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광주사태 | ||
논두렁을 음폐물 로 삼아 낮은 포복자세로 30여미터 거리인 철탑(고압송전탑)부근에 이르자 선임하사 와 세 명의 현역병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낮은 소리로 "갈매기 갈매기"로 암호를 확인한 후 이들과 합류 했다.
광주-목포 간 (신의주 1호선) 국도인 나주와 영산포의(구진포) 중간 지점을 차단하려고 도로변 철탑에 매복한 모양이다.
선임하사는 대뜸 ‘부대에 남아야 할 분이’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철탑 주변은 어제 밤까지 무장 시위대가 4일 동안이나 부대를 위협하며 진을 치고 있던 지역으로 얼마 전 요란 했던 앰16 총소리가 폭도들의 퇴각을 위한 진압군들의 위협사격임을 알 수 있었다.
대대장과 남은 병력의 행방을 묻자 선임하사가 군복과 무장한 나에게 상사를 대하듯 거수경례를 한 후 대대장과 잔여병력은 도로 차단을 위해 전화국 쪽으로 출동 했다고 알려 준다. 2백여미터 논두렁을 질러 전화국 쪽을 향해 마구 뛰었다.
전화국 정문에 도착하자. 현역병 7-8명이 철재 파이프로 만든 차량 차단 시설을 설치하고 차량 통행과 주민들을 통제를 하고 있다. 대대장이 있다는 3층 전화국 옥상으로 뛰었다. 나를 본 대대장은 놀란 표정으로 "부대에 잔류하라며 당부 까지 했는데" 하면서 나를 반긴다.
그 순간 감정이 복 받혀 온다. 그가 출동 하면서 당번병 에게 당부 했던 말 "민간인인 나를 희생 할 수 없으니 부대에 남아 예비군과 방위병들을 보호해 달라"는 당부와 함께 내가 잠든 사이 출동해 버렸던 그를 이곳에서 만나고 보니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두 사람은 서로를 부등 켜 안고 무언의 전우애를 다짐하는 사이에 전화국 직원 두 사람이 허겁지겁 옥상으로 뛰어왔다. 진압군의 출현에 이제 살았다는 듯 밝은 표정으로 자신들이 할일을 맡겨 달라고 한다. 우선 비상 전화와 방송 시설을 부탁했다. 그들은 기능직답게 10여분 만에 전화와 읍내 쪽을 향해 확성기 3대를 삽시간에 설치했다.
나는 마이크를 두 손으로 움켜 들었다. 원고도 없는 마이크를 들었지만 그레도 방송만은 자신이 있다. CBS 광주 기독교 방송국에서 뉴스 중계를 생방송으로 해 보았기에 방송만은 자신이 있었다. 당시 상대지인 전남일보는 방송국을 소유 했지만 우리 회사는 방송 매체가 없어 기독교 광주방송과 뉴스 제휴를 한 터라 마이크와는 다소 익숙한 편이다.
손에 쥔 마이크가 마치 전쟁터의 선무방송처럼 느껴진다.
"읍내에 있는 무장 폭도들에게 전 한다.! 잠시 후 계엄군이 읍내로 진입 한다" 무기를 버리고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라! 저항 하는 자는 시민군이 아닌 폭도로 간주하고 저항하는 자는 발포한다! 여기는 나주지역 계엄본부다" 반복되는 내용으로 방송을 했다.
더 멀리 더 멀리 확성기 소리가 울리도록 목이 터지도록 외치다 정신을 잃었다. 잠시 찬 기운에 눈을 뜨니 대대장과 김 중위가 번갈아 가며 물수건으로 온몸을 적셔주고 있었다. 모두가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지만 나는 다시 마이크를 움켜잡았다. 문득 무장 폭도들에게 퇴로를 알려주지 못한 게 생각이 떠올랐고 어제 새벽 진압작전 계획에 포함되어 있는 퇴로 지점을 알려줘야 했다.
나주는 광주로 진입하는 서남부 11개 시군의 교통요지이자 관문이다. 광주를 진입하려면 2개 노선 으로 한쪽은 나주-영산포 국도는 완도 ,진도, 해남 ,강진 ,장흥에서 진입하고 광.목간 도로는 목포,신안, 무안 ,함평등 4개지역의 통로로 시위대가 비교적 적은 편이기에 광-목간 도로를 퇴로로 열어주자는 결정을 했다. 탈수상태에서 마이크를 다시 들었다.
"무장 폭도들은 들어라! 나주-영산포간 도로는 차단되었으니 광-목간 도로로 퇴각하라!" "광-목 간 도로는 개방되어 있다! 무기를 버리고 귀향하라! "저항하는 자는 발포 한다" 10여분동안 똑 같은 내용의 방송을 계속했다. 방송 이후로 옥상에 설치한 비상전화의 벨소리가 쉴사이 없이 울려온다. 대대장과 김 중위가 번갈아 전화를 받는다. 대부분 읍내 예비군과 주민들이 전해준 시위대의 동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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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갑 의원, 송영선 의원 등에 대한 징계는 한나라당의 정체성에 직결된 문제요, 더 나아가 한나라당 존재 이유에 관계되는 문제입니다. 이러한 때에 심재철 의원이 인명진 편을 들어 우국충정 의원들 징계론을 두둔하신다구요. 모 인터넷 신문에 보도된 대로 는군요. 동신문에 님은 또 는군요.
그래요? 한때 광주사태 전문가이셨던 심재철 의원께서 광주사태 당시에 해방구가 설치되었다는 사실을 모르실 리 있을까요? 그리고 김용갑 의원이 맞는 말을 하셨고, 광주시민들도 사상과 신념이 있어서 해방구를 설치하였을텐데 진실을 말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요? 오히려 진실을 막고 거짓을 강요하느 인명진의 윤리의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이 이러함에도 심재철 의원께서 여전히 광주사태에 대하여 잘못된 사관을 고집하시며 김용갑 의원 징계론을 두둔하신다면 이번에는 저희가 심 의원님께 광주사태에 대하여 질문드릴 차례입니다. 님은 광주사태 당시 광주사태 중심점에 서있었고, 1988년 광주청문회 때 MBC기자 신분으로 그 중심에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광주사태에 대한 몇가지 의문을 님에게 공개적으로 질문드립니다.
심재철 의원님과 유시민이 광주사태 중심점에 서있는 이유는 광주사태 점화는 두 분이 1980년 5월 15일 주동한 서울역 집회였습니다. 당시 십 만이 넘는 시위대가 동원되었으며 그 목적이 5월 22일로 예정되어 있던 김대중의 전국적 민중봉기를 지원하는 것이었기에 그 불똥이 5월 18일 광주로 튀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먼저 우리는 당시 시위구호에 대한 의문이 있습니다. 즉, 당시 시위구호는 "최규하 대통령 하야!" "신현확 총리 퇴진" "직선제 개헌 반대"였습니다. 세번째의 "직선제 개헌 반대"는 줄여서 그냥 "개헌 반대"라고 외쳤었느데, 도대채 무슨 이유로 간선제를 직선제로 개헌하는 것을 386 운동권은 반대하였는지 이해가 안갑니다.
당시 님의 나이 겨우 스물 한 살이었으며 전공과목도 정치와는 거리가 먼 영어교육이었으므로 그러한 시위 구호의 의미를 이해하고 계셨는지는 흥미로운 관심사일 것입니다. 그 시위 구호의 출처는 님 자신입니까? 아니면 김대중이 이해찬을 시켜 내려보낸 지령이었습니까? 그 시위구호 출처가 후자였을 경우 과연 그것이 민주화운동이었느냐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대중이 이해찬을 통해 서울대와 전남대 학생회장단에게 내려보낸 구호가 각 대학교에 그대로 전달되고 학생들은 그 구호의 정치적 의미에 대하여 토론해 볼 기회조차 없이 시위현장으로 떠밀려 동원되는 방식이 김대중 홍위대 방식인지는 몰라도 아마 민주화운동과는 좀 거리가 있을 것입니다.
두번째 질문은 당시 님이 최규하 대통령 하야를 요구한 서울역 집회 사건에 관한 질문입니다. 이제 곧 최규하 대통령 회고록이 발간될 때 주요 내용 중의 하나가 아마 님이 중심에 서 있었던 하야 요구 사건일 것입니다. 고건 당시 정무수석이 학생 시위대의 요구를 전달하며 "현 시국에서 사태 해결을 위해서는 하야 단안을 내리셔야 합니다"라고 하야 권유를 하셨습니다. 서울역 집회 닷새 전의 일이었으며, 당시 석유위기 때문에 최규하 대통령 중동에 석유 외교 떠나실 때 차마 직접 말씀드리지 못하고 편지를 써서 비행기에 오르시는 대통령 손에 쥐어드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귀국하신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 단안 뉴스 그후 8년 후 광주청문회 때 님은 최규하 대통령 하야 책임론을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뒤집어 씌우는 논리를 주장하셨으나 아마도 최규하 대통령 회고록은 당시 학생 운동권이 하야를 요구하였던 사실을 증언할 것입니다. 1980년 5월 15일 님은 시한부 최후통첩을 내무부장에게 전달한 바 있