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들어 반탁 시위로 서울 시내에 비상경계령이 발동되고 김구 등을 주축으로 한 반탁투쟁위원회가 구성되자 다음날 영등포에서 좌우 노조원들의 충돌이 시작 되었다. 2월에는 초대 민정장관에 안재홍이 취임 했고 이어 조선부녀동맹이 남조선민주여성동맹으로 개칭 했다.
3월 1일 남대문 3.1사건으로 좌우 양측이 충돌 하면서 여운형의 집이 폭파 되는 등 남한 전역에 24시간 총파업으로 좌익계 요인 총검거가 시작 되었다.
4월에는 북한 점령 소군 사령관이 경질되고 후임에 코로트코프 중장이 취임 하자 남측의하지 중장과 미국무장관은 소련이 공위에(미소공동위원회) 협조치 않으면 미국은 남한에 단독 정부를 수립 할 것을 언명했다.
5월은 행정명령 제 1호로 민청의 해산령이 내려지고 행정명령 제 3호에 따라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중 일체의 정치 집회를 금지 시켰고 이승만은 공동위원회에 불참을 선언했다.
6월 1일 이승만과 김구의 반탁 공동 성명으로 군정청은 한국인 기구를 남조선 과도정부로 개칭함에 따라 입법의회 김규식 의장이 사표를 제출하고 이날 ‘조선민족혁명당’이 ‘인민공화당’으로 개편했다. 16일 ‘임시정부 수립 대책 위원회가 발족되고 서재필 박사가 군정장관 특별의정관에 취임 하면서 최초 한국이 IOC 정식 참가 승인을 받게 되었다.
7윌 1일 서재필 박사의 환국과 함께 입법의가 ‘반민부일 협력자 특별조례법안’을 통과하고 19일, 여운형이 혜화동에서 피살, 인민장이 거행되고 ‘구국대책위의 해산령으로 30일 ’‘전국학생총연맹이 결성 되었다.
8월 1일 미국은 대한 구제금으로 1억 1천만불의 원조금을 결정했다.
8월 4일 세상을 뒤흔든 좌익계의 공영 방송국 적화기도사건으로 좌익분자들의 검거 선풍은 무더운 8월을 마감했다.
9월에 접어들어 대동청년단 결성(총재 이승만, 부총재 김구, 단장 지청천)으로 유엔총회에 한국문제가 정식으로 상정 되고 유엔총회가 토의를 거쳐 41대 6으로 가결 돰에 이승만은 총선거 실시를 주장 했으나 김구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성명을 12월 22일자로 발표하고 1947년의 12월을 통일론으로 마감했다.
<다음은 1948년편>
뉴스타운
뉴스타운TV 구독 및 시청료 후원하기
뉴스타운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