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교육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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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교육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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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군 집에 농군 나고 학자 집에 학자가 난다'

교육의 3요소는 학교. 교사. 학생이다. 미래의 교육 모습에서도 이런 틀은 반드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학교에 힘을 실어 주어야 되지만 교육제도들이 사회의 여러 요소들에 이끌려 다닌다.

그래서 우리의 교육학자들은 물론 외국에서조차 우리의 교육제도와 현장을 이해하지 못한다. 외국매스컴의 ‘믿거나 말거나’ 프로에 '3당 4락'이라는 말이 방영되기도 했다. 학생이 4시간 잠을 자면 대학에 못 간다는 말이다.

주입식 학습이 사라져야 하지만 개선되지 못하고 있다. 중학교 2학년이 되면 좋은 대학을 가고 못 가고가 결정된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길까, 유치원에서부터 학부모들이 몇 개의 과외를 시키면서 교육 평준화, 평등화를 주장하지만 이룰 수가 없다.

경제력이 없는 부모들이 있다. 대학을 안다녀도 된다고 말하지만 우리 사회는 분명히 엘리트집단이 지배하고 있다. 누가 어떻게 말하든지 지금 우리의 교육현장은 경제논리와 시장원리가 지배하고 있다. 인문학이 천시되는 이유도 그러한 이유다.

학생이 게으르고 머리가 나빠서 공부를 못한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경제력이 있으면 고액과외로 해결하고, 또 그게 통하는 사회가 되었다. 반대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유치원에서부터 낙오자로 뒤쳐지게 된다.

교육은 교사만이 시키는 것이 아니다. 가정교육. 유아교육이 중시되는 사회가 되었다. 하지만 유치원부터 경쟁이 심화되면서 학원이 황금알을 낳는 곳으로 변했다. 그래서 아이들은 일찍부터 경쟁을 한다.

이 대열에 끼지 못한 아이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열등에 빠지게 된다. 그런 경쟁 때문에 중학교 2학년이 되면 이미 좋은 대학에 가고 못가고가 결정된다. 이러한 현실이 우리의 교육현장이다.

교육학자 존 듀이는 ‘삶의 목적과 교육의 목적은 동일하다.’고 보았다.

돈, 명예, 권력 등의 소유가 아닌 ‘경험’을 통한 자신의 지적, 도덕적, 정서적 성장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와 같은 ‘경험의 성장' 혹은 '경험의 재구성'을 교육이라고 주장했다.

루소는『에밀』이라는 작품에서는 자연을 관찰하고 자연이 제시하는 길을 따르라는 ‘자연의 법칙’을 주장했다. 하지만 자연의 법칙에 역행함으로써 자연의 작품인 아이를 망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의 교육론을 넓게 보면 칸트의 교육론과 페스탈로찌와 플로베르 등의 근대 교육론과도 맥을 같이 한다.

루소는 자연 가운데서 교육을 시작하지만 강조점은 어린이의 특질, 본성을 아는 일이라고 보았다. 타락한 사회의 모든 것을 배척하고, 아이에게 본연의 자유를 주며, 자연에 돌려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의 교육목적은 아동의 경험이 더욱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보았다. 어른에게서는 어른을, 아이들에게서는 아이로 바라보아야 하고, 본질적인 차이를 이해하는데서 부터 교육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좋은 교육이 무엇인가보다는 먼저 나쁜 교육을 제거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 교육현실은 그의 이론이 통하지 않는다. 아이를 아이의 눈으로 보지 않고, 어른의 눈으로 보며, 인위적인 교육을 실시해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유아기에서부터 경쟁에서 낙오자가 되고 대학에 가지 못해서다. 그렇다면 분명히 문제가 있지만, 어디가 잘못인지를 말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교육에 경제논리가 지배하고, 경쟁이 심화되면 원래의 교육목적이 상실되어서 망가지게 된다. 교육이 어느 순간에 시작해서 끝이 나거나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무엇인가를 배우고 익히게 된다.

존 듀이의 말처럼 삶(生老病死)이 교육의 목적이라고 보면 평생에 걸쳐서 배우고 익혀나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원시인들도 생존에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 모르는 것을 묻고 가르치며 살았다.

현대인들 역시 다양한 방식으로 살기 위해서 지식과 기술습득이 필요하다. 사람은 자연과의 상호작용, 경험을 통해서 지식, 신념, 가치관, 태도 등을 습득하게 된다. 동식물과는 달리 지적, 도덕적, 정서적으로도 성장해 간다.

인간은 체험을 통하여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가소성(可塑性)이 있지만, 환경 적응성을 선천적으로 소유하고 태어나지 못해서 교육이 필요하다. 인간에게 배움이란 것은 끝이 없다. 어제의 올바른 이론이, 오늘에는 낡은 것이 되기도 하고,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그런 이유 때문에 어느 누구도 교육이란 이런 것이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고, 그것을 말했다고 해도 큰 의미가 없다. 교육이란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늘 변화되고, 그 속에 인간이 존재하며, 죽을 때까지 깨우치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우리교육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미래 학교모습은 학생, 학부모, 교육 수요자의 선택권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갈 것이다. 평생 학습 체제가 보다 심화되고, 개방성과 공정성을 기하는 교육이 확대된다.

가정교육의 중요성 때문에 어머니의 역할이 더욱 강조된다. 미래의 교육은 단순한 지식전달 교육이 아니라 창의력을 중시하는 교육이 된다. 학령기라는 개념도 사라지고, 학교 교육을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된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 양질의 교육기회를 제한 받았던 교육 환경문제도 사라진다. 교육 수요자들이 학교를 선택하고, 교육 내용과 방법을 선택하는 권리가 강화된다. 지식정보사회에서의 교육은 누구든지,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지식정보사회에서의 지식은 소수의 엘리트 집단에 의해서 생산되지 않게 변한다. 지식은 교양에 속하고, 일은 생산인에게만 속한다는 전통적인 관념도 무너지게 된다. 정보통신기술의 급격한 변화로 사이버 공간에 학습망이 보다 구체적이고 실리적으로 구축된다.

정보통신기술 활용은 교수-학습 체제의 학교 모습을 변화시키게 된다.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학교라는 울타리 의미가 퇴색된다.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하여 주도적, 맞춤식, 개별화 교육을 수행한다.

교육의 주체는 교사가 아닌 학생이 될 것이다. 교사들은 단순한 일에서 벗어나게 되고 학생들과 교사 자신에게도 더 투자할 수 있게 된다. 교사의 수준 차가 좁아져서 평준화가 이루어진다. 교사들도 가르치는 사회에서 배우는 사회로 전환된다.

미래의 지식정보사회에서는 교육체제가 교수 중심에서 학습 중심으로 전환된다. 교사는 일방적 지식 전달자가 아니고 학생과 상호 학습한다,

학교교육뿐만이 아니라 가정교육이 더 중시되는 사회로 변한다. 그러한 추세를 받아드리려면 부모가 먼저 배워야 한다. ‘농군 집에 농군 나고 학자 집에 학자가 난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게 변한다.

아이가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는 전적으로 부모의 학식과 교육열로 결정된다. 학교 역시 새로운 교육을 위한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국가의 교육제도는 다양하고 풍부한 학습이 가능하도록 교육 활동을 육성 지원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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