장은 13∼14개로 늘어나게 되었다.

자동차 총보유 대수가 3∼4만대 정도인 좁은 우리나라 시장에 자동차공장이 10여개가 생기게 된 연유가 여기에 있다. 군사혁명이 난 지 2년 반밖에 지나지 않았던 때이다. 아직도 혁명의 분위기가 도처에 깔려 있는데도 자동차 조립업자가 단체로 진정하고 죽기로 항거하는 데는 별 수가 없었다.

자동차공업 육성정책은 후퇴에 후퇴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나라 자동차공업은 기존 조립업자의 압력으로 인하여 전진할 수가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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